|
주님 공현 대축일을 연중 제1주일로, 오늘은 연중 제2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그러면 지난주 주님 공현 대축일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공현, 이런 데 초점을 맞추면 되겠습니다.바로 신성께서 인성을 공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면 신성은 무엇을 할 것이며, 인성은 또 무엇을 할 것인가, 신성은 나를 부르고 있고 인성은 그 부름에 응답한다.이런 측면에서 오늘의 강론은 이어지는 부르심과 응답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특별히 여러분들이 강론을 들을 때는 항상 1독서의 말씀은 서론으로 들으시고, 복음의 말씀은 본론으로 들으시고, 2독서의 말씀은 결론으로 들으시면 정확한 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론의 요지는 바로 2독서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거기 불륜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이런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 불륜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남녀 간의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불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서에서 불륜은 그런 뜻은 아닙니다.불륜이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나는 응답이 있습니다.부르심은 신성이 있고, 응답은 인성입니다. 이것이 연결되지 않고 단절된 사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이런 단어가 있습니다. 주님의 도구, 주님의 지체라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사용되어져야 된다.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왔는가? 은총으로 오신 것입니다.그러면 은총에 대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 것인가? 그 은총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나는 이걸 평화로 사용되게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내가 평화의 도구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나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오늘 성서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어. 자기 생각입니다.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사제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면 이것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상대가 아파하고 도움을 청하는데 나는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면, 그것 또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남편은 남편대로 살고, 아내는 아내대로 사는 것 이것 또한 불륜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세상의 해석과 신앙의 해석은 이렇게 다르다. 이렇게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전례를 통해 저는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세례 성사를 받아야 하고,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형제자매가 되며, 천국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말씀을 올렸습니다.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베드로서의 말씀과 같이 사람을 차별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리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말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살지도 않는 사람은 차별해도 된다고 저는 이렇게 들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느님의 뜻을 내가 받아들이는 측면을 깊이 헤아려야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도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니, 뭐라고 얘기합니까?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은 듣고 있습니다.’ 듣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이런 표현이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듣지 않고, 듣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분명히 듣지 않는 것이고 듣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받고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삶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대하는 사람과 자신이 처한 환경을 통하여 각자 독특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형제와 이웃, 그리고 가정과 직장, 사회와 국가가 부여하는 직책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소임과 직책에 만족하며 살아가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여기에 우리 삶에 문제가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해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명문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의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만과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고,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를 선택으로 학업의 의욕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것도 결국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을 하지 못한 데서 생기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세상의 부름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오늘 1독서 사무엘과 같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식별하기가 매우 힘듭니다.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고 평범한 사무엘을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바로 잡으라고 부르셨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그러나 한밤중에 자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자신의 스승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합니다.참으로 인간의 귀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자신의 적성을 식별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저는 우리 성복동 성당에 주님께서 왜 나를 파견시켰을까? 라는 것을 나는 이렇게 현존을 분명히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나를 왜 파견시켰을까? 이제까지 제대로 살지 못했으니 이제부터 마지막 최선을 다해 목숨을 다 던지면서까지 이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서 한번 해보아라. 라는 말씀으로 들린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값을 지불하면서 상대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었다면, 바로 저도 몸값을 지불하면서 이 신자 공동체를 활성화시켜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성서 따로, 나의 삶 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삶이 함께 연결될 때, 우리는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지만, 따로 생활할 때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저는 성서를 그렇게 이해했습니다.