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노벨상에 대한 떫떠름한 비판들을 나는 옹호한다
한강의 노벨상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논란은 5.18과 패미를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제기된다. 이들 불편한 시선을 속 좁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다. 요는 "박수부터 요란하게 치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소위 <무엇무엇하는 국제적 상>이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일면 좋은 현상이다. 노벨상이 다만 하나의 부풀려진 권위를 상징한다면 이 역시 곤란하다.
김대중의 평화상은 얼마나 위선적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에 가까웠나. 한강의 수상을 계기로 <상>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 좀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도 다행이다.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소설들이 주는 "작은 불편한 심사에서 아주 잘못된 사실들"까지를 무턱대고 덮어두거나 무조건적 지지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70년대적이고 대중추수적인가.
한강의 글들이 국제 논단의 평론가들에게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을지 모르지만 한국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특수한 영역에 속한 작품처럼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고 감출 이유가 없다.
서정적 문장을 강조하지만 문장은 문체, 문채(빛깔)와 함께 언어에 내재한 것이어서 손쉽게 한글의 국제화 운운하는 것은 유치한 말장난일 수도 있다. 노벨상 위원들은 번역문을 읽는 것이지 한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작은 시비 거리에 불과하다.
페미는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는 예민한 주제다. 보편적 주제가 아니어서 우리는 패미로부터 어떤 형태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계급투쟁적 운동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남편과 아버지와 형부라는 남자들의 육식 문화에 포위되어 질식 상태인 여자라는 형식은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추한 것도 미학적일 수 있다는 명제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한국인들은 집단적으로 가족을 거부하고, 생명을 거부하는 일대 시대적 요구 과제를 작가 한강과 함께 수행 중인 나라다. 최악의 저출생 국가다. 독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자들에게 경외심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국가가 문화를 장악한 사회주의나 나치 예술에서 가능한 일이다.
독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심하게 가부장적이다. 소년을 내세운 광주5.18 줄거리는 불가피하게 편향적이다. 그 편향성은 광주 5.18민주화 운동을 북한 광수 600명이 내려와 해치우고 안개처럼 사라졌다는 소위 광수설 만큼이나 오류에 가득찬 것이다.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노벨상이라는 소위 '기름 부은 작품'이 되었다고 해서 이 문제가 달리 인식,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동호라는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이미 그 소설은 거짓말을 나레이션하는 허구의 작품이다.
광주 시민은 진공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안으로 뛰어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그렇듯이 정치에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광주는 소년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눈? 아니다. 한강의 눈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또 하나의 거짓이다. 실제 모델이 있다고 하지만 어른들의 집단적 투사다.
바로 그 때문에 광주는 보수와 광주 모두에 의해 왜곡된다. 보수는 광수를 거짓말하고 광주는 준비된 반발적 폭력을 모두 지워낸다. 보수가 최근 들어 전두환을 미화하는데 이르면 기가 막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광주는 날이 갈수록 어린아이를 가장한다. 곧 한강의 예를 따라 주인공 동호의 작은 동상이 세워질 지 모른다. 국가 폭력과 함께 시민의 예비된 저항도 조사되어야 한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군바리는 지금도 군바리다.
영어로는 '이별하지 않는다/we do not part'로 번역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더욱 그렇다. 이 소설 역시 역사적 사실을 다룬 것이어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적 사실은 정치에 의해 왜곡된다. 당연히 비판과 검증의 대상이다. 소설적 상상력이 거꾸로 사실을 규정할 수는 없다.
나는 한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축하도 하지 못하는 속 좁은 인간 부류"로 규정하려는 일부의 시도야말로 지극히 편향된 정치적 간사함이라고 본다. 더구나 노벨상이라는 의심스러운 권위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다.
소설에 침묵하고 노벨상 마케팅에 편승하는 조선일보 등 주류 언론의 구역질 나는 위선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4.3의 폭력성은 국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노벨상위원회는 무도하게도 4.3을 제멋대로 규정하는 우를 범한다. 수만명이라는 희생자의 숫자는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자들이 거론할 수 없다. 국가의 성립을 저지하려는 폭도들의 반란이었다. 그게 4.3의 본질이다.
희생자라는 언어는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모든 사망자가 다 희생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원폭 생존자들은 누구인가. 동경 공습의 사망자들은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원폭 덕분에 좀더 일찍 해방된 조선인들은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조선의 왕공족 이우는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즉사했다. 며칠후 8월15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장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그의 일본인 부관은 이우가 죽은 다음날 권총 자살했다.
일본은 원폭 피해자가 아니라 2차 대전의 피해자요 희생자가 되었다. 2차 대전은 민족들이 국가를 부르짖으며 벌인 전쟁이었다. 이 민족들의 피 흘리는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 하얀 희생양이 바로 일본이었다고 지금 일본인들, 아니 원폭 피해 집단은 쓰고 있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했다.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그 일본에 노벨상을 안기며 피해자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있다. 마술이다. 노벨 위원회의 마술이다. jkj
정규재
첫댓글 축하해줄일인건 축하해주는게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