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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결론, 그리고 남은 과제
너머서 10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이제 육 개월 간의 대 장정을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역사의 준엄함과 객관성 그리고 공정성이란 화두가 이 기간 내내 저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집필 속도가 느려진 것은 , 너머서 십 년사 자체가 사후 평가가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현존 하고 있는 인물들이 관여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번 활자화 된 기록은 번복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더욱 더 표현이나 단어 사용에 조심하고 신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는 사람들의 머리로, 생각으로,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 삶으로, 체험으로,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만큼 더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 교훈을 얻어야 시행 착오를 줄일 수 있고, 실수의 반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번 너머서 십 년 사는 위에 언급한 목적 이외에도 특별히 우리 너머서 교회가 시작한 뒤에 우리 교회에 합류한 분들과 가슴을 열고 좀 더 깊이 있는 소통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의도도 컸었는데 , 그 대상들은 아쉽게도 이미 우리의 곁을 떠나 갔습니다.
지난 십 년을 되돌아 보면서 깊은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고, 성공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보다 오히려 실패와 시행 착오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지나온 그 걸음 그 하나 하나가 섬세한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 하심이었음을 고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있었고, 인간적으로 참 가슴이 아픈 사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결정하고 순종 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결과가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혼돈케 하고, 하나님의 뜻에 회의를 품었던 일도 있었지만, 그러한 역사와 사건마저도 우리에게 반드시 거쳐야 할 사건 이었고, 소중한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와 같이 보이는 그곳에 오히려 하나님의 빛나는 보배를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역사는 실패함이 없는 역사 입니다. 믿음으로 행한 모든 것은 ,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십 년의 세월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수 많은 고비와 위기의 때를 지나 왔지만 오히려 그 위기와 어려움들이 우리를 얼마나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우리를 얼마나 더 철이 들게 만들었으며, 우리를 얼마나 더 성숙하게 만들어 왔는가를 우리는 지금 목사가 부재한 오 개월간의 시간들을 우리 모두가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잘 견디어 오고 있다는 현실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안해용 목사도 필요 했지만 , 이 헌주 목사와 함께한 세월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안해용 목사가 떠나감으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신앙의 진 면목과 , 참 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구호에만 그친 우리의 “코람데오” 즉 “자립신앙”의 실체가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 모래성과 같은 것이었든 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 끝에 일차 목회자 청빙 때는 전임 목회자를 선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헌주 목사 시대를 거침으로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겸임 목회자를 선택 하자는 쪽으로 이심 전심 의견들이 모아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그렸던 처음 설계도대로 “ 코람데오 “ 즉 “ 자립신앙” 으로 한 걸음 더 다가 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임 목회자 시대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목회자 리스크를 생각하게 되었고, 목회자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 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대문에 우리 교회는 안해용 목사도 있어야 했지만 이 헌주 목사도 필요 했던 것이지요. 결국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 강당 임대 시대를 거쳐서 , 예배 전용의 현재 교회 건물을 임대 할 때도 하나님은 치밀하게 이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학교 강당으로부터 예배당 전용의 임대 시대 중간에 씨앗 교회와의 건물 공유 시대를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학교 강당을 빌리는 길이 막히자 우리 내부에서는 이제 예배당 전용 건물을 임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 그 때는 많은 분들이 “건물 없는 교회” 라는 너머서 교회의 정체성과 특징이 없어진다고 하여 , 교회가 건물 임대를 결정 하면 교회를 떠나겠다는 식의 반발도 상당히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비록 6 개월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었지만 씨앗교회와의 건물 공유 시대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자연스럽게 전용 건물 임대로 넘어 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만약 그 중간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의 예배당 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불필요한 갈등과 소모적인 논쟁을 거쳐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어온 과정과 그 걸음들 중에 불필요 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지나온 과정마다 하나 하나 의미가 있고 깨우침이 있고 가르침이 있었다면 그 모든 과정은 당연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지나온 과거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 하심 이었다면 앞으로 우리가 가는 과정 역시도 여전히 그 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게 될 것, 또한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에 교회가 모자라서 교회 숫자 하나를 더하기 위하여 시작한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의 정신과 그 본질에 충실하기 위하여 종교적 관습과 신앙의 유전을 너머 서기로 한 교회입니다. 