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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라쪼에 있는 성 안토니오 오라토리오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모임에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선임자로 선출되어 일요일 마다 회원들에게 설교를 했다. 몇 명의 동료는 바오로를 중심으로 그룹을 만들었다. 그들은 일요일 저녁에 바오로와 함께 교외로 산책을 하곤 했다. 그들은 영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고 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산책길에서 자신의 성소를 다시 찾았다. 바오로가 이런 친구들 처럼 사제의 길로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카스텔라쪼에는 아우구스틴회와 마리아의 종회, 카푸친 회들이 있었는데 이들 수도회는 본래의 회칙으로부터 이완된 상태에 있었다. 바오로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는 오로지 고독 속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독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몰랐다. 바오로는 회심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의 봉사에 바치기로 결심했었다.21세에 베네치아 군에 자원 입대한다. 처음 바오로는 크레마에서 파르마로 페라라로 옮겨졌다. 여러 달 동안 그는 무보수 지원자로 군인의 특수한 일을 배우는데 전념함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40시간 성체조배 중 성체 앞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피가 흐르는 전쟁터가 아닌 다른 전쟁터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처음의 계획을 포기한다.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기존의 수도회에 입회하지 않게 만든 그 막연한 고독에의 갈망이 좀 더 명확하게 느껴다. 어느날 세스트리 근처의 산정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가쪼의 성모'라 불리는 작은 경당을 보고 있을 때 세상에서 은거하여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구체화되었다. 물론 이 결심을 당장 실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고독을 원하는 마음이 전보다 더 강하게 느꼈다. 바오로는 1719년 4월 23일 가티나라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바오로가 25세가 되어서야 견진을 받은 것인데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