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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Ⅰ.악장 1.악장의 형성 2.악장의 개념과 명칭 3.악장의 장르, 형태적 특징과 음악적 특징 4.악장의 형식과 내용 5.악장의 담당층
Ⅱ. 경기체가 1. 경기체가의 생성과 개념 2. 경기체가의 형태 3. 경기체가의 작자와 내용
Ⅲ. 가사 1.시대구분 2.가사의 개념 3.가사의 기원에 관한 설 4.가사의 특징 5.가사의 갈래 구분 6.가사의 내용 7.가사의 형식
Ⅳ.참고자료 |
Ⅰ.악장
1.악장의 형성
조선 초기 악장 관계 기록에 ‘악부’라는 명칭이 간혹 등장한다. 원래 악관이 익히는 악장을 악부라 했는데 악장이란 국가적 차원의 교사지례를 제정하면서 크게 확충된 공식적인 노랫말 혹은 그 양식이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적인 음악으로 채택되든 그렇지 않든 개인 진상의 노래도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풍요도 창작 동기나 채집 및 사용 여하에 따라 악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시가 장르 명으로서의 악부는 한나라 무제 때 악부의 관제를 개혁하여 널리 사방의 풍요를 채집하고 새로이 시부를 지었으므로 악부에 채집된 시를 ‘악부’로 지칭한 데서 출발한다. 당시 시부를 새로 짓는 사람들은 사마상여 등이고, 협률도위 이연년 등은 그 시부를 율려와 8음에 맞추는 일을 했다. 말하자면 단순히 음영․구송하던 시와 달리 악부는 음악에 맞추어 가창되던 노래장르의 한 종류였던 것이다. 이 때의 악부는 고시의 한 체로 변한 후대의 의고악부(擬古樂府)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이제현의 「익재난고」 <소악부>를 필두로 상당수 문인들의 문집에 ‘가(歌), 행(行), 음(吟), 영(詠), 곡(曲)’ 등 악부의 명제를 딴 시들이 많이 있고, 조선시대에도 김종직, 심관세, 신광수, 신위, 이유원 등을 비롯한 많은 작자들의 악부가 남아있다.
악장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악이다. 그런데 조선의 음악은 고려조의 음악과 연계시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의 음악이 실질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계기는 송나라로부터 대성악을 수입,1) 태묘에 제향을 올리면서 신제구실등가악장을 연주하던 예종 11년으로 잡을 수 있다.
고려조는 삼국 말년의 음악을 답습했고, 송나라의 교방악을 도입하여 썼다. 조선 초에 그것들을 그대로 인습할 수는 없어 양부의 음악 중 그 성음이 약간이라도 바른 것을 취하고 풍아의 시를 참고로 하여 조회․연향의 악을 정했다고 한다. 세종조에 이르면 음악과 함께 악장의 정비가 활발히 추진되는데, 악장의 개념이나 존재의의 혹은 기존 악장에 대한 재평가 등 악장이나 그에 대한 논의의 폭이 넓어지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여기서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그 이전에 왕성하게 창작되던 개인 제작의 송가들을 악장으로 인식한 것과 함께 정격 이외의 악장들을 수집하여 관습도감의 향약 악장에 포함시키는 등 그 범위가 크게 확장된 사실을 지적한 말이다. 변격의 작품들이 대폭 악장의 범주 안으로 포용됨으로써 정격과 변격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용비어천가>와 같은 조선조 특유의 악장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데서도 이 사실은 입증된다. 세종 대에 제례악장들도 새로이 창간되긴 했지만, 그 형태나 내용면에서 기존의 정격 악장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2.악장의 개념과 명칭
1)악장의 개념
본래 고려와 조선의 궁중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인 제향(祭享)이나 연향(宴享)이 열릴 때 쓰였던 노래 가사를 포괄하나, 한국문학에서는 조선 왕조 초기의 특정한 시가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볼 때 악장은 노래로 부른 시이므로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악장은 고려속요·경기체가·시경·초사체 등의 양식이 두루 나타나는 작품의 다양성으로 인해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악장은 조선 초기 건국창업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통치 질서를 확립할 목적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왕업을 기리는 송도(頌禱)·송축(頌祝)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지닌다는 점에서 범주화가 가능하다. 고려 조정에서도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역대 제왕을 칭송하는 악장을 갖추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가 창건되면서 예악의 정비를 통해 통치이념을 확립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건국초의 분위기는 악장을 제정하는 데 특히 기여했다.
악장의 기본적인 성격은 음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악장은 황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의 공식행사에 쓰인 음악들 중 노래로 불려진 것을 가리킨다. 악장의 범주를 이렇게 설정해 놓고 보면 이것은 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 쪽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문학에서 말하는 악장은 첫째로 궁중에서 사용된 음악 중에서 말로 된 것, 즉 노래로 불려진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단순히 악기로 연주된 궁중음악 같은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악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둘째로 우리의 문학사에서 볼 때 궁중에서 사용된 노래 중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 주는 것은 조선왕조 초기에 지어진 것이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선초에 지어진 노래 중에서 궁중의 음악으로 사용된 것을 대상으로 한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이 건국된 이후 초기인 15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궁중의 노래를 지칭하는 것이 문학에서 말하는 악장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국가의 창업과 번영을 찬양하는 것이라든가, 왕실의 안녕을 빌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 하는 것, 그리고 특별한 이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어진 것 등을 대상으로 한다. 조선 이전의 악장도 다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완전한 것이 없는 만큼 문학연구에서는 이같이 악장의 범주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것을 가지고 악장의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악장은 조선조 초기인 15세기에 주로 지어진 궁중의 음악으로서 왕실을 찬양하거나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서 이루어진 노래를 말한다.” 그리고 악장을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자면 신(神)과 성인(聖人)에게 강송을 올리는 글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악장은 신덕과 성덕을 찬양하는 글을 말한다. 즉, 자연을 지배하는 신과 나라를 다스리는 성인에게 바치는 노래를 말한다.