이 것은 쉽게 말하면 진리에 입각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걸림이 되는 것들은 무엇이든 과감하게 뛰어 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 운동에 전적으로 동참하기로 한 교회입니다. 이런 취지와 방향을 바탕으로 지난 십 년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처음 가보는 길 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미숙하고 시행 착오적인 부분은 있었지만 “우리가 추구해온 길과 그 방향성은 맞다” 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심을 간직하면서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을 따라 그대로 전진하면 될 것입니다. 항상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방향이 옳다면 속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머서 교회를 시작할 때 우리 모두가 합의한 사항이었습니다. 교회 성장을 부정 하거나 , 금기 시 하지는 않지만 인위적이고 무리한 방법으로 교회성장에 목메지 말자는 것도 우리 모두의 합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속하지 말고, “ 천천히 가는 것이 좋겠다” 는 것 이었습니다. 교회 성장 만을 목적으로 하거나, 조급한 성과와 업적에 목을 멜 때 , 필연적으로 과속과 과욕이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욕심은 반드시 무리하고 비 상식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는 것이 그 동안 우리의 신앙생활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씨를 뿌린 우리 세대가 굳이 결실까지 맺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순리에 따르면 될 것입니다. 저는 시작 세대가 반드시 열매까지 거두어야 하는 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업적이나 성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초심을 버리지 않고 주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끝까지 같은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만 맞으면 언젠가는 열매가 맺힐 것이니까요. 저는 우리 너머서 교회가 성공과 실패를 떠나 현재에 한국교회의 개혁에 쓰임 받고 있는 그 자체가 축복임을 믿고 있습니다.
십 년사를 정리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제 마음속에 두 가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단어라기 보다 “문제의식” 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 회중주의 “ 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계시록에 나와있는 “ 에베소 교회 “ 입니다. 왜 이 단어가 떠올랐을 까요. 이 두 가지 문제가 그 동안 우리가 겪은 시행착오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 교회 십 년 역사의 반성문 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 십 년 역사를 정리 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지금 우리 교회나 “건작연” 형제 교회들이 추구하고 있는“건강한 교회“ 의 모델이 교회사 적으로 “ 회중교회 “ 와 거의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 회중교회 “ 모델 염두에 두고 교회 개혁의 방향을 설정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니 염두에 둔 특별한 교회의 모델은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정신과 철학 , 우리 교회의 기반 신학인 “평신도 신학” 을 담아내고 , 한국교회의 특징인 성장주의 , 목회자에게 집중된 견제 받지 않는 권한 ,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와 방안들을 만들고 보니 결과적으로 “회중주의적 교회”가 된 것입니다. “회중교회” 는 “ 조합교회 “ 라고도 합니다. “장로 교회”가 당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의 민주 체제에 가까운 반면, “회중교회”는 문자 그대로 회중의 의견을 중심으로 교회의 정책을 결정해 가는 직접 민주주의적인 정치 체제에 가깝습니다. 이 교단은 현재 유럽이나 미국 쪽에는 일부 군소교단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이 체제가 답답하고, 많은 자기 희생과 기다림을 요구 하는 것이기에 선호도가 떨어지는 체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교회는 장로 교단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입니다.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신앙 생활을 장로 교단에서 만 한 사람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회중주의적 교회 “ 즉 성숙한 직접 민주주의 교회를 한번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직접 민주주의에 기반한 “ 회중교회 “에 대한 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직접 민주주의의 꽃은 성숙한 토론 문화 인데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너무나 서툴렀기 때문에 토론 때 마다 감정이 실리고, 자기와 다른 의견을 자기에 대한 반대로 받아들이고 , “틀림”과 “다름” 조차도 구별이 안 되었든 것입니다. 그래서 토론만 하면 예의가 없어지고, 이성을 상실하여 공격적이 되고, 감정이 앞서게 되어서 의견이 조정 되기는커녕 서로간의 감정 싸움으로 비화되기가 일수였습니다. 결국은 교회가 분열 되거나 , 서로 이별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을 우리도 경험한 바가 있고 , “건작연” 형제 교회들에게서도 자주 목도하게 됩니다. . 성도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목회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와 함께 했던 목사님들 역시 장로 교단 출신입니다. 