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녕하세요.
오늘은 총회가 있는 관계로 8시 30분 미사와 11시 미사를 통합하여 10시 미사를 지금 드리고 있습니다.
사순 1주일, 지난주의 사순절은 세례성사를 예비하는 식이,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시기라는 말씀을 올렸습니다.사순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과제는 복음을 굳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그래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신앙인으로서 가야 할 길은 잃어버리고, 많은 유혹과 불안 속에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광야를 헤매며 찾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이 춥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오늘 이른 아침에 성전에 오신 까닭은 과연 무엇입니까? 아마도 그것은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복음이 가르치는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듣고 생각해 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렇다고 인생을 다 살아보지도 못한 제가 주제넘게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저희 인생이 여러분의 인생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인생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왔습니다.그리고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똑똑하고 이 말씀을 믿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인생이 왔다 가는 것이오, 받으면 주어야 하고, 주면 받는 것이 삶의 길이며 우주의 법칙이고 하느님의 얼굴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어둠의 골짜기를 걷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빛에 대해서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러 산에 오르던 아브라함은 앞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약속이 빛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되면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칩니다. 인간의 계산과 논리를 훨씬 뛰어 넘으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바오로는 또한 온갖 환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세상의 고발과 단죄는 힘을 잃고 맙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의 처지도 이와 비슷합니다.복음서에서는 영광스러운 변모 다음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해주었습니다.
산에서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었는데, 그때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했는데,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거룩한 변모는 우리가 사순 시기를 지날 동안 바로 부활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 부활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그때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대화를 나눈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다고, 그 다음 성경 구절에서 3회에 걸쳐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명사고,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입니다.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이 율법과 예언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율법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언은 내어놓는 것이니, 우리는 이제껏 받아들인 것과 내어놓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올렸습니다.오늘 제자들이 보았던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 모든 것이 실현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는 그날까지 제자들의 눈앞에서 결코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제자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수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세상의 힘이 예수님을 없애 버릴 수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해도 그분은 당신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어쩌면 그 모습은 고통의 신비를 통해서 영광의 신비를 얻는 길이다.저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분명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난과 십자가를 우리는 늘 받아들여야 되고, 삼종 기도할 때 우리는 끝부분에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루에도 세 번씩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 본다는 것은 내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으면 내 눈앞에 나타나도 보지 못합니다.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본 것이 전부이고, 내가 보지 않은 것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편견과 오해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편협한 사람들이 빠지는 늪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편향된 시각을 지닌 매스 미디어, 곧 신문이나 방송, 뉴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자기가 보고 싶은 세상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편견의 믿음에 빠져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몇몇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십니다.세상에 그 어떤 눈으로 볼 수 없는 놀라운 환시였습니다.거룩함의 변모는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엉뚱한 청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엉뚱하다기보다는 그 놀라운 감동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솔직한 그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봅니다.아마도 제자들은 영광을 보려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 이후에서야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믿음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내가 보는 것도 전부가 아님을 고백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는 길이 곧 믿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은 탐욕과 불신에 빠지면 볼 수 없는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을 보는 마음의 능력입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눈을 감을 때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어주십니다.가끔은 세상을 향하던 눈을 감아보시고, 보지 못했던 믿음의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주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 이유는, 변모는 우리에게 선물로 들어온 겁니다.결국은 이 변모를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분명히 변모는 부르심이었고, 거기에 대한 응답은 변화였습니다.그렇기 때문에 변모를 통해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각자 노력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거저 받았으면 거저 주어야 되고, 거저 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거저 받는 부활을 얻는다는 그런 신앙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아브라함처럼, 바오로 사도처럼 산에서 내려와 오늘의 기억을 간직해야했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 마음속에 늘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