2)악장의 명칭
악장이라는 명칭은 아직 그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되고 있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악장이라는 상위개념에 속요․경기체가․찬불가․시경시․송사의 하위 장르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혹은 「악장가사」, 「악학궤범」,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잡다한 모든 양식을 다 포괄하는 개념2)으로도 논의되고 있다.
악장이라는 명칭에 대한 또 다른 논의는 아송문학과 악장으로 좁혀진다.
아송문학(雅頌文學)은 옛날의 노래를 풍․아․송 (風 雅 頌)으로 나누던 것에 근거를 두고 국가와 관계되는 일들을 노래로 한 것이란 점에 초점을 맞춘 명칭이다.
악장은 음악적인 명칭이기는 하지만 가장 폭 넓게 쓰이는 명칭이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반드시 음악만을 지칭한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많이 쓰이는 명칭이다. 특히 악장 이외의 명칭은 문학적인 성격을 강조했다는 강점은 있으나 내용적인 특징만으로 문학작품의 명칭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 반면, 악장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원래 궁중에서 사용된 음악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궁중의 것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장’이라는 말은 의미단락의 끊어짐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 속에 문학적인 의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은 ‘밝히다’는 의미를 가지는 글자로써 인간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경계를 지어서 명확히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악장은 궁중에서 사용된 음악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언어의 의미. 즉, 가사까지도 지칭하는 명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악장의 장르, 형태적 특징과 음악적 특징
1)악장의 장르, 형태적 특징
정격악장은 4언(4구 혹은 8구)으로 되어 있다지만 그것은 한시의 형태적 갈래 중 하나일 뿐이다.3) 여기에 변격 악장들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현태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규범적 장르론만으로 조선조 악장을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개의 작품들에 표면화되는 성향은 교술이고, 서정이나 서사적 요소들은 그 교술적 성향의 장식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의 교술은 ‘가송 대상의 덕망과 업적 찬양 → 삼대지치의 재현 및 왕조 영속의 당위성 선양’이라는 정치적 목적의식을 대전제로 한데서 구현된 장르적 성향이며, 이것은 악장이면 어느 작품이나 같은 양상을 보인다. 악장의 형태보다도 그것이 사용된 전례적 상황이 여타 장르들과 그것을 구분해주는 유일한 변별요소이다. 이 전례적 상황이란 ‘조선 초기’라는 제한된 시간대와 그 노래가 사용되는 실제적 국면을 전제로 하는 관습적 상황이다.
그리고 ‘악장’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각종 악무와 같은 종합 예술의 무대에서 음악․무용과 함께 가창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악장이나 악부 등의 용어들에 사용된 ‘악’은 바로 노랫말을 포함한 음악이나 악무의 종합적 측면을 지시하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었다.
형태적 측면에서 선초의 악장은 고려시가와 본격 조선시가를 연결하는 과도기적 의의를 지닌다. 선초 이후의 악장들은 일반 시가장르와 병행하면서 서로 얼마간의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악장이나 그와 유사한 창작상황을 지닌 노래들이 앞 뒤 시가장르들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경우는 조선조 이전에도 더러 있었는데 신라 유리와 5년의 <도솔가>나 고려 예종 9년의 <구실등가악장> 등은 모두 제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노래로서, 각각 나름대로 시대적 특질을 반영한 경우들이다.
2)악장의 음악적 특징
궁중에서 연행되는 송축(頌祝)의 뜻을 담은 음악에 대한 총칭인 악장의 종류는 그 용도에 따라 조회(朝會)·종묘(宗廟)·사직(社稷)·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성황(山川城隍)·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문선왕석전(文宣王釋奠)·둑제(纛祭)·문소전(文昭殿) 등과 기타 궁중행사에 부르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작품을 살펴보면 고려의 악장으로 태묘(太廟) 악장 외에 몇 편이 ≪고려사≫ 악지에 보이나 사설만 있고 악곡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의 악장으로 ≪세종실록≫ 권136에 보이는 아악보 중 26개의 황종궁조(黃鐘宮調)에는 악곡과 가사가 함께 전하는데 자구(字句)는 불규칙적이다. 또, 같은 책 권137에는 ≪대성악보 大晟樂譜≫의 악장이 전하는데 4자 1구의 8구로서 규칙적인 1자 1음의 음악으로 16궁(宮)이 보인다. 같은 책 권138·139에는 〈정대업 定大業〉·〈보태평 保太平〉·〈발상 發祥〉 등의 악장과 곡보가 1행 32정간(井間) 악보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들은 1자 1음식에서 탈피하여 1자 여러 음의 선율적 방법이 주로 쓰였음이 주목된다. 가사도 3·4·5언 등이며, 구도 10·12·18·24구 등으로 확대되어 자유로운 면을 보인다.
역시 ≪세종실록≫ 권140∼146에는 〈봉래의 鳳來儀〉·〈여민락 與民樂〉·〈치화평 致和平〉·〈취풍형 醉豊亨〉·〈봉황음〉·〈만전춘 滿殿春〉 등의 악장이 곡보 위에 국한문 혼용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순한문악장보다 음악적으로 더 선율적이며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같은 책 권147에는 사직악장·종묘악장을 비롯한 각종 악장이 있으나 가사만 보인다.
그리고 ≪세종실록≫ 악보 권48에는 새로 지은 원구 악장과 악보가 전하고, 또 ≪신제략정악보 新製略定樂譜≫에 종묘제례악의 악장과 악보가 1행 16정간보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 때 만들어져 세조 때 개작된 현존하는 유일의 종묘제례악장이다. 성종 때의 ≪악학궤범≫ 권2에는 아악부(雅樂部) 제악(祭樂)과 속악부(俗樂部) 등의 가사만 보이며, ≪대악후보 大樂後譜≫와 ≪속악원보 俗樂源譜≫에도 많은 악장이 곡보와 함께 전한다.
