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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 4:24)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
1.예배에 대한 이해
1) 예배의 용어 사용
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표현에 차이가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 용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곁에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혀 영접한다”(창18:2),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영접한다”(창18:2),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욥1:20) 등에서 사용되어진 단어 “샤하이(Shahai)”는 ‘굴복하다’, ‘머리 숙이다’, ‘엎드린다’는 뜻으로서 구약성경에만 12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냄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섬긴다는 뜻의 “아바드(Abad)"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배가 단순히 어떤 예식이 아닌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에베드)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뜻은 ‘봉사한다’, ‘섬긴다’라는 말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예배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 용어
신약 성경에서도 예배를 의미하는 용어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프로스퀴네오(Proskuneo)라는 단어인데 신약 성경에 약 60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4:10)고 하신 말씀과, 또 예수께서 수가 성(城)의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4:24)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된 용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뜻은 ‘무릎 꿇다’, ‘허리를 굽힌다’ 등의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둘째로는 라트레이아(Latreia)인데 이는 예수님께서“...다만 그 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시며 유혹하는 사단에게 최종 선언하실 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말합니다.
셋째로 레이투르기아(Leitourgia)는 일반적으로 예전(禮典)과 의식(儀式)과 관계되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고(빌2:30),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로 섬기는 일(고후9:12),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구제하는 일(롬15:16,27) 등이 바로 ‘레이투르기아’로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奉事)를 뜻합니다.
넷째는 호모로기아(Homologia)인데, 이는 죄의 고백과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마10:3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시인(是認:Confess)이 이에 해당됩니다.
2) 교회적 예배의 용어
(1) 워십(Worship) : worth(가치있는)+ship(신분)
이 말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의와 권위를 인정할 때 사용되는 이 말은 영국에서 시장(市長)을 호칭할 때 “Your Worship", 미국에서 ”Your Honour"등으로 쓰이는 것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이 종교적 용어로 예배를 지칭할 때는 바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권위가 함축되는 것입니다.
(2) 종교의식을 나타내는 용어 컬트: Cult
이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것을 숭배한다.”는 의미와 이교적 배경의 주술적 요소가 내포됩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사용되었을 때는 거의 외형적 예배 의식을 나타내며, 주로 카톨릭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면에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를 번역하면 제의(祭儀)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워십’보다 ‘컬트’는 정형화된 어떤 틀과 형식을 생각나게 합니다.
(3) 예전적 의미를 가리키는 용어: Liturgy
이 말은 예전(禮典)을 나타내며, 예배의 대부분이 정해진 예전에 의하여 치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세례식, 성찬식 등의 어떤 예식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다 넓은 의미로는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2. 예배의 형태와 요소에 대하여
교회가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카슨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성경적 종교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성, 다시 말해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교회가 그 예배를 주께 드리는 방식을 이해해 온 것은 상당히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비교적 공식적인 예배의 형태를 강조하던 고전적 예배 유형과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를 강조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은 시대에 따라서 진자 운동을 하면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가는 방식으로 진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당시의 예배 유형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우나 대개 회당 예배의 형태(가르침과 기도중심)와 비슷한 형태의 예배가 드려지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무질서한 형태의 예배가 나타나기도 해서 바울은 모든 것을 질서 있고 단정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특히, 고전 14:40). 그 권면에 따라 예배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드려지다가 그것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하는 경향을 가지자, 다시 자유로운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의 자유스러운 예배(free worship)와 극단의 퀘이커적인 예배 형태도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예배에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강조하는 추세가 나타나는가 하면, 전통적 예배 형식과 전통적 예배의 개념을 깨고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실험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예배는 비교적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예배가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려지게 된다는 것은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와 루터파와 장로교의 예배 이해를 비교할 때, 천주교회는 예배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요소들은 모두 사용하며 특히 과거의 전통 가운데서 의미 있게 사용되어 온 것의 계속적인 사용을 지향하여 나가는 데 비해서, 동방정교회와 루터파 교회는 그 가운데서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요소들은(예를 들어서, 상[像, image] 숭배) 제거하고,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요소들에 대해서는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여기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는데 반해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는 오직 성경이 규정한 것만을 중심으로 하여 주께 예배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장로교회의 예배 이해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칼빈은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거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이 준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는 예배의 요소들과 예배의 방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주께 드리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배의 요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하나님께 최상의 경외감을 표현하는 인간의 응답, 즉, ‘계시적 요소’와 ‘응답적 요소’로 표현됩니다. ‘계시적 요소'는 성경봉독, 교독, 설교 등으로 나타나며, ‘응답적 요소'는 기도, 찬송, 봉헌 등으로 나타납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축도자를 통해 복을 내리신다는 의미에서는 ‘계시적 요소'라 할 수 있고, 축도자가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응답적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축도는 예배를 마치며 하나님의 백성을 파송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축도는 구약의 아론의 축도(민6:24~26)와 신약의 바울의 축도(고후13:13)을 모델로 사용합니다.
