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젠 오점례만 찾으면 지난 고통은 다 견딜만하다 여겨졌다. 수중에 제법 큰돈을 쥐었으니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월 중순이라도 날씨가 연일 푸근하여 마치 봄이 앞당겨 다가온 듯했다. 푸릇한 잎사귀들이 죽은 나뭇가지에서 움트고 사람들 모습에서도 생기가 넘쳐났다. 거의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보니 그의 얼굴엔 혈색도 돌고 살도 제법 올라있었다.
그는 오점례의 집주소라도 알 수 있을까하여 오랜만에 태성고무를 찾아갔다.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신경 쓰여 조심스레 사무실 쪽으로 발을 옮겨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건드리며 ‘용일형 아니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목소리로 보아 보나마나 이서림이었다.
“형, 여긴 어쩐 일이요?”
“엉, 그냥….”
“그래여? 그냥? 난 또 날 보러왔나 했지. 참, 용일형! 그 김 주임 회사 그만뒀수. 물건 빼돌리다가 잡혀서 아마 지금쯤 까목소에 들앉았을 걸.”
“그래?”
“그라고, 만득이형도 신영섭 부장님도 잡혀 들어갔수.”
“그래? 팬… 만뜩이랑 씬… 부당님까디도?”
“그렇다니깐. 한, 한 달가량 됐나? 순사들이 회사로 몰려와 회사에서부텀 쇠고랑차고 끌려 갔수.”
“그덯쿠나.”
“근데 형. 얼굴이…, 어! 앞 이빨이 모두 없네? 무슨 사고라도….”
“엉, 보기… 흉하디? 싸고가… 났써. 그래써… 뚜… 달간 입원도… 했썼거던….”
“그래? 큰 사고였었겠네?”
“엉, 그래서… 왼똑… 다리도 돔… 덜어.”
“그러게 조심하잖고…. 형, 근데 우리 회사엔 뭔 일로?”
“엉, 그냥…. 뭐 똠… 알아볼게 있어써….”
“뭔데?”
“엉, 어떤… 싸람 두쏘 똠 알려고….”
“누구?”
“응, 있써…. 어떤 여다….”
“그 여자가 누군데?”
“탐, 니… 오덤네… 라고 봉데부에… 일했떤… 여다… 아러?”
“오점례? 알지 그럼. 걔 이뻤잖아. 근데 요즘 통 안보이데.”
“뭔 일 있썼는디… 모르고?”
“글쎄, 뭔 일 있었나? 그럼…, 형과는 애인 사이여?”
“그래… 나랑… 결혼… 하기로… 해꺼든….”
“그려? 어쩐지….”
“그래써 말인데…. 혹 인싸꽈에 가면… 그 애… 두쏘를… 알 쑤… 엄는가 해써….”
“왜? 형한테서 도망간 거여?”
“도망은 뭐…. 그냥 내한테 한마띠 얘기도 안코 어디론가 가버렸써…. 혹 딥에 갔는가… 하여 탖아가 볼려고…. 거데도 어디라 카던데….”
“그럼, 같이 가부자.”
이서림은 여전히 맹랑했고 또한 활달했다. 녀석이 앞장서서 관리부를 찾아 그녀의 인사기록부를 쉽게 들춰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인사기록부에는 본적은 강원도 철원군 근동면 112번지로, 이전거주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54번지로 적혀있었고, 생년월일은 1946년 11월 23일로, 입사일은 1965년 2월 13일로 적혀있을 뿐 직계 가족 난 등은 빈 공란으로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고향 시천면이 그의 고향 함안과 거의 이웃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사기록부에 표기된 이전거주지 주소로 찾아가봐야 가족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그녀에게서 자세한 가족관계 같은 것을 물어보기라도 했어야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나이나 생일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외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고향이 거제도 어디란 것도 그녀에게 물어봤던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 생각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그녀와 사귀어오면서 그녀의 부모나 형제 등 가족과 관련된 것을 언젠가 물어보긴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마다 얼버무렸다.
“나중에 결혼식 올릴 때쯤 되면 그때 가서 인사시켜 드릴께예.”