현존하는 대표적 악장인 종묘제례악장의 음악적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각기 다른 23개의 가사에 곡은 22곡이다. 선율 진행에 있어서는 합주악기(관악기·현악기·타악기) 선율과 노래(악장)의 선율이 서로 다르고 변화가 심하다. 즉, 합주 선율에 대하여 노래는 2·3·4·5·6도 등의 도수로 어떤 중심음의 앞이나 뒤에서 장식적·대위적으로 다양화시켜 진행한 다음 동음으로 진행한다. 장2도를 의식적으로 첫박이나 중간·끝에서 부딪히게 한다.
이응(ㅇ)발음을 어금니를 물어서 소리내며 끝자음의 발음을 분리하여 뒤로 붙이되, 막히는 자음은 음시가 맨 끝에 둔다. 사설의 발음이 끊어지거나 뻗기에 곤란할 경우에는 ‘애’로 발음한다. 자수도 3·4·5언 등 일정하지 않으며 구수도 곡에 따라 길이가 다르다. 노래 중 모음은 끝을 길게 끌어 흘려 내리거나 평으로 뻗으며, 고성이나 저성에서의 창법이 동일하게 통목으로 부른다. 음계는 〈정대업〉·〈보태평〉의 음계 출현음을 넘나들지 않는다.
한편, 음악만 전해오던 문묘제례악장도 1980년부터 옛 문헌인 ≪반궁예악서 禿宮禮樂書≫·≪대성악보≫ 악서(樂書) 등에 준하여 복원해서 부르고 있다.
4.악장의 형식과 내용
악장은 음악적 성격에 따라 아악·당악·향악 등으로 나뉘며 제향·연향 등 행사의 성격에 따라서도 그 형태가 다양하다. 언어 표기의 형식에 따르면 국문악장과 한문악장, 그리고 한시에 현토(懸吐)를 한 현토악장으로 대별된다.
작품의 내용은 고려 후기의 혼란과 모순을 극복하고 새 왕조의 건설을 이룩한 창업주나 왕업을 찬양하고, 그들의 성덕을 기리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그 밖에 새 왕조의 문물제도나 도읍을 찬양하고 과시하며 태평성대와 임금의 은혜를 기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에 맞는 표현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문체에 있어서는 문어체적 성격을 지향하며, 시적 정조(詩的情調)에 있어서는 장중함과 외경스러움을 짙게 드러낸다.
또 기존양식의 수용에 있어서도 근엄한 한시양식이나 찬양하고 과시하기에 적절한 경기체가양식을 집중적으로 선택하였다. 혹 속요양식을 택하더라도 그 후렴구를 경기체가의 그것과 혼합하든가(감탄사 ‘偉∼’로 시작되는 후렴양식), 아예 삭제하여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표현어법에 있어서도 송도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국문악장
①형식
국문악장은 한문악장에 비해 작품수가 훨씬 적지만 앞 시기의 고려 속요의 형식을 수용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드러내어 기존 장르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 중 〈신도가 新都歌〉나 〈불우헌가 不憂軒歌〉는 단련형식(單聯形式)이다. 그러나, 〈신도형승곡 新都形勝曲〉·〈도인송도곡 都人頌禱曲〉·〈유림가 儒林歌〉·〈감군은〉 등은 10장 이내의 연장형식과 일정한 수의 행을 바탕으로 이에 후렴구를 덧붙여 연을 구성하는 분절형식으로 되어 있어 앞 시대의 속요 장르를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율격면에서는 속요의 3음보격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
또 후기의 국문악장인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에 오면 연장형식을 수용하되 100여장을 훨씬 넘는 장편화 현상을 보인다. 분절형식에 있어서도 뒷절이 후렴구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 앞절과 대등한 자격으로 상승함으로써 형식면에서 속요와는 판이한 독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②내용
정도전의 〈신도가 新都歌〉, 정극인의 〈불우헌가 不憂軒歌〉, 하륜의 〈신도형승곡 新都形勝曲〉·〈도인송도곡 都人頌禱曲〉, 작자 미상의 〈유림가 儒林歌〉, 상진의 〈감군은 感君恩〉 등이 있다. 〈신도가〉 는 천도 후 새로운 도읍지에서 나라의 위엄을 기리며 자손 만대의 번영을 기약하는 내용이다. <감군은>은 우리말 노래로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형태를 보인다. 이것들은 단련형식(短聯形式), 10장 이내의 연장형식, 그리고 후렴구를 덧붙인 형식 등으로 되어 있어 고려속요를 수용한 면모를 보인다. 이보다 늦은 시기의 국문악장으로는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이 있는데 100여 장이 넘는 장편형식이다. <용비어천가>는 그 구조가 장(章) 단위로 완결되는 단시(短詩)의 성격을 지니면서 서정적 성격을 버리지 않은 교술시로 악장의 장르 형성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작품이다.
