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미야 Strumpanzer 탱크 박스 아트)
애초 2차대전 당시 피점령국들이었던 폴란드와 체코에서 발생한 봉기 사건을 소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45년 프라하 봉기에서 시민군이 노획하여 사용한 헤처 탱크 키트(아카데미)를 보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타미야 탱크 키트를 보면서 1944년 폴란드 봉기 사건을 소개하고져 합니다.
150mm 대구경 주포를 4호탱크 차체 위에 장착했던 Strumpanzer는 현대전에서 화력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K-9 자주포 탱크와 같은 기종에 할아버지격이 되는 독일 탱크입니다.
(나치 독일의 전설의 괴물 자주포 - 600mm 칼 자주 박격포, 옆에 4호탱크 차체를 개조한 포탄 운반 탱크도 보입니다.)
또 하나 언급할 기종으로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무려 600mm 자주 박격포인 칼 자주포가 있습니다. 150mm나 600mm라면 일반 전투용 탱크들에는 감히 장착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괴물"급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엄청난 화력을 바로 194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발생한 시민군 봉기 진압을 위해서 동원했다는 점이 바로 오늘의 포인트입니다. 연합군 정규 부대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들이 상당수 포함된 비정규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마치 토끼를 잡기 위해서 대포를 사용하는 "무식한" 사냥꾼처럼 나치 독일은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진행하였습니다.
(600mm 칼 자주 박격포의 단 한방이 바르샤바 시내에 거대한 빌딩에 명중하면서 마치 뉴욕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듯이
무너져내리는 끔찍한 장면입니다. 바르샤바 봉기 중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거대한 자주포의 위력을 볼 수 있는 사진입니다.)
(나치 독일이 엄청난 화력을 동원하여 소탕하였던 대상은 이렇게 부실한 무기를 갖고
무장한 폴란드 저항군들이었습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에 저항군들의
사진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해드렸던 1943년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 봉기 사건은 결국 수많은 유태인들의 희생자를 발생하고 진압되게 됩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44년 6월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독일 주력 중앙 집단군을 거의 전멸시켜 버립니다. 결국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진군 속도는 가속화되고 7월이 되자 바르샤바 시민들은 멀리서 들리는 소련군의 포성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련군이 진격해오게 됩니다.
물론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한다는 것은 원수와 같은 나치 독일을 폴란드에서 몰아내게 됨을 의미하였지만 폴란드 국민들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된 현실이나 가까운 미래에 소련군의 군화발에 짓밟히게 되는 상황이나 원치 않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할 당시에 소련은 독일과 동맹국이었고 폴란드를 함께 양방향에서 침공해온 적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카틴이라는 숲에서 무려 15,000명의 폴란드 군 장교와 지식인들을 학살한 주범은 나치가 아니라 바로 소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이해 관계가 바뀜으로 인해서 1944년 당시에는 나치 독일의 숨통을 조여오는 연합국의 일원이 된 소련은 다시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943년에 발견된 폴란드 카틴 숲에 폴란드인 학살 현장, 나치 독일이 아니라 소련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학살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에 영국으로 망명해있던 폴란드 임시정부는 나치 독일 점령 하에 폴란드 국내에서 저항 운동을 벌이던 국내군(사실상 레지스탕스 조직)에게 봉기를 명령하게 됩니다. 즉,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 폴란드 스스로 나치 독일을 몰아내고 자주 독립을 쟁취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이는 마치 일본 패망 직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소수의 부대를 조직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져 하였던 숭고한 노력이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인해 무산되었던 뼈아픈 우리 역사와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1944년 폴란드 봉기 당시에 지휘를 맡았던
볼 코모르프스키 장군(1895~1966), 약소국에
태어난 죄로 군인으로써 치욕과 불행을 감수
