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오로는 자신이 특별한 성소로 불리웠음을 확신하며 알레싼드리아의 주교 가티나라를 만나러 갔다. 바오로는 주교에게 총 고백을 하고 또 자신이 보았던 비전과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써 주교에게 알려주었다. 주교는 바오로의 신비한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바오로에게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록하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주교는 신중을 기해 바오로를 현명한 지도자에게 보내어 상의하게 하고 그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런 조사 결과는 호의적이었고, 가티나라 주교는 바오로에게 은수자로서 참회복을 입힐 것을 약속했다. 바오로는 선물로 받은 검게 염색한 거친 옷감을 긴 외투로 만들어 새끼로 허리를 묶었다. 이것이 바로 비전 중에 본 바로 그 옷이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설립하고자 하는 단체의 수도복은 아니었다. 아직 고난의 표지를 달 수 없었기 때문이다.가티나라 주교는 교황청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유의했기에 고난의 표지를 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표지를 단 단체를 설립할 관할 권한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동료들을 모으는 허락을 줄 권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는 공식적으로 바오로가 격리된 장소에서 보속의 생활에 전념할 것을 허락하였다.이것이 당시 은수자들이나 봉쇄 수도자들의 성소였다.가티나라 주교는 이런 특수한 성소에 직면하여 바오로 다네이에게 은수자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주교의 생각에 은수자의 삶이 바오로가 본 비전에 꼭 들어맞는 생활은 아니었으나, 바오로의 의 고독과 참회에 대한 열정에 부응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선 은수자로서 살면서 장래에 대한 설계를 하는 것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11월22일 금요일에 예수님의 뜻 깊은 고난을 기억하려고 수도복을 입었다.바오로는 착복식을 하기 전날, 세속을 포기한다는 표시로 머리를 짧게 깎아버리고 카스텔라쪼의 성당을 방문하였다. 바오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청한 후 그들과 함께 '떼 데움과 미세레레' 시편을 합송하였다. 다음날 아침 알레싼드리아로 가기 전에 바오로는 "심한 갈등"이 치열했으며, "가난한 아버지의 집을 영원히 떠나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가득했다. 바오로가 알레싼드리아에 도착했을 때 주교는 부재중이었고, 당일로 귀가하지 않을 예정이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바오로 약속을 믿고 끈기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가티나라 주교는 바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 오셨다. 주교는 말털 또는 염소털로 짠 듯한 거친 천으로 만든 수도복을 축성하였다. 바오로는 그의 팔과 다리에 상처를 내고도 남을 단순하고 거친 속옷을 입었다. 그리고 굵은 띠를 두르고 가슴에 십자가를 달았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의 가난한 사람"의 정장이 갖추어졌다.바오로는 주교에게 이를 좀 연기할 수 있는 허락을 받고, 그 다음날 알레싼드리아를 떠나 카스텔라쪼로 돌아갔다.성 찰스 교회의 제의실과 건물 끝부분 사이에 있는 좁고 습기찬 방으로 가서 살았다. 그 방은 사닥다리로 연결된 다락이었다. 높은 벽 위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어서 그곳으로부터 햇빛이 들어왔다. 바오로는 주교에게 요청하여 이 새로운 거주지에 잠시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 장소에서 40일 동안의 피정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앞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지내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바오로는 이기간을 이용하여 하느님이 자신에게 알려주신 사명을 좀 더 명확히 하여 이를 글로 기록하고 미래 수도회의 회칙을 작성하고 싶었다. 바오로는 1720년 11월 23일부터 1721년 1월1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물과 빵으로만 연명하며 하루에 겨우 서너 시간만 잤다. 잠자리라 해봐야 좁은 공간에 누워 담요를 덮은 것 뿐이었다. 대부분의 낮시간과 일부 밤시간에는 성당지기로서 성당을 청소하거나 성사 집전의 시중을 들었고, 성무일도를 바쳤다. 또 자신의 시간이 날 때는 묵상을 하거나 일기를 썼고 미래수도회를 위한 규칙을 입안했다. 가티나라 주교의 요청으로 씌여진 이 일기는 그 사본이 아직도 남아있다. 바오로는 문학적인 수식 없이 소박하게, 때로는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틀린 문장이나 불완전 문장도 쓰며, 날마다 자신이 세세한 감정과 자신이 받은 은총을 주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히 기록했다. 12월 2일에 바오로는 그가 생각하는 미래의 수도회를 위한 규칙의 초안에 착수했다.피정을 시작한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 바오로는 동트기 전에 독서기도를 하고 묵상을 한 후, 쓰기 시작했다. 바오로는 "나는 마치 어떤 이가 강단에서 나에게 불러주는 것을 받아쓰듯이 빨리 썼다. 그 말들이 나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영감 진행되었다. 나 자신으로부터 는 단지 죄와 무지 외에는 나올 것이 없다." 바오로는 12월 7일에 이 모든 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규칙 초안은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사명에 대해 설명하는 서문과 바오로 자신의 고독에의 원의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삶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적은 12장으로 구성된 것이었다.이 규칙 초안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므로 후일 승인받기 위해서 수정되어야만 했다. 또한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고려하지 않은 규칙이었다. 그러나 성인은 후에도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본질적인 것"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말씀했다. 현재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서문과 몇 개의 단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