2)한문악장
①형식
한문악장은 악장의 본래 영역으로서 양적으로나 음악적 비중으로 중심위치를 차지한다.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변계량(卞季良)이 대표적 작가이며, 4언구 중심의 시경체와 장단구(長短句) 중심의 초사체가 대표적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형식의 악장보다 우리말 시가인 경기체가나 속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후렴구 형식의 한문악장이 더욱 중요하다. 경기체가의 영향을 받은 〈축성수 祝聖壽〉나 고려속요의 영향을 받은 〈정동방곡 靖東方曲〉·〈천권곡 天眷曲〉·〈응천곡 應天曲〉·〈악장종헌 樂章終獻〉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3언 4구(3·3·3·3)의 한시에 ‘위(偉)∼’라는 특정한 후렴구를 붙인 분절형식과, 여러 연(5장 또는 10장)이 거듭되는 연장형식(聯章形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납씨가〉는 5언4구, 〈정동방곡〉은 3언4구(6언2구), 그리고 〈문덕곡〉은 7언6구이다. 이 세 곡은 원래 한문악장으로 창작되었던 것인데 뒤에 현토악장으로 바뀌었다. 한시의 형식이 두루 쓰였는데 시경체와 초사체에 가깝다. 변계량의 〈천권곡〉·〈응천곡〉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노래로 고려속요의 후렴구 형태를 수용한 면모를 보인다. 〈천권곡〉은 3언4구 5장으로 '위만수무강'이라는 후렴구가 있으며, 〈응천곡〉은 3언4구 10장으로 '하천복록'(荷天福祿)이라는 후렴구가 있다. 〈축성수〉·〈악장종헌〉 역시 임금의 성덕을 기리는 내용인데 3언4구의 한시에 후렴구가 붙어 있다. 특히 〈축성수〉는 경기체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후렴구에 '위영하황은경하여'(偉永荷皇恩景何如)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일련의 한문악장이 경기체가나 속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말 시가의 형식적 원리를 수용한 초기 한문악장은 그 역사적 전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②내용
정도전의 〈정동방곡 靖東方曲〉·〈문덕곡 文德曲〉·〈납씨가 納氏歌〉, 변계량의 〈천권곡 天眷曲〉·〈응천곡 應天曲〉, 예조(禮曹)의 〈축성수 祝聖壽〉·〈악장종헌 樂章終獻〉 등이 이에 해당한다. <납씨가>는 태조가 원나라 나하추(納哈出)의 침공을 물리쳤던 공적을 찬양한 노래이다. 〈정동방곡〉은 동방을 평정한 공적을 기리면서 위화도 회군을 다룬 것으로, '위'(偉)로 시작되는 후렴구가 특이하며 경기체가와 흡사한 면이 있다. 〈정동방곡〉·〈납씨가〉와 같은 작품은 태조의 무덕(武德)을 칭송했기 때문에 〈무덕곡〉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문덕곡〉은 태조가 실행해야 할 정치의 도리를 제시한 점에서 〈무덕곡〉과 대조된다.
3)현토악장
①형식
현토악장은 기존의 한시 작품에 우리말 토를 달아 지은 것이 대부분으로 한문악장과 국문악장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데 작품세계의 독자성보다는 한시를 국문시가화하는 형태적 이행과정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면 〈문덕곡 文德曲〉·〈납씨가 納氏歌〉·〈정동방곡〉은 원래 한문악장으로 지어졌던 것을 뒤에 현토악장으로 바꾼 것이고, 〈횡살문 橫殺門〉은 두보(杜甫)의 칠언절구 〈증화경 贈花卿〉을 현토하여 만든 것이며, 〈관음찬 觀音讚〉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을 현토화한 것이다.
특히 〈경근곡 敬勤曲〉·〈문덕곡〉·〈횡살문〉의 경우 4구나 6구로 된 원사(原詞)에 낙구나 후렴구를 덧붙여 현토악장을 만드는 원리는 우리 시가의 전통적인 분절형식에 근거하고 있어 주목된다. 여하튼 현토악장도 10장 이내의 연장형식과 낙구나 후렴구에 의한 분절형식으로 되어 있음은 다른 악장과 같다.
단, 〈봉황음 鳳凰吟〉과 〈북전 北殿〉은 단련(單聯)으로 된 데다가 칠언시로 꼭 맞아 떨어지지 않는 걸로 보아 처음부터 현토악장으로 창작된 듯하다. 이렇듯 악장의 형식적 원리가 연장형식과 분절형식에 두어져 있음에 착안하여 하나의 장르로서 묶는 중요한 통일성의 근거가 된다는 견해가 나온 바 있다.
현토악장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훈민정음의 창제가 악장의 장르 형성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악장은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에 기록되어 전하며 주요 작품과 내용은 다음의 표와 같다.
형식 |
작품명 |
연 대 |
작 자 |
출 전 |
내용 |
악장체 악장, 신 체 (2절4구체) |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
세종27 |
정인지 권 제 안 지 |
용비어천가 |
조선 창업의 어려움과 그 천명성, 육조의 위업 찬양과 후대 왕에게 勸戒(권계)의 뜻을 일깨움, 125장으로, 영웅 서사시적 성격이 강함 |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
세종29 |
세 종 |
월인천강지곡 |
석보상절의 석가공덕을 보고 지은 석가모니의 찬송가(전3권중 상권 194장만 알려져 있음) | |
속요체 악장 |
신도가(新都歌) |
태조3 |
정도전 |
악장가사 |
태조의 덕과 새 도읍지 한양의 경치를 찬양함 |
유림가(儒林歌) |
세종 |
미상 |
악장가사 |
새왕조의 건국 송축과 유교 이념의 정치 찬양 | |
감군은(感君恩) |
명종1 |
상 진 |
악장가사 |
임금의 성덕과 성은을 찬양함 | |
별곡체 악장 (경기체가체 악장) |
상대별곡(霜臺別曲) |
세종1 |
권 근 |
악장가사 |
사헌부의 생활을 통한 조선의 제도·문물의 왕성함을 찬양함 |
화산별곡(華山別曲) |
세종7 |
변계량 |
세종실록 |
조선의 개국 창업을 찬양함 | |
오륜가 |
세종 |
미상 |
악장가사 |
유교의 근본 사상인 오륜에 대한 송가 | |
연형제곡 |
세종 |
미상 |
악장가사 |
형제의 우애를 기리고 조선의 문물 제도를 찬양 | |
한시체 |
문덕곡(文德曲) |
태조2 |
정도전 |
악학궤범 |
태조의 문덕을 찬양함 |
정동방곡(靖東方曲) |
태조2 |
정도전 |
악학궤범 악장가사 |
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찬양함 | |
납씨가(納氏歌) |
태조2 |
정도전 |
악학궤범 |
태조가 야인을 격파한 武功(무공)을 노래 | |
봉황음(鳳凰吟) |
세종11 |
윤 회 |
악학궤범 |
조선의 문물과 왕가의 축수(祝壽)를 노래 |
5.악장의 담당층
조선조 악장의 범주에는 개인들이 지어 올린 것과 복수의 작가들이 공동으로 지은 것, 예조를 비롯한 국가 기관에서 지어 올린 것, 기존의 민간 가요 등이 포함된다.
