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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주의 말씀은 불륜이 핵심이었습니다.불륜, 남녀 간의 불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나와 너와 연결되고,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연결되는 그 길을 선포한 것으로 저는 알아들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시몬을 먼저 불렀을 때 함께 했고, 그 다음에 장차 너는 이제 케파라 볼 것이며, 베드로라고 얘기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너는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다. 이런 부르심에 ‘예, 주님’ 하고 응답했습니다.지난주의 말씀을 그래서 불륜을 없이 하면 부르심을 받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다음 주의 말씀은 주님께서 유달리 권위가 있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권위가 있었다는 이 말씀은 불륜을 제거하고 그 두 사람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때 유달리 권위가 있었다.저는 이렇게 해석을 해봅니다. 그래서 지난주의 말씀을 부르심이라고 표현한다면, 다음 주의 말씀은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오늘의 1독서가 부르심이고, 오늘의 복음이 응답이며, 그다음에 2독서가 거기서 얻어지는 현실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하는지 좀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보석으로 넘겨지고, 보석은 열매를 맺습니다.증인은 증거가 되고, 증거는 승리로 막을 내릴 것입니다.자유인은 책임감을 지고, 책임감을 지면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쓰게 된다는 뜻입니다.1독서의 깨달음은 복음의 실천함으로 넘어가고, 실천함은 이제 2독서에서 바로 무한성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세상의 그 모든 형태는 사라지고 있습니다.유한한 것에 매이지 말고, 무한한 곳을 향해서 가야 합니다. 라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아침에 일어나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주님께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저는 엉겁결에 ‘예,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그러면서 오늘 하루가 시작됩니다.그다음에 결국은 저녁이 되었을 때 어떻게 기도하는가? 똑같이 십자가 성호를 걷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주님께서 ‘너 나를 사랑했느냐?’라고 물으십니다.그러면 ‘예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머리카락까지 다 세워두셨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나의 일거수일투족 생각, 말, 행동을 다 간직하시고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바로 나의 머리를 통해서 나의 생각을 통해서 조목조목을 다 다지면서 이때는 내가 좀 잘한 것 같고, 이때는 좀 못한 것 같고 등등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정리하면서 잠을 청하면서 오늘 주님께 ‘주님 품 안에 저 오늘 죽습니다.’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날 때는 ‘오늘 다시 나는 부활했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또 하루가 시작되면서 반복된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어쩌면 아침에 마음 고통을 느끼면서, 저녁에는 몸 고통으로 답을 내린 겁니다.그것이 바로 구원으로 넘어갑니다.어떻게 또 변화해보시기 바랍니다. 수동이 능동으로 바뀌고, 하느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바뀌고, 필수가 선택으로 바뀌고, 선물이 제물로 바뀌며, 소명이 사명으로 바뀝니다.바로 주연은 하느님께서 출발을 했지만 너 나를 사랑했느냐 주님께서 모든 것을 나에게 주관하시면서 물었지만 ‘오늘 하루 너 사랑했느냐?’ 네가 도대체 어떻게 했는가를 바로 나에게 묻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다음 주에 말씀이 나온 것을 보면 정답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마귀가 결국 예수님한테 뭐라고 얘기하면 ‘당신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결국은 우리는 불륜을 저지른 것은 분리시키는 것인데, 다음 주의 말씀은 상관이 있습니까? 너는 너대로 살아, 나는 나대로 사는 방법이 있어. 틀린 말 아닙니다.그러나 맞는 말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결국 나와 너를 분명히 사랑의 끈으로 묶어줬는데 나는 나대로 가고 너는 너대로 가고, 그런다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귀가 결국 예수님께서 바로 너와 상관되면서 올바른 길을 유한한 것을 제거하고 무한한 것을 찾도록 이끌고 있는데도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눈앞의 이익만 보고 바로 멀리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난주의 말씀은, 불륜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표현할 수 있고, 다음 주에 바로 상반된 것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해석하면 좋겠습니다.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상반된 모습 안에서 싫어하더라도 우리는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여러분들도 자주 기도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따로 기도 시간을 갖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전할 때도, 설거지할 때도, 밥을 할 때에도 지나가는 길을 걸을 때에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 기도를 자주 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내가 있는 현재에서 과거를 보면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현재 내 상태에서 미래를 바라보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만이 결국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잘 정돈된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강론을 통해 신앙인의 삶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대하는 사랑과 자기가 처한 환경을 통하여 제각기 독특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말씀을 올렸습니다.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 계신지,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올렸습니다.오늘 우리의 과제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는가?바로 여기에 관점을 두고 오늘 강론은 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요나의 저자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은 그리고 지녀야 할 새로운 삶의 태도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며, 현세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회개란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한 사람의 성장과 성숙은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회개는 우리 일상적인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에서 생긴다고 봅니다.