예배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을 의미합니다.(롬12:1,2, 렘7:1~11, 히13:15,16)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예배 시간 뿐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활예배' 또는 '삶의 예배'라고 합니다. 공예배가 없는 생활예배는 무질서와 무교회적인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고, 생활예배가 전제되지 않은 공예배는 외식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거짓 예배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과 교회생활의 기본이고 중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창조하신 목적(사43:7,21)을 생각할 때 그 중요성이 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엡1:6,12,14)이기도 하기에 교회 기능과 사명의 최우선순위에 있습니다. 예배는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서도 지속되며(계5:1~14),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말1:10~14, 3:16~18)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승리자가 곧 인생의 승리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경외심, 기쁨과 평안 등 영적 체험이 동반됩니다.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자체가 이미 신비적(고전12:3)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예배는 축제적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절기는 모두 축제의 제사였고, 신약의 주일예배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승리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응답입니다. 즉,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인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교육이 아님에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고, 말씀 등 계시를 통해 신앙과 삶의 교육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진정한 예배를 소망하게 됩니다.
3. 성경에서의 예배 형태
족장시대에는 개인과 가족 중심의 예배로 족장이 가부장으로 예배의 집례자였습니다. 제사제도가 수립되기 전으로 가정이 교회이고 교회가 가정의 형태였습니다. 족장시대 예배 시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희생제물을 드렸으며, 할례를 통해 공동체성을 확인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에는 제사 제도가 제정되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곳입니다. 성막 제사는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희생 제사였습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사울 왕까지로 이방신 숭배와 다신교에 오염되어 혼합주의가 만연하였습니다. 이들은 지역신이 있다고 믿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받아들여 풍요와 다산을 숭배하였습니다.
왕정시대에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성전 건축을 준비하였고, 솔로몬 때 성전을 완성하였습니다.(왕상6:37,38) 성전예배는 성막예배와 비슷한 원리에 화려한 예배 음악(대상23:5)이 추가되었습니다. 성전예배는 예배 처소가 고정화 되었고, 예배 전반에 대한 요소가 성문화 되었습니다. 제사장 제도가 확립되면서 백성들은 간접 예배자로 참여하였습니다. 제물 드림 등 의식적 부분이 강조된 반면 기도나 말씀 등은 빠져 있었습니다. 성전예배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적 예배입니다.
분열 왕국시대 북왕국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어용 제사장을 세우는 등 일탈의 길로 갔고, 남왕국도 각종 혼합주의 등이 가득해 성전예배는 형식주의화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멸망 후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예배드릴 성전이 없어 예배드리는 것이 막막했습니다. 이때 출현한 것이 회당(쉬나고게) 예배입니다. 회당예배는 포로기 이후 성전을 재건한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신약예배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회당에는 제사장이 없고 누구나 읽고 해석하고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순서는 기도부분과 말씀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쉐마 낭독(신6:4~9, 신11:13~21, 민15:37~41), 기도, 율법낭독, 예언서낭독, 강해와 권면(설교), 축도(민6:23,24) 등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구약시대가 성전중심, 이스라엘 민족 중심이었다면, 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 중심, 새 이스라엘(그리스도를 믿는 자) 중심이었습니다. 초기에는 회당에 참여하며, 성전, 회당, 가정/처소 등이 혼재되다가 점차 성전과 회당 예배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을 새로운 예배에 대한 개념과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의식적 제도보다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요2:13~15, 4:23) 그는 성전(마14:49), 회당(눅4:16), 가정(마26:26~29)에서 예배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기념하는 성만찬과 성령의 임재와 구원을 확증하는 표시로 세례식을 제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은 초대교회를 시작하게 하였으며 새로운 예배 형태를 낳게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성전과 회당, 가정/처소 등 예배 장소를 가리지 않았으나. 점차 유대교와 구분되어 안식 후 첫날(부활의 날)에 가정/처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회당예배의 기본적 요소에 성찬을 포함시켰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개방적, 비형식적 전도 중심의 예배(고전14:23~25)로, 기도, 찬송, 설교, 방언, 축도(고전13:13) 등의 내용에 간증과 교제가 있었습니다. 주로 밤에 모였고, 각자 식사를 가져와 성만찬을 겸한 식사(agape meal)을 나누었습니다. 이때에는 표면적으로는 예전적 요소가 약한 교제 중심의 모임이었습니다. 1세기 이후에는 방언, 사랑의 식사 등은 없어졌습니다. 또한 예배가 너무 무질서해지자 바울이 제재(고전11장, 14장)하기도 했습니다.