악장의 중심 담당층은 15세기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그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간 신흥사대부 가운데 핵심 관료층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다. 이성계의 측근으로 조선왕조 창건에 크게 기여하여 이성계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정도전, 변계량, 권근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쓰러트리고 신왕조를 창건하였다.
정도전은 조선조 악장의 개조(開祖)이며 국문학 장르적 변이 현상을 구체적으로 악장에 반양한 첫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한문악장을 창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당대에 불려지던 시가장르를 과감히 변형시켜 악장에 도입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새로운 장르의 안출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자신이 고려시대의 음악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창업주의 공덕을 칭송한다거나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찬양하는 악장을 제작하면서 기존 지식의 틀을 벗어나기란 어려웠다고 본다.4)
조선조 악장의 개조를 정도전이라 한다면, 정치적 갈등의 와중에서 희생당하여 묻힐 뻔했던 그의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수용하여 새롭게 전개시킨 인물은 변계량이다. 20여년 이상 문병(文柄)을 잡고 국가의 공식 문서 작성이나 예악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하던 그였으므로 정도전이 수립한 악장의 규범을 별 어려움 없이 정착,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권근은 <상대별곡>과 의사(擬似)악장으로 볼 수 있는 <천감>, <화산>, <신묘>, <풍요>, <화악시> 등을 남겼다. 전자는 기존의 경기체가 장르를 모사한 것이면서도 말미에 새로운 형태의 언술을 한 부분을 첨가함으로써 국문학상 장르적 변이의 단서를 보여준 작품이고, 후자들은 각각 『시경』의 <대명>, <면>, <생민>, <청묘> 등 외래적 소원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악장의 담당층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위업이 정당하였으며 한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주지하였고, 또한 그들의 왕권강화를 위해 악장을 제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알리기 위해 만백성이 함께 감상하고 이해하고 즐기며 성군의 위업을 회상하고 추모하자는 취지를 내보였다. 그리하여 악장을 한시형식으로만 읊지 않고 고려속요, 경기체가, 한시체, 한시현토체, 용가월곡체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하고 가창하였다. 특히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용가월곡체는 형식적인 면에서 매우 독창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국민 전체가 악장을 즐길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악장은 목적성이 가장 뚜렷한 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태평성대 해지고 안정권에 접어듦에 따라 그 목적성이 약해져서 악장은 일찍이 쇠퇴하는 한계를 보였다.
Ⅱ. 경기체가
1. 경기체가의 생성과 개념
고려 후기는 향가가 사라진 시대였다. 신라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진 향가가 고려 전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그 잔존 형태마저 자취를 감추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향찰 표기법으로 우리말 노래를 적는 관습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고, 향가라고 하는 문학의 갈래가 역사적인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사의 커다란 흐름을 역사 전반의 동향과 관련시켜 이해해야만 그 이유와 의미가 드러난다. 향가는 신라 이래의 귀족문학이었고, 고려 전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이은 문벌 귀족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면서 상층 문화를 담당했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무신란이 일어나고 문벌귀족의 지배체제가 무너지자 향가를 이을 수 있는 기반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세 전기 문학의 오랜 시기가 끝났다.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은 권문세족이라 할 수 있으며, 신흥 사대부가 이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또한 그 시기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전에 볼 수 없었던 노래와 놀이가 속악가사로, 속악정재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흥 사대부는 이에 불만을 가지고 상층문화를 가다듬고, 지배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이념을 마련하고자 했다.
신흥 사대부가 나서서 상층의 시가문학을 새롭게 일으키고자 한 데서 중세 전기문학과는 구별되는 중세 후기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이 구현되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경기체가․시조․가사이다. 향가 시대가 끝난 다음에 조성된 상층 시가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체가․시조․가사가 공존하는 갈래 체계를 마련하면서 문학사의 커다란 전환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전환은 결과를 보면 선명하게 정리될 수 있어도 일거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된 것이 아니고, 기존의 문학적 관습과 다각도로 얽힌 상황에서 단계적으로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신흥사대부의 출현과 성장 자체가 그렇듯이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어떤 영역은 선종의 승려들이 앞서서 개척했는데 나중에 사대부문학으로 수렴되기도 했다.