회중주의를 한번도 경험해 본적도, 이에 대하여 고민해 본적도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개혁에 대한 의지도 있었고, 교회개혁의 취지와 당위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감을 하지만 , 목회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나 사고 체계는 장로 교단 적 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우고 교회에서 경험한 선배 목사들의 권위주의적인 틀이 그 기저에 깔려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으로 목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접근하다 보니 갈등이 증폭되고 , 시행 착오들이 많이 발생 했던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가 주도하는 교회여야 하는가, 아니면 성도가 주도하는 교회여야 하는가 하는 논쟁과 갈등은 “회중주의”를 전제로 한다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공동체 중심 교회” 라는 방향으로 또 다시 과거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더 진화해 갈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방향으로 차질 없이 전환 하면서도 ,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 회중주의 “ 와 “공동체 중심 주의” 에 대한 좀 더 정밀한 연구와 이론 체계가 필요합니다. 또 여기에 걸 맞게 목양을 비롯하여 교육 체계 등도 개편해야 할 것입니다. 또 실제로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 중심주의를 감당할 수 있는 신앙적인 또한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이 준비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교회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 에베소 교회 “ 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 우리 “ 건작연 “ 형제 교회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계시록에는 동남아 일곱 교회의 이름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마다 하나님이 주신 칭찬과 경고에 대한 메시지의 내용이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참고 인내하며 견디어 낸 것과,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을 밝혀내어 진리 수호에 앞장 섰던 것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처음 사랑을 버렸다” ( 계 2:4 ) 라고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지적은 에베소 교회로서는 참 뼈아픈 지적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교회가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실 “에베소 교회” 는 일곱 교회 중에 장자 교회라고 할 만큼 규모나 영적인 수준에 있어서 사실은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1 세기 초대 교회 시절에 밀물처럼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이단의 사상들과 최 선봉에 서서 싸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단의 주류가 “영지주의”와 “율법주의” 였습니다. 이 두 이단 사상은 초대 교회 복음을 훼손하는 대표적인 것으로서 주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교회로 침투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연약한 그들의 신앙을 흔들었습니다. 교회로서는 이들을 막아 교회를 지켜 내는데 온 힘을 다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이 교회는 진리에 강한 교회였습니다. 진리를 수호하고 이단을 막는데 진력하게 되면서 교회가 날카롭고 예민해 진 것입니다. 진리와 논리에 강한 교회가 가지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그러움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푸근하게 감싸주기 보다 지적하고 따지기를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아주는 여유가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버리거나 잊으면 자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도 결핍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식 용어로 하면 “ 은혜” 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 처음 사랑을 버렸다 “ 라는 뜻입니다. 지난 번 집담회 때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사랑이 없다” 라고 공개적으로 발언 했을 때 솔직히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것이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같은 감정 이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그 때 이후로 저는 그러한 지적의 근원과 이유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그 동안 우리 교회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의식하면서 “ 한국 교회 개혁” 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온 경향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한국 교회의 모습 때문에 분노도 하고,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 절망과 좌절 감에 사로 잡혀, 자주는 아니지만 피켓도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영적인 내면이 고갈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날카로워 지고 이론에 강해 지고 따지게 되고 비판 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는 못 느끼지만 외부에서 우리 교회에 새롭게 합류한 분들에게는 우리가 건강한 교회 라고 하면서도 갈라파고스 같은 그들만의 리그로 비쳐 지면서 “ 사랑이 없다” 라는 뼈아픈 지적으로 돌아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이러합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 요1:14 ). 저는 늘 이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사실 은혜와 진리는 전혀 반대되는 속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겸비하시고 조화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때로는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무리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일일이 손을 내밀어 영, 육 간의 치유를 행하시는 분인 반면, 난장 판으로 변해버린 성전 뜰에서 환전 상들의 돈 바꾸는 판을 뒤엎으시고, 채칙을 휘두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양면성 입니다. 