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이콘만 그릴 수 있다면…
하루 종일 감자만 깍을 수 있다면…
하루 종일 가구만 만들고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형제들과 함께 늘 새로운 노래를 배우고 저녁기도를 마칠 수 있다면…
오늘 하루도 사람들과 씨름하고 지친 몸으로 수도원에 들어 왔다.
그 동안 만나고 함께 일 해왔던 사람들이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였다면
이곳 선교지는 너무도 다르다.
어느 하나 안정적이지 않고 매 순간 복음적 식별을 요구한다.
이제야 복음 하나를 이해 할 듯 하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나오기로 한 작업자들이 하루, 이틀이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 일로 다른 일들이 미루어진다.
너무도 당연한 신뢰의 바탕 위에 나아가야 할 사소한 일들에 많은 에너지를 쓰게 한다.
이렇게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동시에 다가오고
매일 나에게 도전해 온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것이 사람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고상한 척 내가 어떻게 살아 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앞으로가 아니어도 난 지금 기쁜가?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 앞 까마로바-사베트스까야 사거리에서는 어제도 사고가 났다.
신호등이 없어 자주 사고가 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제는 사고 현장을 바라보며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게 되었다.
어느 장소든 초창기의 선교자들이 이러한 삶을 걸어 왔다는 것을 난 안다.
그 길 위에 길을 놓는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나를 나답게 만드는 단련의 시간임을…
매일 아침 복지관 마당에 자리잡은 소국이 언제쯤 봉우리를 피울까 바라본다.
긴 겨울에 싸였던 눈을 봄이 되어 흡수하고 비,바람을 견디고 뜨겁지 못해 따가운 여름 햇살을 이긴 후 제 모습을 드러낸다. 작년보다도 더 많아진 그를 본다. 아니 어느새!!! 난 그를 통해 국화꽃을 피우는 진리를 배운다. 자신은 국화꽃이라는 사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시간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시끄러운 날씨의 변화는 있지만 자연이 알아서 이때쯤 그를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을 재촉하게 한다.
무엇 때문에…
지금 난 기쁜가?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다시 깨우치게 한다.
자연의 흐름 안에 창조된 나의 본연의 모습으로 앞으로가 아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을…
꽃을 피우는 시기도 뿌리 내리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불어에 ‘떼루아’라는 말이 있다.
한병의 포도주가 나오기까지 포도가 잘 익도록 도와준 햇볕과 기후, 농부의 땀방울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이다.
이렇듯 결과는 과정이 가져다 준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선교사의 삶이 아닐까?
복지관 앞마당에 있는 국화꽃은 오늘도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려는 어리석은 날 붙들고 그렇게 말했다.
첫댓글 국화 꽃을 많이 묵상하며 가을도 풍섷하고, 선교사의 영성도 더욱 풍성하게 살아가는 가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힘 내세요!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사 눈을 돌려 여기저기 들여다봄니다.처음 글 올리고 나서 달아주신 댓글을 보면서 왜그렇게 울었는지 몰랐음니다.한데 오늘 들어와보니 이유를 알것도 같음니다.감사함니다.사랑이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