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상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하느님의 목소리를, 아니 우리의 적성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결국 우리 인간의 욕구는 삶의 원동력이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과연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권력입니까? 물론 이와 같은 것들도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며, 또 이와 같은 부름에 따라 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것도 바로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은 삶의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또한 만족을 줄 수도 없습니다. 신앙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성실한 삶을,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를 ‘서로’라는 이 단어와 ‘함께’ 라는 이 단어가 함께 잘 엮어져야 되는데, 오늘 1독서의 말씀은 ‘서로’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오늘 복음의 말씀은 ‘함께’라는 단어가 잘 어울려지고, 오늘 2독서의 말씀은 이 ‘서로’와 ‘함께’가 연결되면 정말 아름다운 관계지만, 이것이 연결되지 않으면 불륜이라고 말한 것으로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다른 어디에서 보아도 같은 말이지만 창틈으로 보는 모습과 마당에 나와서 보는 모습, 그리고 동산에 올라가 보는 모습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깊숙이 들어가는 탐험에는 특별한 세계가 있습니다.수도자가 사제의 성소를 바라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전해 듣는 것과 직접 성소 모임에 참여하는 것과 들어가 살면서 체험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주님을 만나는데도 바로 라삐 어디에 있고 계십니까? 하고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붙잡혀 끌려가는 현상이 나타나거든 몸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간접적인 책임은 우리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간접적 체험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주님께서 원하는 길을 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주님께서는 가급적 직접적 체험을 충분히 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우리도 세례성사와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살면서 때로 하느님을 벗어나 내 몸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기에 우리 몸은 하느님께 속해 있고 사실은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주님께서 값을 치렀다. 바로 목숨을 내놓고 목숨을 살렸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비천한 우리를 귀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이 비천한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바로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고, 정말 신앙의 신비로움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그 점을 우리는 깊이 헤아리고, 우리는 비천한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상대를 비범하게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아서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불륜을 멀리하십시오. 라는 바오로 사도의 한계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뜨끔해지는 것은, 내 양심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음성과 달리 내 몸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모습을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어쩌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움직이는 그 모습과 사제가 움직이는 모습과 레위인이 움직이는 모습은 분명 다릅니다.사제는 결국은 그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들었는데도 안 들은 척하고 갑니다.보았는데도 보지 않은 척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러지를 않았습니다.이것은 바로 하느님이 ‘얘야 나 좀 도와줘’ 하고 소리를 내는 것과 똑같은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은 지금 가고 있습니다.’라는 모습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느꼈습니다.나 편함을 택하면, 결국은 우리를 착한 사마리아인이 믿는 하는 것을 포기한 것과 똑같습니다.내가 편하고 싶습니까? 나도 편하고 싶습니다. 내가 불편해집니까? 상대가 편해집니다.이 점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근데 상대가 편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면 내가 불편한 것을 택할 수 없습니다.상대의 불편함을 못 보고 나의 불편함을 생각하면, 결국은 사제가 그냥 지나간 것처럼, 레위 사람이 지나간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 자신들의 속내에 세속적인 영광과 성공에 대한 바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결국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참된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사무엘 예언자처럼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라고 뒤늦게라도 응답할 수 있도록 깨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구분하고 판단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릅니다.신중함을 믿음으로 우리는 되도록 중립적 위치의 오랜 머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한 가지를 잃는 것이 싫은 마음은 인지상정이어서 우리는 자주 결단보다는 미련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싶습니다.어쩌면 선과 악을 쉽게 구별하려 들지 않고 판단을 멈춘 채, 괄호를 치는 태도야말로 원숙한 삶의 지혜일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우리는 섣불리 내린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이를 그르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또한 큰마음 먹고 내린 정의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그러기에 신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방법은 분명 인생사에서 필요한 것이지만,우리는 이을 신중하며 그저 처세술이나 갈등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무책임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반드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신앙의 가치는 인간의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신앙인은 무모하지만 용기를 내고 결단해야만 하는 끝없는 회개로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이제까지는 이렇다 하는 것도 있지만, 이제부터는 이렇다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회개를 좀 잘하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보속을 잘 새겨보면 어떨까 이런 측면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이것이 분리돼 있으면 우리는 불륜이요.연결되어 있으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불륜을 저지르지 않기로 결심해 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첫댓글 멋진 강론을 글씨로 본다는 것은ᆢ 이를 만들기 위하여 애쓰신 수고하신 분들의
아름다운 결과물입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