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인삼의 유래
인삼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신약영초(神藥靈草)로서 자연 약종(藥種)의 왕좌를 지키며 전해 내려왔다.
인삼이 몸에 좋은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2000년전인 중국의 전한원제시대(前漢元帝時代, BC 48∼33)의
문헌인 「급취장(急就章)」에서 처음 인삼의「蔘」字가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중국의 후한(AD 196∼219)의 문헌 장중경(張仲景)의「상한론(傷寒論)」에서는 한방약 으로서의 인삼처방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한방의서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신농 본초경(神農本草徑)」에 이르러서는 인삼의 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응용 등 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고 야생인삼의 자생지 등 인삼에 대한 유래도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삼은 공물(貢物)이나 교역으로 외국에 보낸 것이 서기 513년 백제 25대 무령왕 12년 4월 양(梁)의 무제(武帝)에 보낸 것이 최초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삼은 1400여년전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의 저서에 "가지는 3개이고 잎은 5엽으로 음지에서 자라며 피나무 숲에서 캘 수 있다"고 하였다. 자연생 생태를 표현한 것이 현재 가삼(家蔘)과 약성은 물론 식물형태학상으로 같은 식물임을 증명하였 다고 볼 수 있다.
후한의 안제(安帝)시대 허진의 '설문해학(設文解學)'에는 인삼을 '약초출상당(藥草出上黨)'이라 하여 중국의
태행산맥을 중심으로 산악 지대에서 채취한 '상당삼'의 품질 이 우수하였음을 말하였으나 무절제한 채삼으로
근절되었다고 한다.
조선도 '세종실록'에 정종 14년 8월에 양산 군수 남학문(南鶴聞)의 상소문중에 "영남은 고래로 산삼의 향(鄕)이라 칭하지만 점차 산삼이 귀하게되어 가종풍(家種風)을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운운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인삼 재배가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인삼의 신비시(神秘視)되고 응용이 확대됨으로써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야생인 천연산의 채취만으로는 수요를 충족 시킬 수 없게 되자 官에 의한 주구(誅求)가 심하게 되어 민폐가 되기 시작된 것은 중 국이나 한국이 매 한가 지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저자 이시진(李時珍)이 인삼을 논한 가운데 "民以人蔘 爲地方害不復采取" 라는 구절이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사정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삼의 부족이 고려말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국 의 요구와 왕실 이용을 위한 주구(誅求)가 혹심하여 할당량의 조변(調辨)이 어렵게 된 인삼 산지 지방민들이 도망쳐 이향(離鄕)하는 사태가 생겼던 것이다. 중국은 남획(濫獲)으로 자연삼이 거의 절멸(絶滅)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한반도의 덕택으로 인삼 수급 (需給)이 지탱되었으니 공급(供給)하는 우리나라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인삼을 확보 하여야 하는 필요성에 쫓기어 드디어 인삼 재배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음은 결과적으로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도 당시에 '石田春而種人蔘'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여 이미 그때 인삼의 재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설(說)도 있으나 이 시(詩)의 출처도 불분명하여 무어라 단언할 수 없다. 송(宋)대의 소식(蘇軾, 소동파)의 시에(원문은 '小圃人蔘') '移蔘北窓地'라는 구절이 있어 인삼 재배를 확인한 셈이나 그 삼이 과연 무슨 종류인지 분명치 않다.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인삼 재배가 한국에서 실시되고 있음을 시사( 示唆)하는 대목이 있다.
(삼 재배를 확인한 셈이나 그 삼이 과연 무슨 종류인지 분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