4. 교회 역사 가운데에서의 예배 형태
사도 시대 이후는 핍박의 시대로 카타콤(지하) 등에서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4개의 문헌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로바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AD96)에는 말씀읽기, 회개, 성령임재, 말씀전파, 봉사자위한 예물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버지니아총독 플리니가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AD112)에는 주일 새벽모임, 찬송, 성례전 후 음식나누기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12사도의 교훈집인 '디다케'(AD130)에는 말씀, 기도, 헌금 등이, '순교자 저스틴이 로마 화에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보낸 변증문'(AD200)에는 "말씀의 예전"(찬송, 성경낭독, 설교, 회중 기도)과 "다락방 예전"(성찬, 헌금)으로 나누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렸으며, 찬양을 드렸고,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강해하는 설교가 시행되었고, 주님의 기도 등 여러 기도문들을 낭독하고 아멘으로 화답했으며, 예물을 드렸고, 개인적/공동체적인 참회의 고백과 용서의 시간이 있었고, 성만찬과 세례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기독교 공인 이후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고, 사형제 폐지, 교회 재산 부여 등이 이루어지며 예배에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드렸던 사적예배가 공적 장소에 의한 예배로 전환되었고, 이를 위해 교회 건물이 세워졌고, 예배 형식의 통일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방신의 축제일이 기독교 축제일로 수용되었습니다.
성전과 제단이 설비되어 성례전주의와 성직주의가 만들어지고 성직자가 예배인도를 독점하면서 예배당이 구약의 성전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 과정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갈등이 커져 분리되었습니다.
동방교회는 안디옥,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구원 역사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성화), 조각(성상) 등을 사용했는데,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시, 문학, 철학 등을 사용한 신비스런 행사를 강조했습니다. 말씀의 예전보다 신비의 능력과 표현을 담은 성만찬 예전을 중시했습니다. 영원한 예배를 강조하며 24시간 예배를 추구했고, 부활의 주님을 강조하며 부활의 예수님 성화를 예배당 중앙에 설치하고 명상함으로 점자 우상 숭배화 되었습니다. 예배는 준비예배(시편 낭독, 기도), 세례 청원자의 예배(초신자들, 찬양, 복음서 낭독), 믿는 자들의 예배(세례 청원자 퇴장 후 성찬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방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초기에는 말씀과 성례의 두 기둥으로 초대교회를 계승하였습니다. 로마인 특유의 실용주의, 현실주의가 강조되면서 형식이 자유로워지고 내용도 간소화되었습니다. 고정된 순서 없이 찬송, 기도문, 교독문을 계절별로 바꾸었고, 제단도 회중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예배의 성격이 대리적, 성직적 중심으로 되어가 회중은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성경 대신 성자들의 생애와 전설 등이 낭독되었습니다. 설교는 쇠퇴되었고, 예배는 그리스도의 죽은 날로 인식되어 화체설이 제기되는 등 미신이 조장되었습니다.
중세의 예배는 성경은 사라지고, 설교도 없고, 라틴어로 진행되며, 찬송도 약화되고, 성찬의 화체설로 인식되어 받기를 꺼리며 두려움으로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초점은 예배의 개혁이었습니다. 신앙고백서와 예배서를 작성하였고, 성경을 기초한 예전을 시행하였습니다. 루터는 성경낭독과 찬송에 집중되어 설교가 생략되는 잘못을 지적하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오전에는 복음서, 오후에는 서신서 등을 강해설교 했습니다. 자국어 예배를 실시했고, 찬송가 37곡을 작곡 하는 등 예배 음악을 활성화 시켰습니다. 루터의 예배 순서는 시작(찬송, 시편낭독), 죄고백의 기도, 서신서 낭독, 찬송, 복음서 낭독, 사도신경 고백, 설교, 주기도문 기도, 성찬, 감사기도, 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루터는 예배 의식이 참여적인 경험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칼빈은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라 설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설교중심 예배를 시행했고, 성찬은 단순한 형식으로 1년에 3회 시행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교회법, 신앙고백, 신앙문답서, 예배모범을 작성했고, 교리 확립을 위해 기독교강요를 저술하였습니다. 예배는 이해되는 예배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회중의 언어로 진행하고, 예배 순서는 단순화했습니다. 또한 평신도들이 예배 진행을 숙지하여 예전의 다양한 부분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권유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독일 종교개혁가 부처가 남긴 흔적과 유사합니다.(설교에 대한 강조, 의식의 간소화, 회중의 참여, 악기 없이 부르는 시편찬양)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세속 음악의 도입을 반대했습니다. 