그는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제시장의 박만필 사장을 찾아갔다. 먼저 하꼬방 보증금으로 그에게서 차용한 5천원을 돌려주고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그래? 난 또 니레 큰일을 당한 줄도 몰랐지비. 어디보자우. 입 좀 크게 벌려 보라우.”
박 사장은 그에게 일어났던 사고로 말미암아 앞 이빨들이 없어지고 왼쪽 발마저 절게 된 것에 대해 꽤나 가슴 아파했다.
“참, 즘생 같은 종갓나 새끼들 멀쩡한 놈 딥따 조져놨구먼. 그렇지만 우야겠니. 그게 팔짜라면 감수해야디. 그리고 이빨은 나중에라도 돈 생기면 새로 해 박음세. 넘 보기 흉하디.”
“싸당님, 그라고…. 내게… 보쌍금… 받은 거하고… 또 모아뚠거 하고… 보태면… 20만 원 덩도 여유다금이 있거든요. 그걸로 뭘 해야 할디 달 모르것네요.”
“그래? 그 정도 같으면야, 뭘 해도 괴얀을 만큼 적잖은 돈이디. 그래 니 생각은 뭘 했으면 좋겠니?”
“글쎄요… 혼다써 궁리를 해봐도… 뭘 해야할디… 몰라써요.”
“글쎄다. 니레 오레 스물여섯이라 캤니?”
“예, 쓰물여썼이구먼요.”
“이제, 장가갈 나이도 되었디.”
“결혼할 여다는 있써요.”
“그래? 뉘긴데?”
“던에… 씬발공당에서 싸긴 아가씬데….”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리고 박 사장에게 그녀에 대해서도 말을 했다.
“뭔 일이 있었나본데…. 기렇지 않고서야 와 내뺐겠니. 그러니 내레 참한 색시 하나 소개할 기니 그 아가씬 잊어야 하지 않겠니.”
“덜때로 이뜰 쑤 엄겠구만요. 그래두 당내를 딴디 약쏙했는데….”
“모르긴 몰러두 틀림없이 나타나지 않을끼구먼.”
“그럴까요?”
“니가 꺼뿍 다 죽어가는데도 내몰라라 내삔 가이나가 뭔 쌍판때기로 나타나겠니. 그만 잊으라우야.”
그는 박 사장의 권유대로 그해 5월경부터 국제시장 안의 방하나 딸린 여섯 평 남짓 자그마한 점포를 임대하여 함안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벽지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박 사장은 국제시장 상인들의 친목단체를 정식 번영회로 출범시키고, 가건물이 난립하고 소방도로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여 화재 등에 취약한 국제시장을 현대화할 필요성을 느껴 상인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정부는 1966년도부터 이북피난민들이 주로 자리 잡은 국제시장 부지를 상인들에게 불하하기 시작하여 매매가 거의 끝나고 시장의 상권구도도 어느 정도 자리잡아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박 사장은 국제시장번영회가 사단법인으로 설립이 되면서 위원장엔 포목상을 하는 정말휘 씨에게 양보하고 부위원장이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정말휘 씨는 박 사장의 함경도 고향선배였다. 나이는 박 사장보다 6~7년 연상이며 겉보기엔 상인이라기보다 선비라 여겨질 만큼 학자풍의 외모를 지녔다. 온화한 성격을 지녔기에 다툼에 휘말리는 것을 꺼렸고 여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말수가 적은대신 논리가 정연하여 시장상인들 간의 다툼에서 중재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상인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떤 일에 있어서 전면에 나서서 휘두르고 다니는 것을 꺼렸기에 번영회의 실질적 권한은 박 사장이 틀어쥐게 된 것이다.
그의 가게는 박 사장의 신발가게와는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가게 안에는 여러 종류의 벽지와 장판지, 도배용 풀과 도배용 붓 등을 갖추고 도배공사는 물론 재료 등을 도매로 팔기도 했다. 벽지가게가 근처에도 즐비했는데 장사는 의외로 잘되었다. 여름철로 접어들어 조금 매상이 떨어지는 듯 했으나 월 임대료 3천원과 두 사람의 직원 인건비 9천원, 그리고 이것저것 소요되는 경비 등 월 1만5천원을 제하더라도 그가 동양철강에서 받던 임금보다 서너 배는 더 떨어졌다.
