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녕하세요.
제가 우리 성복동 성당에 오자마자 이런 모토를 걸었습니다.‘나를 통한, 너를 향한, 우리 공동체’ 이것을 우리 교우들이 늘 간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해서 그렇게 모토를 걸었습니다. ‘나를 통한’은 성탄이고, ‘너를 향한’은 부활이고, ‘우리 공동체’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향해 가지만 먼저 내가 변화가 되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내가 변화되는 것을 증인이 되다.그러고 너를 변화시킨 것은 증거가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제1독서는 나를 통한 , 복음은 너를 향한, 2독서는 우리 공동체입니다.그러한 측면을 강조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오늘도 그래서 1독서에는 나를 통하는 회계에 초점 맞췄고, 그리고 복음은 너를 향하는 보속에 초점 맞췄고, 그다음에 2독서의 말씀은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우리는 부활8주기를 지내고, 6주간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어쩌면 평범한 평신도에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2주간은 열한 제자와 토마스도 포함됐습니다. 1주간, 2주간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를 다 말하는데 먼저 평신도에게 보여줬다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3주간과 4주간 오늘입니다. 오늘 3주간에는 바로 양에 초점을 맞췄고 4주간에는 목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양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은 증인에 초점을 맞췄고, 다음 주에는 목자는 바로 증거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부활 제4주간은 착한 목자 주인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이제는 5주간, 6주간의 말씀입니다. 5주간은 관계를 말하고, 6주간의 일치를 말합니다. 관계는 신성의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고, 일치는 인성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그 신성이 바로 영성이었고 그 인성이 늘 말씀드린 성사였습니다. 이제는 7주간, 8주간을 말씀드립니다. 7주간에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8주간에는 주님께서 성령 강령을 내려 보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츰차츰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망원경 신앙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현미경 신앙을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그냥 그 분위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포커스를 맞춰 달라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의식 속에서 살아 왔고, 항상 목적지가 어딘지 정확히 감지하면서 주님은 움직였다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부활 제일주의를 하는 초대교의 신자들이 십자가상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가진 바를 서로 나눔으로써 변화된 삶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것을 전해드렸습니다.
우리도 굳게 닫아가는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서로 나눔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 세상에 증거 해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성사를 받고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원리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그러게 신앙인에게는 성령의 인도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고 무지한 탓으로 거룩하고 죄 없으신 그분을 배척했습니다.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죽임으로써 하느님의 능력과 형제들을 믿지 못하고 인생을 저주하며 나의 삶을 병들게 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깨달았고 굳게 닫아간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삶의 법칙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성당에 나오고서 우리의 무지를 뉘우치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열 때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살과 피와 숨소리를 통해 우리 전 인격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원리로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 출신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게 끌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짐승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여러 번 생각을 했다고 자서전에 고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답니다. 그 목표는 그에게 숱한 모욕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빅터는 전쟁이 끝난 다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발간하게 됩니다. 그는 책에서 오늘날 가장 무서운 것은 삶의 가치를 잃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삶의 가치를 잃은 사람, 곧 실존적 공허에 빠진 사람은 돈이나 권력 또는 쾌락으로 공허함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낙담하고 절망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합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은 곧 나에겐 신앙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나는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차피 어느 정도 지나면 늙을 것이고, 늙으면 나는 곧 죽을 것이고,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다리를 건너 부활이라는 영광을 얻어낸 사랑의 절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뼛속까지 깊이 체험했다고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당신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인이 된다는 것은 박해와 죽음에 용감히 맞선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마치 유다인 출신 빅터 프랭클과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제자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성령의 뜻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상상이나 환시가 아닙니다. 삶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사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큰 영적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영성이 깊은 사람들만이 하느님 체험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유명한 신학자 카를 라너 사제는 우리도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고 그는 전합니다.
네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째, 우리는 부당한 취급을 당했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두 번째,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 가?
세 번째,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도 희생한 적이 있는 가?
네 번째로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자신만이 책임져야 할 결단을 내린 적은 있는가?
믿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이들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신앙 체험 곧 하느님 체험을 했다고 저는 보고 있고, 카를 라노 사제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일에서 신앙에 비추어 살펴본다면 그 속에서 부활의 신비, 주님의 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보이는 것 너머에 하느님의 은혜가 있음을 보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식이 없는 삶은 이제 정리를 해달라는 뜻으로 말씀드리고 싶고, 목적이 없는 삶은 이제는 그만 하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의식 속에 있고 항상 목적지를 향해서 그쪽을 가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 것을 우리는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요한 사도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제물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지금까지 삶을 뉘우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제물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현상 유지하는 사업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디든지 가면, 분명 다음에 오는 사제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내가 미리 준비해주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적당히 살려고 노력하면 결국은 우리는 신앙도 잃어버리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걸을 때도 말할 때도, 어떠한 행위를 할 때도, 항상 난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일을 하고 있고 일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헤아리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결국 희생할 수 있고 상대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오 늘도 내일도 우리는 항상 의식 속에 살며 또 목적을 향해서 오늘도 순례의 여정이 있고 우리 목적지는 천국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