따스한 은혜와 , 거룩한 분노 즉 진리가 충만하신 모습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양면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 사실은 이 상반되는 두 속성을 함께 가지면서 , 조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 인간에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저도 잘 못합니다. 은혜가 많은 분은 진리가 약하고, 진리가 강한 분은 “은혜” 가 부족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은혜가 강하면 진리가 약해지고, 진리를 강조하면 은혜에 구멍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없다” 라는 이 지적을 오해로 치부하지 말고, 변명 하지도 말고, 우리 모두가 이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서 이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문제 의식을 가져야 , 해결책도 나오리라 믿습니다. 교회가 사랑을 잊어 버리면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하고 함께 겸비한 교회로 나아 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과 우리 교회에 주어진 또 다른 하나의 과제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교회에 “ 사랑이 없다 “ 라는 이 지적은 사실 우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건작연” 형제 교회들, 모두가 안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 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 년 동안 우리 교회는 대외적으로 건강한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 교회의 건강성을 의심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또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뒤지지 아니하는 교회의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강성을 저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잘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동안의 우리의 경험과 시행 착오, 그리고 최근에 교회가 경험한 상처와 아픔, 또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현재의 문제와 고민들을 생각해 보면 철학과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보다 훌륭한 철학과 교회 건강성을 위한 제도가 잘 갖추어 있음에도 불구 하고 많은 지체들의 중도 이탈을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민일 뿐 아니라 “건작연 “ 형제 교회 모두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경험 한 바가 있지만 건강한 교회라고 하면서도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나 이견이 발생 할 때, 또는 분쟁이 발생되었을 때 건강한 토론과 성숙한 신앙으로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탈해 버리는 것을 경험 하게 된 것입니다. 올해 우리 “건작연” 이 “ 건강한 교회 , 벽 앞에 서다 “ 라는 주제로 “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 “ 라는 세미나를 개최한 이유도 이런 문제 의식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도와 철학만으로 건강한 교회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십 년의 경험 이라면, 이제 제도나 철학과 관련한 문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고, 이제는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역사의 초점을 바꾸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에게로 초점을 바꾼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 구성원 개개인의 “ 신앙의 성장 과 성숙 “ 이라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 성숙의 마지막 단계는 역시 “ 코람데오 “ 즉 “ 자립신앙” 입니다. 지금까지 제도와 철학을 중심으로 한 교회로부터 명실 상부한 “ 자립신앙“ 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사람을 세우고, 키우고, 교육하고 , 돌보는 사람 중심의 목회와 사역으로 전환 해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지난 일차 목사님 청빙 광고에, 우리는 우리 교회가 원하는 목회자 상에 “ 감독이 아닌 코치와 같은 목회자 “ 라는 구절을 삽입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우리 교회의 지향점이 “ 자립신앙 “ 이라는 뜻입니다. 이번 청빙 목회자도 우리는 겸임 목회자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목회자 부재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주인정신도 많이 키워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제 우리 교회가 “자립신앙” 이라는 사람 중심의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은 잘 만들어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철학과 제도 중심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사람 중심의 사역으로 우리 교회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게는 한번도 우리를 실망 시킨 적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의 우리 교회의 다음 행보를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 있습니다. 이제 제 1부 “너머서 십년 사” 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1부의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2부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2018. 12.21 최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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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그간 너무 많이 애쓰쎴어요.
너머서에 늦게 들어온 저와 같은 사람도 너머서 10년동안의 하나님이 함께하신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읽혀지네요. 장로님의 깊은 통찰과 기도와 수고가 느껴집니다. 이제 철학과 제도를 넘어 사람중심의 공동체를 향해 가야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머서교회 역사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리며
사람중심의 공동체를 향해 가시는 길에 대한
여정의 글이 그리워 집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지네요 ~
길마다 축축이 내려지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