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압도적으로 추천하기에 어느 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틀었다. 젊은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그런 일이야 원래 흔하긴 했다. 나는 꽤나 평균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골목길에서 고무줄 놀이하던 7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컴퓨터 한 대 집에 들여놓을 만큼 중산층이었다가 하루아침에 부모님 사업이 망해 집이 풍비박산 나고, 90년대 학자금대출 받고 온갖 알바를 전전하며 대학생활을 했던, 신세대라 불리던 세대. 그 세대만 등장하면 나인 것 같은 드라마 속 캐릭터야 많고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판박이 같았다. “나를 추앙해요”라고 낮게 읊조리는 염미정 말이다.
전 남친에게 돈을 꿔주고 결국 받아내지 못했지만 사람의 밑바닥까지는 보고 싶지 않다며 현실에서 도망치던 나, 호구 잡혔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뻥 뚫린 듯 허했던 나의 20대. 서른이 넘어서야 만나 그런 나를 사랑으로 믿음으로 추앙해준 김관장 덕분에 나는 다시 현실에 발 딛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판박이 같았던 건, 내 남편 김관장도 염미정의 ‘구씨’처럼 껍질이 없는 투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머뭇머뭇 할 말을 삼키는, 더 이상 상처 받기 싫어 두꺼운 껍질 안에 숨어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투명한 사람만이 내 두꺼운 껍질에도 아랑곳없이 스며들어와 나를 채울 수 있었으리란 생각이 이제야 든다.
김관장도 구씨처럼 나에게 말했었다. “난 운동 안했으면 원래 조폭이나 했어야 할 나쁜 사람이야.” 아! 작가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입 밖으로 나온 그 말이 나란 인간을 얼마나 안심시키고 내 껍질을 스스로 벗겨내도록 이끌었는지를. 오히려 실상은 그런 인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착한 척, 매너 있는 척, 사랑하는 척하는 인간들이 더 많은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을 그런 인간이라고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야말로 내 알량한 껍질이 얼마나 쓸데없이 이고 다니는 짐이었는지를 퍼뜩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단점을 숨기고 장점을 내세우는 인간이 아닌, 수많은 장점에는 침묵하고 단점을 소리 내어 말하는 인간 앞에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스토리 중심으로, 또는 대사에 꽂혀 드라마를 보곤 했는데, 여기서는 말없이 밥을 먹고, 말없이 술을 먹고, 말없이 걷는 등장인물들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의 성장과 해방을 기다리는 독특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게다가 밥상 앞에서 밥을 저렇게나 진정성 있게 먹는 드라마라니.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밥 먹는 씬을 넣은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에게 밥을 먹는 행위가 정말 중요하게 느껴지는 드라마는 처음이다. 실연을 당하든 고단한 퇴근길을 지나왔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밥을 꾸역꾸역 구겨 넣듯이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방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밥’ 먹는 행위가 사라지고 어느새 그 자리를 ‘돈’으로 가득 채운 드라마에 염증이 느껴지던 차였기에 이 드라마의 밥 씬이 더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구씨’ 역을 맡은 배우 손석구는 밥을 먹는 입으로도 연기를 하고 반찬을 집는 젓가락질로도 연기를 하는 놀라운 배우다.
김관장과 살면서 사랑과 지지로 가득 채워지는 중인 나는 이제 더 이상 껍질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하루하루 말이 많아지고 머뭇거림이 사라지는 중이다. 모든 것이 워낙 느린 나는 가득 채워지는 데만도 10년이 넘게 걸렸다. 드라마가 끝날 때쯤 가득 채워진, 날 닮은 염미정이 어떤 모습일지 가장 기대되는 사람이 나일 것만 같다.
첫댓글 밥 먹는 장면이 진심이라는데 백퍼 동의!
저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ㅎㅎ
이 드라마 한번 봐야겠네요.
그리고 껍질없는 투명한 사람이랑 사는건 정말 행운인거 같아요.
오~ 저도 좋아하는 드라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