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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녕하세요. 명절 때인데도 성당에 그래도 많이 오셨습니다.우리 성가대원들도 함께 노래를 잘 불러주시고 있습니다.왜냐하면 다 고향에 가셔서 없는 데, 미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강론을 하기 전에 반드시 십자가 성호를 긋습니다.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 강론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강론은 십자가의 수직선은 선물로 받은 것이고, 십자가의 수평선은 제물로 주는 것입니다.받은 것은 성탄이고, 주는 것은 죽음인데 그 죽음이 부활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수직은 나를 통하여, 십자가의 수평선은 너를 향하여, 그리고 함께 교집합이 된 것은 우리 공동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전혀 안 갈 수 있습니다.아니 나병 환자가 병에 걸렸다고 내가 죄인인가, 내가 엊그저께 교통사고 났는데 교통사 사고가 나기 전에는 내가 의인이었고 교통사고가 나니까 나는 죄인이 된 것인가 말이 안 됩니다. 무엇을 전하고 싶어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당시 레위기 시대에는 병이 있는 것을, 환자가 있는 것을, 결국은 죄의 결과라고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죄를 지었으니까 이런 병이 있지. 바로 이것이 레위기 시대에 그렇게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것을 주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잘못된 것을 고쳐주시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결국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죄를 없이 하라. 이런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다음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고, 사제에게 가서 그리고 본인이 증거적 삶을 살라. 이제는 너에게 이렇게 증거적 삶을 살라고 한 것입니다. 1독서의 말씀은 개별적 증인이 되라는 것이고, 복음의 말씀은 공동체적 증거가 되라고 말씀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즉 증인이 되는 것은 회개를 통해서 용서를 얻은 것이고, 증거가 된 것은 보석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은 항상 출발점은 개별적으로 하지만, 공동체로 나가는 삶으로 이렇게 가야 된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을 보면은 사도 바오로가 고린도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어떻게 생각하면 사도 바오로가 아주 잘난 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좀 받습니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아마 여러분에게 제가 강론하면서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래 맞아 저 신부님을 본받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어떤 행위를 하는지 잘 눈 여겨 보십시오.내가 주님을 본받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선물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받아들이십시오. 했는데 그전에 나는 나의 유익보다 상대 유익을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이 말이 바로 그것을 다 해결시켜준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그러니 우리도 사도 바오로의 그 모습을 잘 눈 여겨봐야 됩니다.사도 바오로가 신성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인성인 형제한테 애를 쓰는 그 모습은 받아들이고 내어놓는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는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으니, 그대들도 나를 본받으십시오.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그 상태를 영성이라고 얘기하고, 받아들인 것을 형제들한테 내어놓는 그 상태를 성사라고 얘기합니다.영성은 하느님 사랑이고, 성사는 이웃 사랑입니다.어쨌든 하느님 사랑은 십자가의 수직선이지만 이웃 사랑은 십자가의 수평선입니다.이 점을 잘 간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수직선 이것은 구약 성경입니다. 십자가의 수평선 이것은 신약 성경입니다.구약 성경은 나를 통하여, 신약 성경은 너를 향하여 두 가지가 합쳐지는 신구약 합본은 우리 공동체를 향하여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 답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자비는 기쁨을 함께하는 것보다 슬픔을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큽니다.신앙은 하늘을 보고 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육체적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럴 때는 필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고 선택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언제까지나 성경은 비유와 역사를 통해서 신앙을 찾도록 안내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이번 주간은 이제 사순절에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좀 사순절에 걸맞는 모습으로 연중 6주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그래서 5주간에는 우리 신앙인의 사명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는 말씀을 드렸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외딴 곳에 가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고통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오, 우리 삶의 내용임을 깊이 깨달아 매일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형제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올렸습니다.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의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 따라 성숙할 수도 있고 치유를 받을 수도 있고, 좌절과 한숨에 불치병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일상의 고통을 죽음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언제나 기쁨과 감사를 드리며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품위를 잃고 매일을 불평과 불만 속에 원망과 저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그러나 인간은 인간 조건으로서의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갔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의미를 더할 수도 있고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그러므로 우리 문제의 초점은 고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원망과 저주로 남에게 전가함으로써 형제들에게 전염시킨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고통은 우리 삶의 내용이지, 결코 피해야 할 병이 아닙니다.우리의 물질병을, 하느님의 뜻을, 삶의 의미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릇된 삶의 태도가 우리의 문제로 대두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누구든지 살갗에 병이 생겨, 남에게 전염시킬 위험이 있는 사람은 사제에게 데려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종교의 임무는 우리의 그릇된 삶의 태도를 치유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인간이 아집과 오욕칠정에 얽매여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매일의 고통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본래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 중에 악성 피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태도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그러므로 종교의 가르침은 오늘 1독서의 악성 피부 병자와 같이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정말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늘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에서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사도 바오로는 나는 똑똑하기로 남들한테 져본 적이 없습니다.