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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작품 감상 스크랩 쌍화점 마을에 빨간색 터어키 기와집 신당이 있었다
사나이 추천 0 조회 43 10.03.31 12: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쌍화점 마을에  빨간색 터어키 기와집 신당이 있었다

 

 입암산 송군비장군 7차 몽고군관  회회아비  포로수용소  운주산 신당터 기와 사용  

충열왕의 허씨왕비,  태인시씨무비,  쌍화점, 대장금이  살았던  악학괘범 노래   고향땅

 쌍화점은  몽고 위그르족이  정읍시 산내면에서 정읍사곡으로 노래 유자광이 배워 악학괘범을 지어

 http://blog.daum.net/nongaak/7090521 삼장 .사룡. 쌍화점 굴찾기  보충기사  클릭

http://blog.daum.net/nongaak/7090482 쌍화점 노래 어디서 생겼나

쌍화점 회회아비 터키 빨간색 기와    터키 무늬 고려시대  정읍 운주산  송인의 신당

한국에 유일한 유럽풍 기와가 원나라 터어키 포로들이 17년 살면서  
 

고려가요 쌍화점 노래에 회회아비 터키 위그르족 사람이 등장한다

회회(回回) 는 위구르족의 한자 이름이다

회회아비 즉 위구르인들은 당시 몽골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엄청난 권한을 맡겼다. ...

쌍화점에 쌍화병을 사러 갔더니 / 회회아비(몽고인, 혹은 아랍인)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에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번지면(소문나면) / 조그만 어린


그러나  터키 그에 대한 유물이  터어키와 유럽에서 사용했던 빨간 기와집이  정읍시 산내면 운주산 여산송씨  송인의 사당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송인은 고려사 열전 간신편에 소개되어 있는데 최충헌 3대를  치우고 원나라 황족과 혼인한 정읍 태산군 호족이다

태산은 허씨 족 이자겸의 땅인데 원나라에 망한  송나라에서 귀족이 망명하여 이자겸 허씨의 사병으로 살다가  몽고의 7차 침입에 송군비 장군이 격파 몽고귀족 관리를 생포 17년을

이곳에 수용하고 몽고와 화친하여 여기서 살앗다

그러는 17년 기간에 이곳 처녀 손목을 잡고  겁탈 또는 사랑, 중매결혼한 회회아비 몽고인과 이곳 여인이 고려 궁중 궁녀로 상경하여 삼장, 사룡,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여 고려사에 기록되어 쌍화점으로 남았다

 여기서 산내면과  쌍치면에서 결혼한 회회아비가  원나라 궁중에서 쿠빌라이를 황제로올리는  세력으로 이겨서 고려인이 후에 벼슬을 하기도 했다

위는 유럽의 유적에서보는 빨간기와  풍속과   밑에는 물고기가시 (어골무늬 )고려시대무늬로 제작

 고려 조선초기는  하늘은 검정 그래서 모든 기와가 검정색이였다

 

원나라 기황후 역시 여산송씨 땅 익산 여산사람  태인 허씨 이인로의 인척 미인이였다   

충열왕시대 실력자로 이곳의  태인 호족 송인이 몽고 황족의 싸움에 몽고에서 죽엇다

그 시대 중앙아시아계 사람들이 원나라 조정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크게  진출했다.

그 송인을 살아서 돌아오기를 비는 산을 운주산(원나라 산이름)으로 부르며 산정상 바위 절벽에 빨간색 기와집을  신신각 건물로 지어 신봉하였다

송인의 호족 가병으로 위그르족 사람이 그들 위그르족 신앙 풍속으로 그들 세력 빨간기와로  ‘송인’을 기원하는  기와로 보인다

쌍화점은 송도 개성에서 노래가 아니고 산내면과 쌍치면 국사봉 삼장사가 있는 곳에 빨간기와가 출토되엇다

무느는 고ㄹ시대 어골문인데 색깔은 빨강색으로 로마와 독일의 성터 유적지를 연상하게 빨간기와가 깔려있고 조선시대 여산송씨 후손들이 검정기와로 기와를 갈았으나  태종왕이 이성계 부왕의 친밀함을 이유로 태산군을 페지하고 태인으로 이전했다

 이곳 산신각도 소실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불만으로 가득찬 호족 송씨 세력과 힘을 합하여 보려고  수양대군이 이곳에 와서 정읍사  가야금도 배우고  아들 예종을 낳아서 예종의 태실탑이 모악산에 있다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이곳 호족 친구 송인수의 딸을 단종왕비로 누이를 동생 임영대군 부인으로 결혼시켰다

여기서 유자광의 부친 유규, 유자광의 고모부 홍령 신숙주 정인지등이  단종내각으로 수양대군 정권이 되었다

 

연산군 시대 고금소총을 지은  송세림,  그리고 유자광이 대장금을  연산군 10년에 산내면  장금산 서낭당 무녀  고향사람  대장금을  입궁하여 이곳사람들이 궁중음악 수라간 음식을  담당했다 


처용은 아라비아 상인이라고 할수 있죠. 그 밖으로는 처용은 신라의 기후가 좋아서 신라로 귀화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기인 13∼14세기 무렵. 당시 원(元)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조정에는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의 위구르 무슬림들로 수도 개성에 이슬람 성원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3∼14세기 고려시대. 당시 중국의 원나라 조정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중앙아시아계 사람들이 고려 조정에도 진출했다. 이행래 이맘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 위구르인인 이들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고유 의상과 언어,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와 이슬람 만남의 역사적 발자취

신라시대

 -삼국사기, 처용 일행을 동해안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 처용가의 주인공이 아랍인이라는 설이 있음 -신라 고분에서 아랍의 유리기구, 비파, 구슬, 단검, 토용 등이 발굴

고려시대

 -고려사, 1024년, 1025년, 1040년에 아랍 상인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 등의 물건을 갖고 개경을 방문했다고 기록-고려 속요 ‘쌍화점’에 이슬람 사람이라고 했다 ‘상화떡집 회회아비’라는 표현으로 그 근본이 정읍시 산내면 운주산 빨간 기와로 유물이  등장하여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유럽  고적 유적지 같은  운주산  송인의 사당  빨간 기와

쌍화점  회회아비는 이런 기와집을 짓고  그 마을에  조선시대   유자광  홍길동   대장금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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