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과 잘못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는 깊은 통찰 말입니다.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깊은 반성이나 의식이 없이, 여론이나 유행에 따라 살아왔으며, 나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그리고 비록 다소 배고픔이나 헐벗음에서는 벗어났지만 현대인 대중사회는 우리의 삶을 기계적으로 만들어 우리의 개성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인간은 한낱 사회의 도구요 상품이며, 사회의 유용성에 따라 평가받으며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물질적 번영은 한 개인의 개성을 상실해 가져왔고, 인간적인 접촉이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고독하고 분방한 중에 불안한 삶을 영위하고 지금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의식으로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갖고 있습니다.그리고 많은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하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제 분수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다 병이 들고 파탄을 초래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이것은 우리의 삶의 태도가 지나치게 현실에만 집착하여, 삶의 의미와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데서 오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시켜 40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잿더미가 된다고 아주 힘차게 경고의 말씀을 드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농부는 땅을 갈고, 어부는 그물을 던집니다. 삶에 필요한 물자를 얻으려고 저마다 바다로 가거나 논밭으로 나가고 직장으로 갑니다.어제의 피곤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지만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갑니다.가족마저 알아주지 않는 애환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기꺼이 희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가족이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자신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은 별개가 아닙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가족은 서로에게 생명과 밥을 주고받으며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가정은 가장 작으면서 가장 완전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영성이란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라는 것을 믿으며 인간과 자연, 자연과 우주의 모든 구성이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나와 이웃과 세계가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고통도 기쁨도 하나입니다.저편 누군가의 고통과 상처와 눈물은 파동을 타고 내 영혼을 울리고 있습니다.그로 말미암아 나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슬퍼하는데 홀로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은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웃이 행복해야 하고, 그를 위해 나를 완전히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세계관에 진정한 행복의 원리가 있고, 시대의 치유가 치유의 길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꽃은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향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이웃을 위한 나의 희생과 헌신은 행복 발전기로서 내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뜻입니다.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시어 깨우치시고 있습니다.내 가족을 넘어서라.세상의 모든 일을 내 가족으로 삼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물을 던져라.이제 나는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했을 때 그들의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배와 아버지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곧바로 주님을 따라 나서는 이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이 말씀과 맥을 함께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면서 나는 성탄을 만끽하게 되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나는 부활을 얻게 되기에, 제가 말씀드리기를 신앙의 핵심은 성탄과 부활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요, 신앙인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이와 같은 삶의 태도를 취할 때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사도들과 같이 현세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땅에 하느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이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진정한 신앙인에 초점을 두고 강론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렸습니다.나와 함께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관계가 없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식으로 살면 순간적으로는 유한적으로는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는 그 이 삶이 결국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내가 만난 모든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 조금 손해 보지만 상대에게 이득을 주면 그는 10배, 30배, 60배, 100배로 나에게 되갚음을 준다는 주님의 성서의 말씀을 잘 되새겨 듣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심전심의 율법이 있다고 그럽니다. 염화시중도 있다고 그럽니다.옷깃만 스쳐도 3세가 인연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그 점을 깊이 다니면서 가볍게 여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사제인 내가 신자들을 버려두고 사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양들이 없는 목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양들의 모습을 낱낱이 잘 살피고 그들에게 아픈 상처를 싸매줄 수 있을 때, 상관이 될 때, 나는 유달리 권위가 있는 것이고, 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여러분들도 본질을 정확히 보고 본분을 다하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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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웃을 위한 나의 헌신은 나의 기쁨의 원천ᆢ좋은 말씀입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