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3.
여름도 아닌것이 가을도 아닌, 구름이 내려앉아 있고, 비도 간간히 뿌려대다가, 해도 가끔 내다보는
그러한 어쩡쩡한 날에 강원도 인제를 갔다.
영동고속도로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홍천나들목으로 빠져나가, 46번 국도를 따라
인제 백담사 방향으로 들어선다.
백담사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인제군에서 운행하는 백담사행 버스에 올라탄다.
2003년도에 왔을때는 중간에서 내려서 백담사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했었는데, 지금은 백담사 앞까지
버스가 데려다 주어서 편하기는 한데, 힘이들더라도 올라가는 길에 설악산의 풍경을 놓치는 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백담사 입구
대웅전 근방의 부속건물들
백담사에 있는 만해문학관과 시비및 흉상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출가하여 법호 萬海와 법명 龍雲을 받아 승려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고, 대웅전 좌측으로 책들이 전시되어 있고, 차도 마실수 있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우측에는 전두환이 머물렀던 방이라고 팻말이 쓰여 있기도 하다.
백담사 경내에는 여러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사찰 앞으로는 계곡물이 흐르며, 등산로로 두시간
을 오르면 정채봉 동화작가의 작품 배경지인 '오세암'이 있다.
만해마을은 주차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으며, 이곳 만해마을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선생의 문학세계를 배울 수 있는 만해문학박물관을 비롯하여 문학강좌도 열리곤
한다.
만해마을
<만해마을의 숙소내부> <토론실>
만해마을은 지은지 몇년이 지났음에도 내.외부 벽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시멘트 냄새가 여전히 난다.
1층 로비 벽에는 서예작품들이 걸려있고, 한쪽에는 책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숙소는 4층으로, 창밖으로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흐르고, 소나무 숲이 보이곤 했었는데, 십이
선녀탕계곡과 연계해서 공원조성 중인듯 하다.
만해마을 1층 만해박물관
십이선녀탕 계곡 근방에 점심을 예약하고, 한계사지와 장수대를 가기위해 한계령길(44번국도)로
들어섰는데, 지난해 수해가 아직 복구되지 못하고, 한계령을 오르는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한계사지는 백담사의 전신 사찰로 신문왕 10년에 소실되어 지금 백담사 자리로 옮겨가고 현재
이곳에는 대웅전 주춧돌과 삼층석탑만이 남아있는 곳이데, 이곳 역시 수해를 입은듯 입구에 공사가
진행중이다.
장수대 역시 마찬가지이고, 한계령 휴게소에 잠시 머물다, 이순원의 '은비령'의 작품배경지인
필례약수터로 향한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500여미터 내려와서 우회전하여 가는길로, 이곳은 한계령
보다 수해복구가 더디게 되고 있는듯 포장도로보다 비포장 도로가 더 길다.
<은비령 카페> <필례약수터>
이순원작가의 '은비령'으로 인해 길이름이 은비령의 바뀐곳에 은비령 카페도 있다. 필례약수터의
물에는 철 성분이 많은듯, 샘물이 나오는곳 주변이 빨갛게 녹이슬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례약수터에서 10여분 올라가보면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쓰러져가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나무로
세동이 지어져 있는데, 이곳은 호로물류의 영화들의 촬영장소란다.
은비령 고개를 넘어 돌아오는 길은 내내 산을 돌고 또 돌고, 수도 없는 재를 넘고 나서야, 고속도로를
만날수 있었다. 백담사와 만해마을 외에는 다른곳에 들러볼 곳이 마땅치 않아, 돌아오는 길 내내 돌고
도는 길보다, 넘고 넘는 재보다 마음이 더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2007. 10. 17.
인제로 답사를 다녀와서는 내내 지도를 펼쳐놓고, 홍천과 양평 등지를 훝어 보지만, 마땅히 갈만한
곳이 마땅치가 않아 고민하다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소가 있는 망우리 공원묘지를 가기로 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산책로로 조성해 놓은 곳곳에 애국지사및 유명인사
묘역들이 있다.
소파 방정환선생(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설산 장덕수(독립운동가, 정치가), 송촌 지석영(의학자,
국어학자), 박인환(시인), 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 시인)...등등의 묘역이 있다.
국어학자인 송촌 지석영(1885-1935)
송촌 지석영(池錫永)선생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고려의 명장 충의군 지용기의 후손이며 1855년
5월 1일한성부중서훈동 (漢城府中署勳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지익룡(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935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학자·행정가·어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
으며, 특히 우두법(牛痘法)의 보급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선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두법은 천연두를 예방하는 일종의 예방 접종법으로, 예전에는 두창, 마마, 손님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는 유사이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아니라 다행히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
경우가 많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아동작가 소파 방정환 (1899-1931)
소파 방정환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등의 창간을 비롯 잡지를 편집·발간했다. 창작뿐 아니라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만해 한용운(1879-1944)
만해 한용운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시대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죽산 조봉암(1898-1959)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해 문화부책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해 활동했다. 제헌의원·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고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했다.
공원관리소 입구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 묘소까지는 언덕길을 30여분 올라가야 하는데, 가는길에
지석영선생묘와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를 들러보는데, 머리속에서 땀이 솟아나고, 얼굴로 떨어지는
땀을 주체할수가 없다.
회사에 출근했던 복장으로 근무시간에 땡땡이 치고 가는통에 물도, 수건도 준비하지 못하고,
니트로 된 티에 카메라 가방만 들고는 올라가서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길도 고스란히 받으며,
만해 한용운 선생묘에 도착했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힐 틈도 없이 사진만 찍고는, 어두어지는
산책로를 뛰다시피 내려와 관리소 근방에 있다는 박인환 시인의 묘소를 찾지만, 위치를 정확히
아는것이 아니고, 묘비명을 확인하며 돌다보니 어둡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묘소의 위치를 물으니, 담당자는 조~기 근방에 있는데, 자세히 모른다고,
묘역의 위치가 그려진 안내지만 준다.
'으~씨 묘소들이 한 두개도 아니고...'
기행시에는 만해마을의 만해 박물관과 백담사를 둘러보고, 백담사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영시암까지
가을 산행을 한후에 점심식사를 황태구이와 청국장으로 맛나게 먹고는 망우리 공원에서 만해 선생의
묘소에서 해지는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술 한잔 올리고, 돌아오는것으로 할 예정입니다.
답사때 둘러본 한계사지나 장수대, 은비령과 필례 약수터는 수해복구가 기행시 까지 완결될것 같지
않아서(버스가 운행할수 없음) 빼기로 했습니다.
첫댓글 망우리 공원(산)밑이 저희집입니다. 주차장 기준 산을 한바퀴 도는데 약2시간 소요됩니다. 3/2돌면 만해.죽산.소파. 선생님들 묘역이 있어서 묘비를 가끔 읽습니다. 소상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8/20/08 까-페에 감사하며 박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