경기체가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한림별곡'은 속악가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최씨 무신 정권에서 벼슬하는 문인들이 놀면서 즐기려고 지은 노래이며, 음란하다고 할 수 있는 놀이를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런 문인은 신흥 사대부의 선구자라고는 할 수 있어도 사대부다운 이념을 마련해서 시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갈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대목씩 지어 부르는 동안에 어쩌다가 생겼을 법한 노래인데, 그 형식과 표현방법이 이어진 결과 경기체가라고 하는 새로운 갈래가 성립되었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던 고종 초기인 그 당시에 향락적인 기풍의 속악가사가 어느 정도 궁중에 들어와 있었던가는 의문이다. 권문세족이 속악가사의 모습을 온통 바꾸어놓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림별곡'은 규범이나 도리 같은 것은 돌보지 않고 오직 즐기자고 부른다는 점에서나, 장을 나누고 여음에 상당하는 것을 삽입하는 형식에서나, 속악가사에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상통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사'악지에서는 그것 또한 속악가사의 하나로 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림별곡'이 장차 속악가사로 부각될 민간전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이루어졌으면서, 또한 이미 궁중의 놀이를 위해 채택된 속악의 음악적 형식을 따르지 않았던가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그러나 '한림별곡'에서 시작된 경기체가는 유식한 문인이 창작한 것이며,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갈래이다. 서정시로 본다면 일찍이 사뇌가가 이룩한 수준은 물론이고, 속악가사에 편입된 민요 계통의 노래가 흔히 갖춘 묘미마저도 도저히 따르지 못한다 하겠으나, 바로 그 점이 갈래 성격을 다른 각도에서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근거이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것은 경기체가가 아니고 서정시가 아니고 교술시라는 증거이다. 그동안 교술시는 민요의 영역에서만 존재했으며 표면으로 부각된 적이 없었는데, 신흥 사대부는 '한림별곡'이 자기네의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데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용할 모형으로 삼았다. 그래서 교술시가 상층시가로 나타나 갈래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어쩌면 노래를 지어 기생들이 부르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이황이 한림별곡류를 비판하면서, 교만하고 방탕한 기풍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비루하게 희롱하며 남녀가 서로 어울린 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림별곡'에서의 그네놀이가 그런 것이고, '관동별곡'도 유람을 다니는 풍류에 겨워 기녀들과 놀면서 불렀을 만하고, 여기서는 더욱 분명한 증거가 발견된다. 그런 기풍은 권문세족에게 둘러싸인 왕이 음란한 속악가사를 즐겼던 것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겠으나, 경기체가는 신흥 사대부가 남다른 학식과 체험을 동원해서 스스로 지은 점이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속악가사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어도 경기체가는 새로운 이념을 구현하는데 긴요한 노래로 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일찍부터 마련되었다 하겠다.5)
지금까지 발견된 경기체가는 총 25편이다. 고려조의 경기체가는 고종조의 ‘한림별곡’을 비롯하여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 세 편 뿐 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조의 작품이다.
가장 후대의 작품으로 1860년 ‘충효가’가 있으나 이는 경기체가가 이미 쇠퇴한 시기의 것이고 이러한 시가가 크게 흥성한 때는 역시 조선 전기로서 조선 초부터 세종조 무렵까지는 경 기체가의 발전기라고 할만한 시기이다.
그러면 한림별곡류를 경기체가라고 명명한 뜻은 무엇인가? 이 명칭의 개념을 구명해 보기로 한다.
고려조는 물론 조선조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한림별곡류에는 공통적으로 ‘~景幾何如’라는 사설이 첨가되어 있다. 이는 다른 형태의 노래에서 볼 수 없는 특정적인 노래 구절이다. 경기체가라고 명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공통적인 표현 형태의 특징 때문이다.
따라서 ‘~景긔엇더니잇고’는 ‘~광경 그것이 어떠한가’의 뜻이다.
한자 표기의 사설에서는 이를 흔히 ‘~景幾何如’라 하였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시가의 명칭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한자로 ‘景幾體’라고 표기되어 온 것이다.
2. 경기체가의 형태
1) 형태의 구성과 특색
(1) 연가형태
경기체는 모두 여러 장의 짜임으로 된 노래들이다. 3장의 ‘배천곡’외에는 대개 5장 이상의 12장에 이르는 비교적 긴 형태의 구성이다. ‘죽계별곡’을 비롯하여 상대별곡, 태평곡 등은 5장의 노래로서 다른 노래에 비하여 연수가 적은편이다.
따라서 한 작품 내에서 여러 장은 서로 짝을 이루는 연형이 되는 셈이다. 이들은 곧 연작에 의한 연가형태의 연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8장으로 된 ‘한림별곡’을 비롯하여 9장의 ‘관동별곡’과 5장의 ‘죽계별곡’등이 고려조의 작품인 것으로 보면 국문학상 연가형은 이미 고려 때부터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연가는 두 사람 이상의 연작과 개인의 연작인 두 경우가 있다. <악장가사>에서 ‘한림별곡’을 “高宗時諸儒所作” 이라 한 것을 보면 이는 여러 유생들이 각장을 번갈아 부른 것으로 생각되는 연작이다. 그 밖의 노래는 모두 개인 단독의 연작으로 짐작된다.
(2) 각 장의 전후 분절과 “위~景긔엇더 니잇고” 의 첨가
노래의 각 장은 대개 전 후절의 짜임으로 되어 있다. 마침 10구체 향가의 형태에서 전대절과 후소절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경기체가는 한편이 여러 장으로 구성된 현가이면서 각 장은 또 공통적으로 전후 양절의 구성으로 되어있으며 이는 연가형태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경기체가 형태의 한 특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한림별곡의 제 5장을 예로 보기로 한다.
紅牧丹 白牧丹 丁紅牧丹 (3.3.4)
紅芍藥 白芍藥 丁紅芍藥 (3.3.4)
御柳玉梅 黃紫薔薇 芷芝冬柏 (4.4.4)
위 間發ᄉ景 긔 엇더하니잇고 (위3.3.4)
合竹桃花 고온 두분 合竹桃花 고온 두분 (4.4(4.4))
위 相映ᄉ景 긔 엇더하니잇고 (위3.3.4)
이와 같이 앞의 4구는 전절이고 뒤의 2구는 후절이다. 각 절의 끝구는 ‘위~景긔엇더 니잇고’ 로 되어 있는 것이 그 특색이다. 경기체가의 이러한 특색으로 보아 노래의 각장이 모두 전후 양절의 구성임이 확실하다.
게다가 전후 양절의 끝구는 모두 감탄사 ‘위’로 시작된다. 이 역시 경기체가의 각절에 첨가된 결사구의 형태상 특색을 보이는 시 구성이다.