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1944년 8월 1일 드디어 폴란드 국내군은 바르샤바 시내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볼 코모로프스키장군의 지휘하에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자 수많은 시민들이 가세합니다. 1944년 8월에는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대패하고 패주하는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6월에 노르망디에 상륙한 서부 연합군에 의해서 동부전선에서도 후퇴를 거듭하던 나치 독일의 위용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에 비교하면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폴란드의 빈약한 국내군의 저항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무모한 시도였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우선 바르샤바에 주둔 중이었던 독일 경비대에게 총격을 가했고, 군용 차량에 화염병이 투척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서 시내에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독일 주둔 부대들을 고립시키기 시작합니다. 공격 개시 3시간 만에 시내에 독일군들은 대규모 집결을 못하고 소부대 단위로 폴란드 저항군들에게 포위당했고 일시적이었지만 시가지의 주요 건물들은 저항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폴란드 봉기 초기에 저항군이 탈취한 독일군 하노마그 장갑차)
처음에는 소총이 모자라서 부족한 무기들로 공격을 해야 했지만 이틀만에 독일군 병기고를 장악하게 되자 우선 기본적인 무장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병기고를 점령할 때까지 저항군 측에서는 무려 2,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일단 병기고에서 독일군의 소총과 기관총을 확보하게 되고 심지어 독일군 판터 탱크 2대와 하노마그 장갑차 2대도 탈취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독일군 피복들과 철모들이 저항군에게 지급되었는데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위해서 팔에 적색과 백색의 폴란드 국기를 완장처럼 두루게 됩니다.
(바르샤바 봉기 중에 저항군 식사를 준비해주는 폴란드 여성들)
한참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던 소련군과 그들의 수괴인 스탈린에게는 이런 폴란드인들의 자주적인 봉기가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스탈린의 계획대로라면 폴란드를 점령하여 전후에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소련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가 자주적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한다면 전후에 서부 열강들에게 소련이 폴란드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기 난감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의 밀월 관계를 풍자한 신문 만화,
하지만 이들은 불과 몇년 후에 전무후무한 엄청난 인명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이 되면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됩니다.)
결국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바르샤바 봉기가 독일군에게 진압된 후에 소련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소련이 폴란드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폴란드가 공산주의 위성국가가 되었을 경우에 폴란드의 괴뢰 정부를 구성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까지 인선을 끝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맹렬히 폴란드를 향해 진격해오던 소련군은 감자기 8월 2일 부대 재편을 핑계로 진격을 멈춰버립니다.
심지어 영국이 바르샤바 저항군들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와 보급품을 공중 낙하시키기 위해서 소련 점령 지역의 공항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청도 스탈린 자신이 거절해버립니다. 영국에 폴란드 임시정부는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봉기를 명령했으나 뜻밖에 소련의 훼방으로 영국은 저항군을 위한 공중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자 상황은 순식간에 파국을 향해 치달리게 됩니다.
혹시 연합군(소련 포함)과 사전 협조를 구축한 후에 바르샤바 저항군이 봉기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며 주춤했던 나치 독일 측은 소련군이 진격을 멈췄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안심하고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대규모 진압 부대를 투입하게 됩니다.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 진압을 위해 투입된 무장친위대 부대)
1년 전에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선봉에 선 것은 히틀러 못지않게 정신병자 사이코 패스였던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무장 친위대 부대들을 급파하였고 위에서 말했듯이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도 쉽게 등장하지 않던 대형 자주포들을 동원하게 됩니다. 심지어 "폴란드 돼지들의 도시를 지구 상에서 지워버리고 인정사정 없이 여자건 아이건 다 죽여라"라는 끔찍한 명령을 하달하게 됩니다.
(사이코 패스의 죽음 : 하인리히 히믈러 친위대 사령관은 1945년 독일 패망 직후에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한때 히틀러의 후계자를 꿈꿨던 그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하였습니다.)
이때 투입된 친위대 부대들 중에 한부대는 29 SS 무장천탄병 부대로써 일명 "카민스키 여단"이라고 불렸는데 동부전선에서 전투 중에 나치에게 전향한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되었으며 포악함으로 악명을 떨치던 부대였습니다. 이들이 바르샤바에 진입한 후에 저항군 진압보다 약탈과 살인, 강간만 일삼다가 결국 나치 독일 장성들도 보다 못해서 카민스키 여단장을 총살하게 됩니다.