나는 바리사이 중에 바리사이요 바로 율법학자 중에 율법학자였습니다.당시 시대에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가장 우뚝 서 있는 종교 국가이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나는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나는 이제 이 장점을 자랑하지 않고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이렇게 표현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장점이 모두 다 쓰레기입니다.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쓰레기로 여깁니다. 하는 그 표현을 정말 우리는 잘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죄인입니다 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인과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의인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확인해 보시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다시 말하자면 자기 부정, 자기 무화의 행위인 것입니다.고통을 통해 자기는 한낱 먼지요?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체험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본래의 인간으로 순수한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고통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인간 조건임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살아온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지금까지 우리는 욕망과 위선에 사로잡혀 진정한 내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감하면 어떨까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오늘 부정한 병자와 같이 항상 소외와 한숨 속에 그리고 분노와 불만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결국 인간은 죽음과 고통을 통해서 자기의 유한성을 깨닫고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와 같이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선생님,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애원할 때 예수님의 치유를 받게 되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나병 환자의 고백이 참으로 처절해 보입니다. 마음만 써주신다면 나병까지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마침내 하느님의 자비를 이끌어냈습니다.죽음에 이르도록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병임을 아는 이가 어떻게 나 좀 살려주세요. 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하였을까 이것이 정말 아주 처절하고도 그러면서도 정말 마음에 쏙 들어옵니다.나 좀 살려 주소서 하는 것은 바로 나를 초점을 두고 있지만,바로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바로 너에게 초점을 맞춰두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래서 1독서의 말씀은 증인이라 그랬고, 복음의 말씀은 증거라고 말씀을 드렸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의 십자가 사랑, 수난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랑입니다.그래서 저는 사랑을 아픈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아픈’이라는 형용사가 결국은 수난과 십자가로 본다면 사랑이라는 이 단어는 부활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우리는 삼종 기도 끝에 보면 바로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에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모습은 우리 가톨릭 신앙은 성탄 신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부활 신앙입니다.성탄은 유한은 성탄을 말하고 있지만, 부활은 영원한 부활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도 매일의 고통을 통해 진정한 자기로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감으로써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사랑이란 아집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순수한 인격 안에서 한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상대로 하여금 그 가능성을 인식하도록 이끌며 그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그가 변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나는 전달하면 그만이야 하고 바로 믿음 천국 불신지옥 하고 그냥 외치고 돌아다니는 그 모습을 보면 그것이 과연 전교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차라리 그런 모습보다 본인이 정말 거룩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그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착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따라가도록 이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드립니다.다시 말해서 사랑은 그리고 삶의 의미는 우리의 모든 가면과 유산을 벗어버린 순수한 인격적 만남에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따뜻함이 우리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만남 설명서를 제공하는 듯합니다.우리가 부정한 사람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건네는 모든 말을 절대 놓치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십니다.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희망을 품었으면 합니다.우리의 좋은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리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품어주시는 그분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결국 신앙인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삶을 절망과 저주로서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고 진정한 자기로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양심의 가치 없는 진실한 삶을 사는 데 있다고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마이너스 에고의 삶,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나는 없는 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나를 잊는 나로 만들었습니다.없는 나는 마이너스 에고지만, 있는 나는 플러스 에고가 됐습니다.플러스 애고로 나는 성탄의 선물을 받은 내가 이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부활로 가는 것인가 이것은 다시 마이너스 에고의 삶으로 우리가 부단히 노력해야 됩니다.내가 비록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이득이 된다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사제가 이 자리에서 강론을 하는 것도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이 말을 제일 먼저 실천해야 될 사람이 강론하는 사제입니다.나입니다. 그 다음에 동시에 너로 넘어가면 강론은 성공한 것입니다.나는 아무런 상관없이 너희에게 이 말 저 말을 계속 떠들어대고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아무짝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출발은 나에게, 그다음에 과정에서 너에게 그래서 우리는 우리 공동체가 함께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나를 항상 배제시켜놓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실 때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근데 요즘에 종교 지도자들은 잘 다녀 오너라. 합니다.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나를 따르라 하는 이 말은 본인이 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고 또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이제 이번 주간에는 사순절에 들어가니 십자가도 다른 사람에게 다 맡겨놓고 나는 그냥 빠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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