경기체가는 이처럼 노래의 각 장이 대개 앞부분은 4구요, 뒷 부분은 2구로 된 전대절 후소절의 구성이다. 그리고 각 장의 후소절에서는 똑같은 말의 재창이 끼여 이음이 전절과 다르다. 앞에 든 한림별곡의 제 5장에서 ‘合竹桃花 고온 두분’의 반복이 바로 이러한 후소절 제 1구의 구성이다. 그리고 몇편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모두 후소절의 제 1구에서 이처럼 같은 말의 재창이 상례로 되어 있다. 거기에 또 ‘위~景긔엇더 니잇고’라는 것을 첨가한 총 2구로써 후소절은 마무리된다. 그러고 보면 전대절에 부수되는 후소절은 향가의 후소절과 대비되는 형태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조선조 사대부의 경기체가와 평민들의 속요는 다같이 향가형에서 연유된 시형이지만 향가에 나타나는 전후절에 대한 계승은 전자에 잔존되어 있음에 대하여 후자는 새롭게 후렴을 첨가하면서 향가형을 계승, 발전시킨 시형이라 하겠다.
(3) 음절, 음보, 구수 등의 구성
경기체가의 형태를 분석해보면 다음의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① 음수율은 3음절과 4음절이 주가 되어 있다.
②음보율은 각 장의 전대절이 일률적으로 3음보임에 대하여 후소절은 주로 4음보와 3음보 의 혼합으로 되어 있다.
③구수율은 각 장이 일률적으로 전대절 4구와 후소절 2구의 총 6구로 되어 있다.
한림별곡의 제 3장을 대상으로 하여 그 분석의 실례를 도시하면 다음의 예시와 같다.
이와 같은 시 형식은 앞에 든 일반형의 노래 각 장에서 흔히 보는 예이다. 단지 제 3구만은 노래에 따라 4․4․4조로 된 경우가 많으므로 이의 음수 전개는 4․3․3조 와 4․4․4조의 두 유형으로 파악된다.
2) 형태의 기본형
앞에서 경기체가의 형태의 구성을 언급하면서 이의 기본형은 이미 밝혀 진 셈이다. 그러나 경기체가의 형태를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뜻에서 형태상의 기본적인 점을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경기체가는 모두 연장체이다.
각 장이 6구로 된 여러 연이 짝지어진 형태이다. 노래에 따라서는 6구를 벗어난 장도 있으나 이는 파격형의 경우이고, 이러한 연장형의 구성은 파격형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잔존되어 있다.
(2) 각 장은 전후 양절의 분절체이다.
고려조 이후에 조선조 초기의 경기체가는 대부분 이러한 구성을 정형으로 하고 있다. 상대별곡의 제 5장은 분절성이 애매하지만 작품의 전체적 구성은 분절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3) 음수율과 음보율에 의한 경기체의 기본적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절: 3.3.4 / 3.3.4 / 4.4.4 / 4.3.4
*후 절: 4.4.(4.4) / 4.3.4
음수율의 넘나듬과 그 처리가 문제된 점을 고려하여 음보율에 중점을 두어 시 형식을 이해하려 하면 이의 기본형은 또
*전절: 3.3.3.3
*후절: 4(2).3
의 음보율로 파악 할 수 있다.
(4) ‘위~景긔엇더 니잇고’ 의 특징을 고려하여 형태의 기본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전절: 3.3.4 / 3.3.4 / 4.4.4 / 4.3.4 / 위~景긔엇더 니잇고
*후절: 4.4.(4.4) / 위~景긔엇더 니잇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위~景긔엇더 니잇고’는 노래에 따라 ‘~景幾何如’ , 또는 ‘~景幾如’ 로 달리 표기되기도 하고, 장에 따라서는 이것이 탈락된 예도 있다.
또 어느 노래에서도 발견되는 특징 중 하나는 감탄사 ‘위’의 동반이다.
3. 경기체가의 작자와 내용
1) 경기체가의 작자
창작순 |
작자(년대) |
작품 |
1 |
翰林諸儒 (고려 고종조) |
翰林別曲 |
2 |
宋軸 (고려 충숙왕~충목왕조) |
關東別曲, 竹溪別曲 |
3 |
權 近 (조선조 초) |
霜臺別曲 |
4 |
柳 潁 (조선 세종조) |
九月山別曲 |
5 |
卞季良 (조선 세종조) |
華山別曲 |
6 |
(미상) (조선 세종조) |
五倫歌, 宴兄弟曲 |
7 |
禮曹 (조선 세종조) |
歌聖德, 祝聖壽 |
8 |
義相和尙 (조선 세종조) |
四方歌 |
9 |
己和 (조선 세종조) |
彌陀讚, 安義讚, 彌陀經讚 |
10 |
末繼智賻 (조선 세조 조) |
騎牛牧童歌 |
11 |
丁克仁 (조선 성종조) |
不憂軒穀 |
12 |
朴成乾 (조선 성종조) |
錦城別曲 |
13 |
(미상) (조선 성종조) |
配天曲 |
14 |
金絿 (조선 중종조) |
花田別曲 |
15 |
周世鵬 (조선 중종조) |
道東曲, 六賢歌, 太平曲, 儼然曲 |
16 |
權好文 (조선 영종~선조조) |
獨樂八曲 |
17 |
閔圭 (조선 철종조) |
忠孝歌 |
이 표에 나타나는 경기체가의 작자는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대부계층이요, 또 하나는 승려계층이다. 경기체가는 이 두 계층의 작자들이 자기네 생활이념을 노래한 것이므로, 그 내용은 사대부들의 생활방식 및 그 이념을 담은 것과 승려들의 생활방식 및 그들의 불교이념을 담은 두 가지로 구별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총 25편의 경기체가 중 승려의 노래는 6편이고, 나머지 모두 사대부의 작이다.
작자 면에서 볼 때 경기체가는 사대부들이 시도하여 즐김으로써 보급된 문학이다. 고려조부터 한림제유 등 신흥 사대부들이 한림별곡을 제작함으로부터 특히 알려져서 조선조에는 사대부계층이 한층 관심을 두어 참여하게 된 대표적인 귀족문학이다.