(카민스키 여단의 지휘관 브로니슬라브 카민스키)
또하나의 투입된 친위대 부대는 36 SS 무장천탄병 사단 딜레방어 사단인데 이부대는 아예 강도, 강간, 살인등의 범죄자들로 구성된 부대로써 위에 카민스키 여단 못지않게 끔찍한 강간, 살인을 자행하면서 저항군 진압을 위한 전투는 뒷전으로 미루었습니다.
(딜레방어 친위대 사단의 지휘관 오스카 딜레방어, 훗날
그에 대한 평가는 "사이코패스", "아동성애자", "변태성욕자"
등으로 내려집니다. 도대체 이런 괴물이 어떻게 독일군 무장
친위대 사단을 이끄는 대령까지 진급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쨌든 전후에 폴란드에서 체포되어 간수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런 상식 밖에 정신병자들로 구성된 친위대 부대들을 맞닥뜨리게 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진압군 총사령관을 맞게 된 에리히 폰 바하 중장은 조금은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 미치광이 친위대 부대들을 바르샤바 시내로 진입시키기 전에 우선 시 외곽에 60만명의 시민들을 몰아냈습니다.
(폴란드 봉기 기간 중에 시가전에 투입된 딜레방어 사단 병사들)
일단 이 진압부대들이 바르샤바에 진압하면서 첫날인 8월 5일부터 시내에서는 끔찍한 학살과 약탈, 강간이 시작됩니다. 딜레방어 사단은 진입 첫날에만 무려 38,000명의 시민을 학살했습니다. 특히 볼라 지역에 세인트 라차루스 병원에서만 1,380명의 환자와 의료진이 쳐형을 당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살육을 하면서 정작 저항군과의 전투로 진격한 거리는 겨우 1km 남짓이었습니다. 결국 전투는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무조건 살인,약탈,강간이 주목적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이유로 봉기 초반에 무려 65,000명의 폴란드 시민들이 살해되었습니다.
(폴란드 봉기 중 저항군 병사들의 모습, 피아 구별을 위해 폴란드
국기를 완장 두른 모습이 보입니다.)
한편 공중에서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과 수투카들이 저항군 거점에 폭격을 가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군의 만행이 그 도를 넘어서자 애초에 저항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시민들까지도 가담하게 되었으며 1년 전에 초토화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던 유태인 게토가 저항군에게 해방되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도 저항군에 가담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수제 무기들(수제 수류탄, 화염 방사기...)을 만들었고 심지어 일반 승용차나 화물차에 철판을 붙혀서 장갑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방송시설을 점령했던 저항군은 8월 8일부터 자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고 국민들에게 독일군을 폴란드에서 몰아낼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바르샤바 봉기 중에 저항군 소녀 간호사, 부디 이 귀여운
소녀는 나치 독일 진압군에게 희생되지 않았기를....)
8월 둘째 주에 접어들자 독일군의 진압작전은 본격화됩니다. 미치광이 친위대 부대들의 만행이 반복되던 상황에서 제19기갑사단이 도착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으로 전환되게 됩니다. 하지만 저항군은 부족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저항하여 독일군 탱크와 장갑차 9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런 저항에 당황한 독일군은 자신들의 탱크와 장갑차에 바르샤바 시민들을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악랄한 행위를 서슴치 않습니다.
(폴란드 봉기 기간 중에 저항군에 가담한 소녀들)
어차피 큰 차이가 나는 전력으로 인해서 결국 저항군은 밀리게 되었고 정수 시설을 독일군에게 빼앗기게 되자 당장 급수가 끊겨버리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항군은 시내에 우물을 파서 급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9월까지 무려 90개의 우물들이 파졌습니다.