칼빈은 예배가 신앙 인격의 성장, 즉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생활예배를 강조했습니다. 칼빈은 예배 순서는 2부분으로 나누어 "말씀의 예식"은 개회선언, 참회의 기도, 사죄의 선포, 시편 찬송, 중보의 기도, 시편 찬송, 주기도문, 설교자 기도, 설교, 설교 후 기도, "다락방 예식"은 사도신경, 성찬식, 축도(민6:24~26)로 구성되었습니다. 칼빈이 구상한 예전은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John knox) 를 통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칼빈이 예전에서 추구한 목표는 복음에 담긴 진리들을 신약 성경의 원리와 실천에 따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교회의 예배를 위한 사상과 관행에서 최고의 절정입니다. 당시의 철학적 전통은 물론이고, 로마 카톨릭, 성공회, 루터교, 유럽 개혁주의, 청교도, 장로교 등의 다양한 전통에서 최상의 요소들을 모으게 되고 이로써 ‘웨스트민스터 공예배 규칙서’를 1645년에 공표하게 됩니다. 물론 갈등과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성경에 대한 충실함과 관련된 더욱 보편적인 원칙들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있음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전도 2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말씀의 예식”은 예배로의 부름, 예찬, 은혜와 조명을 위한 간구, 구약성경낭독, 시편찬양, 신약성경낭독, 시편찬양, 죄의 고백, 도고의 기도, 성경봉독, 설교, 감사와 예배기도, 주기도문, “다락방 예식”은 봉헌, 초대, 권면, 성찬제정에 대한 말씀, 성별 기도, 분변과 분잔, 기도, 시편 찬송, 축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5.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와 특징
개혁교회 예배의 신학적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배는 계시에서 출발합니다. 예배는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행사하십니다. 선 계시 후 응답입니다. 둘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응답(예배)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자유로운 인도와 절제를 동반합니다. 셋째,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행위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몸인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넷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사역과 증거를 준비시킵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만,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의 품성이 함양되고, 사역과 증거를 감당할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다섯째, 예배자의 생활 열매가 함께 드려지는 총체적인 삶입니다. 공예배는 생활예배와 더불어 드려질 때 참다운 예배가 됩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다음의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다. 성부는 예배의 주체이자 대상이고, 성자는 예배의 중보자이며, 성령은 예배의 원동력입니다. 둘째, 자유로운 예배입니다. 예전의 규범적 요소를 가지고 상황적 요소를 고려하연 예전이 교회의 자유에 맡겨집니다. 그러나 자율을 보장하되 교파적으로 제시된 예배 모범을(규범적 요소) 기준으로 질서를 지킵니다.
셋째, 공동체적 교회의 공동 행위입니다. 그럼으로 예배는 회중의 일치된 마음이 중요하고, 동일한 찬양과 기도 등을 통해 일체감을 갖습니다. 넷째, 예배는 아름다움, 기쁨, 질서의 요소를 갖춥니다.
6. 예배와 교회력 그리고 성서일과
교회력(Christian Year)은 예수님의 탄생, 승천, 성령강림 등 그리스도 중심으로 배열되어,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삶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회상하고 감사하게 하며, 규칙적인 신앙생활의 시간표로 경건 생활의 길잡이가 되고, 연중 예배의 설교, 목회활동, 교회운영 등의 지표가 되어 목회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교회력은 1주일 단위와 1년 단위가 있습니다. 1주일 단위는 부활의 날인 주일로 예배를 위해 모이는 날이고, 유대인들이 월, 목 금식했던 것에 비해 초대교회는 수, 금에 금식했는데(디다케), 한국교회가 수요일, 금요일 모이는 것은 이런 전통의 계승입니다.
1년 단위 교회력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대강절, 강림절)로부터 탄생, 공생애, 십자가 고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의 구속사 흐름으로 구성됩니다. 7대 절기는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승천일, 성령강림절이며, 기타 중요한 절기로 삼위일체주일, 성서주일, 종교개혁주일, 성만찬주일 등이 있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예전색은 빛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성탄절, 부활절, 삼위일제주일 등에 사용한다. 보라색은 회개와 속죄 기다림을 상징하며 대림절, 고난주간, 회개일 등에 사용합니다. 빨간색은 성령의 불과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강림절, 종교개혁주일, 선교사 파송일 등에 사용합니다. 녹색은 생명의 희열과 희망을 상징하며, 주현절 직후부터 사순절 직전, 삼위일체주일 이후부터 대림절까지 사용합니다.