그리고 돈 버는 재미에 고된 줄 모르고 일을 했으며 그렇게 번 돈은 자린고비소리를 들을지언정 한 푼도 허튼 곳에 쓰질 않고 차곡차곡 모아나갔다. 늘 궁핍하게 쪼들려왔던 생활이 마침내 청산된 듯 여겨졌고 그 모든 것이 박 사장의 은공이라 여겼다.
박 사장은 마다하는 그의 고집을 꺾고 약속한대로 아가씨 하나와 맞선을 보게 했다. 그녀는 박 사장의 계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국제시장 건어물상 최상만의 딸이었다.
최 씨는 평안도 사람으로서 박 사장과 마찬가지로 혈혈단신 피난 내려와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사람이다. 자그마한 키에 마른 편에 속하며 한쪽 눈은 백내장을 앓고 있어 검은 안대를 늘 걸치고 있는 사람이다. 늘 뒤쪽에 물러나있을 만큼 매사에 소극적이었으나 박 사장의 일만큼은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거들었다. 계산에 비교적 밝은지라 박 사장이 주관하는 온갖 계모임을 책임지고 관리하여 처음엔 그가 오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살도 제법 통통하게 쪘다. 작고 가는 눈을 지녔고 눈 밑으로 해서 양 볼께로 죽은깨도 적당히 박혔으나 천박해보이기는커녕 둥근 얼굴이 대체적으로 귀염성 있게 생겼다. 여상까지 나와 새마을금고에 취직하여 한눈에 보기에도 똑똑하고 야무져 보이는 아가씨였다.
그녀와 첫 대면한 자리에서도 그는 오점례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오점례는 전혀 다른 상반된 체형과 인상을 지닌 듯 보였다. 말이 없는 그에 비해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었다.
먼저 그녀의 눈에 띤 것은 그의 입 모양새였다. 그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는 몰랐었는데 물을 마실 때 보니 마시는 폼이 영 서툴고 반쯤은 입술 아래로 질질 흘렸다. 힐끗힐끗 곁눈질하여 관찰해보니 하얀 치아가 가지런해야 할 곳에 치아는 보이지 않고 붉은 혓바닥만 낼름거리는 것이 그녀의 눈에 띠었다.
“근데여, 입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당돌하고 짓궂은 질문이었으나 빤히 자신의 입만 주시하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 다… 다… 다텼씨요.”
“뭐라고요?”
“다… 다… 다… 다텼다니깐요.”
그녀는 고개를 몇 번인가 끄덕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자꾸 더듬거려지는데다 그녀가 웃기까지 했으니 불현듯 짜증이 났다. 그래도 박 사장 입장을 생각해서 선뜻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런대로 호감을 가진듯했다. 다리를 절고 이빨이 없는 게 맘에 걸리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에게서 선비와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키도 그런대로 껑충했고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서늘한 눈빛과 남자다운 고집이 느껴져 그런대로 괜찮다 여겨지는 남자로 보였다. 결혼하기로 결정이 되면 아버지를 졸라 그의 이빨부터 고쳐 주리라 맘까지 먹었다.
박 사장은 웬만하면 그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마음의 안정부터 찾으라 했다.
“요즘, 그맨한 처자가 없디. 살림꾼이디. 그 가이나 애비가 또 얼매나 점잖노. 그맨한 양반도 없갔디.”
“…….”
“왜? 맴에 엄는가?”
“아니요.”
“그럼 주저할게 뭐있갔니. 서둘르라야.”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녀 쪽의 요청에 의해 그녀와 두세 번 만났으나 왠지 오점례에 대한 생각으로 그녀와의 만남이 내키지 않았다. 오점례가 무슨 큰일을 당한 것이 분명하고 그 것이 뭔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만나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제13회에서 계속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