8월 14일에 시 외곽 지역에서는 이미 저항군이 물러나게 되었고 시 중심으로 밀리게 된 저항군들은 건물 속에 들어가서 숨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군의 엄청난 화력의 자주포와 탱크의 포격은 저항군이 숨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파괴해가면서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화염방사기를 동원하여 건물 속을 불지옥으로 만들어서 숨어있던 저항군들을 소탕해갔습니다. 특히 저항군의 야전병원이 점령되자 독일군은 화염방사기로 미쳐 대피하지 못했던 저항군 환자들과 의료진들을 산채로 화형을 시켜 버립니다. 시 외곽 구시가지 전투 중에 저항군은 무려 7,500명이 학살되었고 독일군 역시 무려 3,9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폴란드 저항군들은 영국군에게서 지원받은 무기들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소련의 훼방으로
대규모 무기 지원은 어려웠지만 그 이전부터 레지스탕스들에게는 영국군 무기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8월 17일에 독일군의 바르샤바 초토화 작전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600m 칼 마우저 자주 박격포의 위력은 단 한발에 건물 한채를 돌더미로 만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고, 그보다 약하지만 150mm Strumpanzer 자주포 역시 저항군들게는 지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로켓 발사기를 장착한 하노마그 장갑차도 투입되었습니다.
이렇게 초강수를 두어 진압을 서둘렀던 나치 독일의 의중에는 바르샤바 코 앞에서 공격을 멈춘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언제 다시 공세를 재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무려 2개 친위대 사단과 1개 기갑사단이 전방에 소련군도 아니고 후방에서 폴란드 일반 시민들과 레지스탕스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빠져나와 있다는 것도 독일군 수뇌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진압군 사령관 바하 중장은 폴란드 적심자와 연락하여 9월 9일과 10일 양일간 시간을 줄테니 바르샤바 시내 중심에서 저항군과 함께 있는 무고한 시민들은 도시를 떠나라는 포고를 내리게 됩니다. 이를 따라서 바르샤바를 떠나는 수천명의 시민들에게는 독일군이 총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저항군에게도 항복을 촉구하지만 그들은 항복을 거부합니다.
9월 11일 바르샤바에 근접해서 공격을 중지했던 소련군 부대에 속해있던 폴란드1군이 더이상 동포들의 위기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바르샤뱌 외곽에 위치한 독일 기갑사단과 전투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련군 본진도 아니고 폴란드 출신 병사들만으로 부대가 친위대 최정예 기갑사단과 상대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의 포위를 뚫고 바르샤바 시내 진입을 실패한 폴란드1군은 야심한 밤에 수일에 걸쳐서 수천의 병력을 바르샤바 시내에 침투시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조차 얼마 안되어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대부분의 폴란드1군 병력들을 섬멸되고 극히 소수의 병력만이 시내에 저항군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샤바 저항군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 방사기를 사용하는 독일군 진압부대)
이때쯤 소련은 서부 연합국들에게 생색을 내면서 자신들의 공항을 사용할 것을 허용했는데 그때는 이미 바르샤바 저항군들이 전멸 직전에 상황이었으므로 시내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군에게 넘어간 뒤였습니다. 그런 탓에 미공군 폭격기 110대가 9월 18일 저항군을 위한 보급품을 투하했지만 고작 20%만이 저항군에 수중에 도착했습니다. 소련도 공중 지원을 해주겠다고 떠벌리면서 보급 물자랍시고 낙하시켰지만 낙하산도 안달고 물자를 떨어뜨려서 지원된 총기들은 모두 못쓰게 되어버렸고, 총탄들도 사방에 흩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8월 1일에 시작한 봉기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무려 두달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부족한 물자와 무기 지원에도 불구하고 거의 기적과 같이 버티고 있었던 그들은 승부를 떠나서 장렬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9월 27일 3일간의 전투 끝에 독일군은 모토코프 지역의 야전병원을 점령하면서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저항군 환자들과 의료진 전원을 처형합니다. 간신히 그곳에서 탈출했던 150명의 저항군 병사들 역시 생포되어 총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세를 펼치면서 바하 사령관은 항복하면 제네바협정에 의거하여 처우를 해주겠다고 저항군에게 방송합니다. 이미 더 이상 저항을 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폴란드 저항군은 결국 28일 드디어 항복에 대한 양자간 협상을 시작하게 되는데 29일에는 촐리보르츠가 함락되면서 저항군은 절벽끝으로 몰리게 됩니다.