1) 성서일과에 대하여
너머서 교회는 2013년 부터 성서일과를 중심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예배시간에 봉독해 왔습니다.
과거로부터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배에서 읽혀지고 해석될 성경말씀의 선택을 위한 조직적인 체계가 필요하였습다. 교회는 그 역사를 통해서 바로 그런 조직적인 체계를 만들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성구집입니다. 성서일과란 “교회력(The Church Year)에 수록되어 있는 다양한 날들과 관련 있는 성경구절의 목록”입니다. 즉 “성구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드릴 때에 말씀선포를 위하여 정리되고 의도된 성경말씀의 목록”입니다.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등 여섯 절기로 이루어져 있는 교회력이 예배 때 말씀 선포의 근거라고 한다면, 성구집은 그 교회력에 근거한 말씀 선포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일과는 그 기원이 유대의 회당예배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 가운데 성경말씀을 체계적으로 읽는 모습은 유대교의 회당에서부터 이미 있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이르러는 그 형태가 비록 오늘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정된 규례와 절기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중세교회는 여러 가지 성서일과를 만들어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를 중심한 중세의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본래적인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력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성자들을 위한 교회력과 성서일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종교 개혁가들은 이렇게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배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세기말에 들어와서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교회가 예배회복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을 일으키게 되면서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던 교회력과 성구집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처음으로 교회의 예식서(1940년)에 초대교회의 교회력에 합당한 성서일과를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천주교회의 성서일과(Lectionary for Mass, 1969년) 보다도 무려 3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 “공동성서일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의 시작입니다.
로마 천주교회의 성서일과 제정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성서일과를 외면한 체, 일정한 규범이 없이 설교자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본문을 선택하던 교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사상과 지식과 기호에 따라 본문이 무작위 적으로 택하여지던 모습에서 벗어난 효율적이고 전반적인 말씀의 선포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가져야 할 필요성과 교회력에 따른 온전한 예배의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성서일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1970년대에 이르러 교회 내에는 많은 성서일과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렇게 여러 개로 갈라진 성서일과를 통일해야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1972년 “교회일치를 위한 협의회(COCU-Consultation on Church Union)”를 조직하였고, 그 산하에 “공동본문 위원회(CCT-Consultation on Common Texts)”를 두어 모든 교단들이 수용할 수 있는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만들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위원회는 1978년부터 4년간에 걸친 연구 끝에 1982년 “공동성서일과(Common Lectionary)”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9년이라는 실험의 기간을 거친 후 지난 1992년에 드디어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개정판 공동성서일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 개정판 공동 성서일과는 전 세계의 교회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서일과의 사용이 설교자의 설교를 제한하는 문제나, 예배의 자율성의 문제, 성도들에 대한 적절한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의 문제, 혹은 특정 국가의 경우 문화와 절기에 대한 혼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전체성에 대한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개념적 정리, 그리고 회중들의 예배 참여라는 중요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7. 예전에 대하여
복음에 대한 이해는 외부 구조에만 배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예배 양식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예배 의식의 구조를 ‘교회의 예전’이라고 합니다.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교회라면 비록 아무리 간단한 형태라도 나름대로의 예전이 있습니다.
이 예전의 형식에 대한 차이에 따라 “의식 중심의 예전”(가톨릭, 감독교회, 루터교회), “비의식적 예전”(퀘이커, 형제/지방회), “자유와 질서가 조화된 예전”(개신교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설교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바른 예전과 조화된 예배가 필요합니다. 설교는 예전에서 진행되는 유일한 순서가 아닙니다. ‘선포’ 앞에는 ‘준비’가 있습니다. 이 ‘준비’는 임의적이거나 독단적인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전후하여 진행되는 예전의 모든 구성 요소들은 다양한 단계의 경회, 겸손, 확신, 감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오늘날에는 너무 집례자 중심으로 되어 있어 회중이 관람자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설교에 앞서 힙겹게 통과해야 하는 순서로서 ‘기도’와 ‘각종 찬송’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앞부분을 채우는 그런 예전들은 단지 설교에 대한 서론, 혹은 본 행사에 대한 의례적인 ‘서두’ 정도로 간주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복음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은 개인적인 선호, 즉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거나 편안하게 하거나 공손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을 만든 목적은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고, 예배자의 마음을 움직여서 성경 진리의 의미로 향하게 하며, 신자들이 그런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서 세상에서 삶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도록 가르치기 위해 순서를 정한 것입니다.
