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수표의 추억
박무형
parkhyung7@daum.net
오래된 서류를 찾는데 다락 서랍장에서 웬 수표 묶음이 나왔다. 그 묶음은 와이셔츠 상자 안에 옛 모습을 간직 한 채 거의 40여 년을 미라처럼 잠자고 있었다. 그것은 밑에 기다란 수표 종이 몇 장이 달려 있고, 그 위 왼편에는 찢겨 나가고 남은 부표(附票)만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었다.
처음엔 옛날 아버님이 사업을 할 때 쓰시던 당좌수표 묶음인가 싶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고 우리 집 가계수표 철이었다. 총 20매가 묶여 있었는데 16장이 발행되어 나가고 4장만 원본대로 남아 있었다. 상자 안에는 가계수표 전용 도장과 인주갑, 그 기록용지가 부장품처럼 비치되어 있었다. 옛 골동품을 보는 것 같아 신기했다.
나는 그 가계수표가 생소하고 그것을 사용했던 기억이 별로 나지 않아 아내에게 물었다. 그도 박봉의 살림이지만 동네 가게에 외상을 남기지 않는 성격이라 그렇게 많이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 집에 돈이 바닥날 때, 아이들 학교 수업료나 과외비를 내야 할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물거리는 기억의 저편에서 내가 몇 번인가 사용했던 일이 떠 올랐다.
1980년 초 경기도에서 서울로 전입했던 시기였다. 다사다난하던 정변의 격동기에도 박정희 정권이 성공적으로 추진한 중화학 공업화의 기반으로 국가의 금융자산이 확충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밑바닥 서민 경제는 여전히 빈곤을 면치 못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가계수표는 영세 자영업자, 봉급생활자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단기간 융통할 수가 있는 고마운 역할을 했다.
처음으로 우리 집 ‘가계수표’를 개설했다. 아내는 마뜩잖아했지만, 나의 체면 유지를 위해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았다. 은행과 가계수표 거래약정을 맺고 가계 종합 예금통장을 개설한 후 일련번호가 찍힌 20매의 수표책을 받았다.
첫 번째 사용처가 불쑥 찾아온 친구를 도와주는 일이 되었다. 사립학교 미술 교사를 하던 친구가 직장으로 찾아왔다. 교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다 가산을 날리고 평소에 즐겨 그렸던 그림을 지인들에게 팔러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국전 입선 작가라 그림은 괜찮은 수준이라 했다. 과거 대학 시절 친했고 입대도 같이했던 친구라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즉시 가계수표를 끊었다. 그림값은 족히 당시 쌀 한 가마 값이었다.
집에 와서 친구의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이발소 그림은 아니었다. 풍경화였다. 내가 좋아했던 이종무 화백의 화풍을 닮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었다. 그 그림은 명화처럼 우리 집 거실을 한동안 장식하기도 했다.
그 두 번째 사용처도 불우해진 친구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고교 시절 부산 숙부 집에서 양자로 지낼 때 나의 사춘기는 무척 외로웠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양부모에게 부모의 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그 친구와 단짝으로 영화도 보러 다니고 밤늦도록 탁구도 치고 소설책도 돌려보며 지내던 절친이었다. 부산 TBC 방송국 성우로 활약하며 잘 나가던 친구였는데 방송 사고로 퇴직하고 어린 미인 탤런트 아내와도 헤어진 후 소식이 끊겨 궁금하던 차에 불쑥 전화를 걸어 왔다. 좌우간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동안 새로 맞이한 둘째 부인과 서울 근교에서 장사했는데 더 좋은 가게 자리가 생겨 돈이 조금 필요하니 좌우간 6개월만 빌려달라고 했다. 은행 보증을 서 달라는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큰 금액은 아니었다. 몇 개월 분 봉급 액수였다. 나는 다음 달이면 직장동료끼리 모으는 계를 타게 되어 그것으로 나의 가계종합예금계좌에 입금하기로 하고 가계수표 몇 장으로 결제해 주었다. 아내에게는 의논도 하지 않았다.
그 친구의 전에 없이 달라진 건실한 모습이 주저없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6개월 후에 그는 돈 대신 먹을 것만 잔뜩 사서 왔다. 부산 본가에서 부쳐주기로 했다던 돈이 자꾸 미뤄진다고 했다. 그 친구는 다음 달도 먹을 것만 잔뜩 사 들고 와서 한바탕 잔치 하듯 먹고 마시고 하다가 3개월 후로 미루고 돌아갔다. 나는 그 일로 이미 아내와 애들에게 융단폭격을 당하고 가계수표 용지와 통장을 압수당한 처지였다.
3개월 후 그 친구는 약속을 지켰다. 원금과 이자도 챙겨주었다. 부산 부모님에게서 결국 지원을 못 받았다고 했다. 과거 그의 행적이 부모님께 믿음을 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대로 장사가 잘되어 그제야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참으로 흐뭇했다. 마지막엔 그 부인과 아들 둘을 데리고 왔다. 그 친구가 둘째 부인을 참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실하고 강인해 보이고 인상도 좋았다. 고마움으로 거나하게 한잔 사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하였다.
세 번째 사용은 아내가 나를 위하여 가계수표를 그어 준 건이었다. 서울 본부에서 승진하여 지방으로 전근하게 되었다. 퇴근 후에 동료들과 한 잔씩 한 것이, 가끔 지인들과 회포를 푼다고 술자리를 베푼 것이 외상으로 깔려 있었는데 갚지 않고 지방으로 아주 가 버린 줄 알고 단골 술집들에서는 집으로 득달같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술집 마담과 일일이 외상 술값을 파악하고 청구서를 우편으로 받은 뒤 이를 가계수표로써 갚고 그 일부는 통장을 털었다. 나는 그때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통 큰 아내의 힘에 주눅이 들고 말았다.
지금은 개별 은행계좌가 전국 온라인이 되어 있고, 신용카드로 자금 융통이 자동화되어 가계수표는 추억으로 사라졌다.
한턱 선심을 쓰듯 발행했던 가계수표가 돌아오면 거래 잔액이 모자라 부도 처리되어 신용불량자가 될까 봐 조마조마하던 그 시절이 지금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 박무형 2010년 ≪에세이21≫등단.
수필집 ≪아버지의 마지막 춤≫.
※ 사진과 상세 프로필은 전년호 (남강문학 12호) 때와 변동없습니다.
그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