10월 2일 부터는 모든 교전이 중지되고 최종 협의에 들어가는데 이러는 가운데 저항군은 항복의 준비를 합니다. 바로 전사자들의 신분증등을 소련군소속인 폴란드1군 병사들에게 맡기고 탈출시켜서 그들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게 하고 함께 싸웠던 유태인들에게 위조신분증을 만들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5일 조건부로 완전히 항복을 합니다
항복조건은
1. 항복한 저항군은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로서 대우할 것
2. 포로들의 관리는 친위대(SS)가 아닌 독일 육군에서 담당할 것
3. 비전투원인 일반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
이었습니다.
(치욕의 순간 - 폴란드 저항군 사령관 코모르프스키 장군(좌)와 진압군 사령관 바흐 준장이
저항군의 항복 후 악수를 하고 있습니다. 고개 숙인 고모르프스키 장군의 표정과 웃음 띈
바흐 준장의 표정이 대조적입니다. 전후에 코모르프스키 장군은 공산주의 위성국가가 된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한 후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반면 바흐 준장은 전후에
전범 재판에 회부된 후에 1972년 뮨헨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 저항군들은 군복만 벗으면 일반 시민과 다를바없었지만 저항군들은 스스로 포로가 되는 길을 택하고. 자기 스스로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음을 당당히 밝혔는데 그렇게 포로가 된 시민군은 15,000명에 달했습니다. 시내에서 나온 일반시민 33~55만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그중 9만명은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일부 봉기군 병사들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채 하수도에서 전투를 벌이다 화염방사기를 동원한 독일군의 소탕작전에 하나 둘씩 사라져갔습니다.
(하수구에서 끌려 나오는 폴란드 저항군 병사)
그리고 독일군은 전 도시에서 시민들을 소개시킨뒤 모든 건물을 돌면서 남김없이 약탈하고 약탈이 끝나자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바르샤바 시내에 폭약을 설치하여 폭파시켜 버렸는데 당시 약탈물은 화차 3만 3천대 분량에 달했습니다.
다음해 1월 7일 폴란드1군이 바르샤바에 진입했을때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파괴된 아무 생명도 없는 돌더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희생된 시민은 총 20만에 달했으며 이렇게 폴란드의 저항세력은 뿌리뽑히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44년 폴란드 봉기의 전말입니다. 1년 전에 유태인 봉기와 마찬가지로 바르샤바 시민들의 저항 역시 비열한 나치 독일과 스탈린 공산당의 욕심으로 무려 20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희생하였고, 전후에는 냉전 기간 내내 소련의 무력한 위성국가들 중에 하나로써 치욕적인 역사를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회는 바로 아카데미 과학 "헤처" 키트의 배경이 되는 1945년 체코 프라하 봉기 사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댓글 욕심많은 스탈린 참 나쁜 넘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 헤처 이야기도 무척 기대 됩니다~~~~ ^^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분들 땜에 이렇게 글을 올리곤 합니다.
어이쿠 우리형님 정모로 혼란한 와중에
또 글 쓰셨네
역시 스펙타클합니다!!
감사!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데... 더 이상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준만님, 역사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이번에도 일찍 읽고 댓글 늦습니다.^^'
정모 가면서 휴게소에서 읽었는데 댓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읽을 거리가 많은 글을 올려주셨어요. *^^*
정말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던 사진 하나 첨부합니다.
1970년 12월에 폴란드를 찾아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의 사진이지요.
잘못했다는 사과를 몇 번이라도 계속 할 수 있는 독일인들입니다.
일본놈들허고 차이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할 생각입니다만. . .ㅎㅎㅎㅎ
정주행완료. 정말 재미있게 글 잘 읽었습니다. 옛날 취미가에서 이대영선생님의 2차대전사를 재미있게 읽은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걸작입니다.
특히 키트와 연관시킨 아이디어는 정말 최고입니다. 구매욕이 급상승하네요. 사업도 잘되시고(너무 잘되시면 바쁘셔서 글 못 올리시려나..ㅎㅎ) 건강챙기시고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쥔장님 포함하여 회원분들과 같이 자리할 수 있는 날이 꼭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