오늘날 시간과 장소, 형식이 고정화되어 예배의 역동성, 극적요소가 결핍되고 습관적이 되고 있습니다. 절기와 예전이 소홀해 성찬식이 1년에 1~2회 정도 시행되고, 절기는 아예 무시되고 있습니다.
올바른 예전은 분명한 목적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삼위일체 중심의 예전이어야 하고, 예배 요소인 계시와 응답간, 설교와 다른 요소들이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자들의 참여가 적극 유도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도 예배자이고, 회중도 예배자임을 인식하고, 공동체적 예배와 축제적 예배가 되도록 구성해야 합니다.
1) 성경의 예전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범적 요소 즉 예배 가운데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할 예전은 사도행전 2: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을 기준하여, 가르침, 기도, 식사와 교제, 구제 였습니다.
구약에서 나타난 예전은 이사야 6장에서 이렇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됨(1~4절), 인간의 본성이 고백됨(5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6~7절), 하나님의 은혜가 보증 됨(7절), 감사에서 비롯된 헌신의 반응(8절), 순종을 위한 가르침(9~12절), 언약의 축복에 대한 약속(13절)입니다.
신명기 5장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산에서의 예배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됨(4,22~24절), 인간의 본성이 고백됨(5,25~27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2~3,6절), 하나님의 은혜가 보증됨(2~3절), 순종을 위한 가르침(6~21,32~33절), 감사에서 비롯된 헌신의 반응(27절), 언약의 축복에 대한 약속(33절) 입니다.
역대하 5~7자에서 보이는 솔로몬이 드린 예배의 예전은 조금 더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줍니다. 예찬 즉 예배로의 부름(5:1~5), 죄의 고백(5:6~10), 용서의 확증(5:11~14), 감사(6:1~11), 청원 혹은 간구(6:12~21), 가르침(6:22~42), 축도와 찬양(7:1~3), 교제(7:4~9), 폐회(7:10) 입니다.
이런 이해는 성경의 모든 예배의 모습이 이런 반드시 이런 예전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드림에는 이런 예전의 연속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규칙적이고, 우리가 인식가능한 특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쓴 사도들은 대다수 전통들이 예배의 ‘구성요소’ 혹은 예전이라고 하는 항목들의 정확한 순서나 내용보다는 그 자체를 서술하는데에 만족합니다. 단지, 일반적으로 기도, 말씀의 낭독, 선포, 찬양, 성례의 시행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롬마서 11~15장까지의 서술에서 영적예배에 대한 신약의 예배의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지(11:33~36),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인정(12:1),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증(12:1), 감사의 반응(12:2) 새로운 순종에 대한 가르침(12:3~13:14), 서로에 대한 공동적인 보살핌(14:1~15:12), 책임부여와 축도(15:13)
이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영적 예배’에 참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서로 돌보면서 살아야 하는우리의 공동적 책임(3~8절), 개인적 책임(9~21절), 사회적 책임(13:1~7절), 윤리적 책임(13:8~14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너머서 교회의 예전에 대하여
너머서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문화적 적절성, 초월성과 명료성, 자유와 원칙, 고양과 참여, 진지함과 기쁨, 전통적 표현과 일상적 표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성경과 역사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예전을 정하고, 그에 따를 실천적 지침은 문화적 상황에 맞추어 지혜와 자유로움으로 하되 교회의 질서를 지키고 품위를 손상하지 (고전14:40) 않도록 합니다.
너머서 교회는 예전의 정함에 있어서 교회 안의 영향력있는 사람이나 외부 단체의 권위와 선호에 기초해서 결정내리는 것이 ‘독단적 원칙’, ‘개인적 선호’, ‘교회의 무 비판적인 전통’, ‘문화적 취향’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건강하지 못한 결정이 될 수 있음을 감안하여 계속해서 성경적, 복음적 예전을 갖추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예배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예전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찬양하기,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공동으로 죄를 고백하기, 찬송으로 서로를 격려하기, 구제하기, 함께 가르침을 받기, 잃어버린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서로 교제하기를 통해 우리는 예배의 환경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너머서 교회의 말씀의 예전으로서
- 예찬 :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정/인지 (“예배로의 부름” 과 “경배와 찬양”)
- 죄의 고백 :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인정 (“죄의 고백” 와 “용서의 확증”)
- 믿음의 선포 :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과 온 세상 앞에서 고백함 (“신앙고백” 과 “영광의 찬송”)
- 감사 : 헌신의 표현 (“봉헌”)
- 청원과 도고 :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도우심을 바라는 소원 (“기도”)
- 가르침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받음 (“성경봉독” 과 “설교”, “드림의 기도”)
너머서 교회의 다락방 예전으로서
- 초대 : 하나님 및 하나님의 백성과의 친교
- 찬송 :
- 교독문 : 공동체적 소명과 사명을 함께 고백
- 분병과 분잔
- 책임 부여와 축도 :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기.
너머서 교회의 공동체적 예전으로서
- 서로를 알림 : 광고와 인사
- 노래 : 너머서 송
- 폐회
3) 너머서 교회의 실제적인 예배의 예
1. 예배로의 부름 : 성경본문을 사용하는 예배로의 부름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자신께로 맞아들이시며 자신이 계획하시는 목적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이해합니다. 요4:24에만 국한하지 아니하고 성경의 각 구절을 함께 사용하도록 하여 예배의 역동성을 갖도록 합니다.
2. 경배와 찬양 : 복음적 찬양을 지양하고, 경배와 찬양으로서 선정된 찬양이나 임재와 예배에 관련된 찬양으로 구성하되 인도자의 멘트를 최소화하고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3. 죄의 고백 : 죄의 고백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한 없이 낮추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4. 용서의 확증 :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허물은 없어졌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의 것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5. 신앙고백: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신 모든 교회와의 연속성을 표현하고,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과의 연합을 의미하며, 우리 자신이 믿는 바를 새롭게 하고,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세계에 대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증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믿음의 고백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기초입니다.
6. 영광의 찬송 : 우리의 환경이나 기분에 의한 찬송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향한 찬송입니다.
7. 봉헌 : 하나님의 회중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표현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봉헌은 고린도후서 8~9장의 가르침처럼 ‘은혜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이 봉헌은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하는 교회간에 평균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봉헌은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요소가 아닙니다. 봉헌은 ‘구속받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헌은 예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상징적인 것이요, 경배 전체를 요약하는 요소입니다.
8. 기도 :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예배를 생각할 때 설교와 성례로 연결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선포된 말씀과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포도주를 대하며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담당자는 하나님과 현실적 교회의 관계 속에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에 대한 개별적인 말씀묵상과 더불어 각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이며, 성도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에 신앙적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9. 성경봉독 : 너머서교회는 성서일과를 중심으로 한 성경봉독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은 구약과 신약을 낭독하고 묵상해 왔던 교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부흥을 일으키고자 하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10. 설교 : 설교는 성경적이어야하며, 오늘의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 대한 통찰을 가진 실제적이어야 하며, 또한 교회의 역사와 함께 가는 역사적이며, 개혁주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리적이어야 합니다.
11. 드림의 기도 :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며, 더욱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도록 합니다.
12. 애찬으로의 초대 : 너머서 교회는 매 주일 ‘애찬식’을 시행합니다. 애찬식은 참가자 제약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것으로 분위기는 즐거운 결혼식 분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애찬식은 성찬식을 하는 주일을 제외한 매주 예배에 시행합니다. 애찬식은 고전11장에 근거한 교회공동체의 사랑의 공동식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 드려지는 예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되고 그의 사랑안에서 한 교회 됨을 고백하고 사랑하기 위해 공동식사의 의미를 담은 애찬식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13. 찬송 : 우리 주님께서 제정하신 애찬의 의미를 확인하는 찬양입니다.
14. 교독문 : 공동체적 소명과 사명을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15. 분병과 분잔 : 한 떡과 한 잔을 나눕니다.
16. 축도 : 민수기 6:24~26과 고린도후서 13:13을 기준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으로 하나님을 살아갑니다.
17. 광고 :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알려 줍니다.
18. 너머서 송 : 너머서 교회가 항상 마음에 두고 새기는 가치들을 노래로 부르면서 너머서 교회가 나아갈 바를 매주 마다 기억합니다.
19. 교제와 나눔 / 폐회 :
어떤 사람들은 예배가 오로지 송영적인 것, 곧 하나님의 영광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기뻐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예배가 아무런 기쁨도 고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올바르게 예배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앞에서 진지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너머서 교회의 예배는 진지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예배이어야 할 것입니다.
4) 너머서 교회의 성찬과 매 주일의 애찬에 대하여
종교개혁가들은 참된 교회의 징표로 올바른 말씀의 선포와 성례, 권징의 시행을 중시했습니다. 이 중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은혜를 영적으로 기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됨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재림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은혜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행위입니다.(고전11:23~26)
성찬과 관련해 가톨릭은 성찬 편향적인 예배의 오류에 빠졌고 개신교는 성찬을 경시하고 설교 중심에 치우친 예배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설교 중심의 예배는 회중을 방관자 또는 구경꾼으로 만들고 집례자 또는 설교자가 모든 것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함께 드리는 예배, 참여하는 예배의 정신이 소홀해지며, 집례자 또는 설교자가 독단적 제사장의 위치를 갖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함께 제사장된 모든 회중이 다함께 준비하고 참여하고 드리고 누리야 합니다. 이를 위해 너머서 교회는 모든 예배 순서에 온 회중이 참여하도록 하며 특별히 매 주일 성찬식/애찬식을 시행합니다.
성찬식은 예전의 전통과 격식에 맞추어 집례자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자기를 살핌, 죄의 용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연합에 중점을 두고 분위기는 엄숙한 장례식 분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복장도 미리 광고해 가급적 정장(정성스럽게 입은 옷)을 입도록하고, 참가자도 제약됩니다. 너머서교회에서는 1년에 2회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과 감사절)에 세례식과 함께 성찬을 시행합니다. 이때에는 주일의 예전이 ‘다락방 예전’이 중심이 되어 시행하도록 합니다. 애찬식은 참가자 제약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것으로 분위기는 즐거운 결혼식 분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애찬식은 성찬식을 하는 주일을 제외한 매주 예배에 시행합니다.
애찬식을 시행하는 것은 성찬식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고전11장에 등장하는 식사 자리도 지금 같이 격식을 갖춘 성찬식 장면의 말씀이 아니라 당시 교회 공동체의 사랑의 공동식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말씀처럼 기념하여 교회 전통 가운데 성찬예식으로 발전 시킨 것을 우리는 존중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드려지는 예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되고 그의 사랑안에서 한 교회 됨을 고백하고 사랑하기 위해 공동식사의 의미를 담은 애찬식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주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하면서 잔을 들어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눅22:17)고 하셨습니다. 꼭 예수님께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을 제자들이 서로 나누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주님의 피를 함께 나누며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5) 애찬식 교독문
인도자 : 우리는 서로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형제자매로 고백합니다.
회중 : 이 고백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을 새롭게 하며 당신과 함께 이 언약을
세웁니다.
인도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만 돌보지 아니하고, 서로를 돌아보며, 서로의 짐을 지어주고,
서로를 기쁨으로 도와 줄 것입니다.
회중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사와 물질을 함께 나누며,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 같이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인도자 :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며,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모든 일에 함께 할 것입니다.
회중 :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심을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고백하고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인도자 : 우리는 또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의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회중 : 지금 우리 모두는 차별을 넘어서 한 몸으로 연결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합니다. 아멘.
첫댓글 성찬식을 매주일하면 안되는 것인가요?
1년에 두번으로 고정시켜서 무척이나 귀하고 권위적인(?) 행사로 만들어야 성찬식의 본래의미가 살아있는 걸까요?
성경공부시간에 성찬과 애찬이 가지는 종교사적, 신학적의미도 배웠지만 지금의 성찬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에는 많은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너머서교회가 지난 6년동안 어린아이까지 참여한 성찬식이 그 뜻이 잘못된 것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안좋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추구해온 너머서교회의 믿음의 근본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요?
진행상에 보이는 자그마한 것들도 있지만 너머서교회의 모든 교인들-어린아이까지 포함한-이 차별을 너머서
진행상에 보이는 자그마한 것들도 있지만 너머서교회의 모든 교인들-어린아이까지 포함한-이 차별을 너머서 하나라는 것을 항상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예전이었습니다.
개혁은 과거의 부정에서 큰 힘을 얻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변화는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예전을 변경할 때 교인들의 의견-대부분 어린이들을 배려한 설교와 예배시간을 짧게 해달라는 건의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을 물어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과거 장로교 통합측 교단은 애찬식에 대해서 연구검토한 뒤 애찬식이라는 이름으로 일체의 유사한 성만찬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고합니다-교단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변화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마친 다음에 변신을 꾀했으면 합니다. 목회자에 따라 교회에 가장 많은 영향과 변화를 가져오지만 같이 숨쉬고 함께 움직이면 숨가쁨이 가라앉을 겁니다
귀한 의견 감사합니다.
과거를 부정하거나, 잘못되었으니 이를 개선하자거나 하는 그런 취지가 전혀 아닌줄로 압니다.
지금까지 우리교회가 지향해 온 가치들이 소중하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방향이라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정집사님 제안처럼 매사 충분한 소통을 이루어 변화로 나아가자는 말씀에 백번 공감하고요,
덧붙이자면, 지금 이 사안은 공동체의 예배와 관련해서 충분히 고려하고 변화를 시도해 볼만한 이슈라고 사료되며, 그동안 목사님과 함께 운영위원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쳤습니다만, 지적하신 것 처럼 가장 중요한 교우들과의 소통이 미비했던 것 같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열린 소통으로 논의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