조선조 초에 사대부들은 시조와 가사의 제작에도 주류가 되어 참여해 왔으나 이때의 사대부문학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이 경기체가이다. 승려들도 이에 관심을 가지고 찬불 또는 포교의 경기체가를 짓기는 했으나 사대부문학에 비하면 이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2) 경기체가의 내용
경기체가의 내용은 편의상 풍류적 내용, 송축적 내용, 도덕적 내용, 불교적 내용으로 나눌수 있는데 풍류적, 송축적, 도덕적 내용은 사대부문학의 문학의 내용을 분류한 것이다.
때문에 사대부문학의 이 세가지에는 내용상 공통점이 있다. 비록 세가지로 나누었지만 이들은 모두 칭송과 자랑, 등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1) 풍류적 내용
고속요는 그 주제가 남녀 사랑의 문제에 치우쳐 있고 그것도 독수공방하는 여인의 삶이나 이별의 한을 주로 하고 있어 이러한 데서 어떤 풍류를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조에 득의연한 신흥사대부들이 지은 경기체가는 이와 다르다. 그들은 삶의 흥취를 시로 노래하였다. 거기에 자연에서의 풍류까지 곁들여 경기체가를 지었다.
한림별곡과 관동별곡, 죽계별곡이 이러한 사대부생활의 멋을 노래한 것이다.
고속요는 주로 이별과 아쉬움 등 빈곤한 부정적 삶의 노래임에 대하여 이 경기체가는 기쁨, 자랑, 그리고 자연을 즐기는 감흥 등 여유 있는 긍정적 삶과 그 풍류를 노래한 것으로 양자가 대조적이다.
조선조에 와서 제작된 화전별곡이나 불우헌곡, 독락팔곡 등도 같은 부류에 속한 충류적 내용의 노래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작품들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 한림별곡
이 노래는 전 8장으로 되어 있다. 제 1-7장까지는 당시의 명류를 한시에 현토한 것 같은 형식으로 열거법과 반복법을 구사하여 웅장한 느낌을 주나 실은 내실이 없는 나열에 그쳐 문학성이 희박하다. 그 한 예로 제 1장은 문장가, 시인 등의 시부를 나타낸 것인데 명문장을 찬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과시의 고시관이었던 금의에 의해 배출된 많은 제자들의 시부를 찬양함으로써 신진사류들의 당당한 기개를 엿보는 듯하며,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는 자만에 넘치는 기개라 할 수 있어, 당시 상층 문인들의 의식 세계를 짐작하겠으나, 명사의 나열에 그쳐 문학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제 8장은 다른 장과는 달리 우리말 위주로 표현되었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네와 같은 민속적인 제재를 다루는 데는 우리말이 훨씬 더 편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향락과 흥취가 극치에 이른 흐드러진 광경, 당시 상층 사회의 문신들의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정욕적인 풍류의 극치를 국어로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으며, '당당당 당츄자'와 같은 운율미는 상당히 세련되어 있다. 그리고 '긔 엇더하니잇고'는 의문의 표현이 아니라, 득의만면한 과시의 반어적 표현이며, 3․3․4조의 율조는 정읍사 이후 향가 문학으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전통적 율격의 가교적 구실을 하는 것이다.
② 죽계별곡
죽계별곡은 전체 5장 가운데 역시 1장부터 순서대로 순흥(順興)의 형승(形勝), 정자(亭子), 송록(松麓), 화훼(花卉), 사계(四季)로 각각 되어 있다.
이 작품의 구조를 살펴보면 1장을 서사로 두고 마지막장을 결사로 보면 제2장 이하로 일정한 순서를 따르지 않는 듯이 보인다. 1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장들을 살펴보면 제2장에서는 사찰의 누각, 정자 등을 찾아서 기녀들과 어울려 노는 광경을 다루었다. 제3장에서는 향교에서 글을 배워 유학을 익히고, 철 따라 시를 읊고 음률을 즐기는 광경을 자랑하고, 향교의 스승을 보내고 맞는 광경도 거기 곁들였다. 제4장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놀다가 헤어져서 멀리 두고 생각을 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제5장에서는 성스러운 태평성대이니 사철 즐거운 놀이를 벌이자고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은 죽계 지방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더 깊은 의미에서는 향리계층의 신흥사대부의 왕성한 의욕과 자기 과시 그리고 유락, 학습, 상사 등으로 나열된 유학자들의 태평성대의 향유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이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근거로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③ 화전별곡
조선시대 중종 때의 학자 자암 김구가 지은 경기체가로 작자 문집인 '자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확실한 제작 연대는 미상이나, 작자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경상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그 곳의 승경(勝景)인 화전의 풍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모두 6장으로 되어 있으며, 1장은 화전의 경치, 2장은 교우(交友), 3장은 연락(宴樂), 4장은 연락 중의 음악, 5장은 술과 안주의 풍부함, 6장은 자신의 생애를 읊고 있는데, 마지막 6장은 앞의 장들과 달리 가사체(歌辭體)의 느낌을 주는 전체의 결락구(結落句)이다. 제2장만 경기체가의 형식을 따른 정격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변격 내지 파격형을 보인다. 특히, 제6장은 경기체가의 특징인 '위 ~ 경긔엇더 니잇고'라는 감탄 구절이 단 한번도 실현되지 않고 있어 서정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또한 제 1장은 '한림별곡' 제1장과, 제6장은 '상대별곡'의 제 5장과 형식 및 자수방식에 있어 흡사함을 보여 주목된다. 단, 이들 작품처럼 궁중의 악장으로 지어진 공적 작품이 아니라 개인적 생활을 바탕으로 한 사적 작품이라는 데서 경기체가의 변천기에 해당하는 장르적 위치를 볼 수 있다.
(2) 송도적 노래
경기체가는 고려조부터 사대부들의 풍류적 자락과 더불어 자신의 자랑 칭송 등을 내용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이어 받은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신흥왕조에 대한 자랑과 칭송, 그리고 임금을 송축하는 내용의 경기체가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노래를 여기서는 송도적 내용의 경기체가로 일괄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소위 조선조 초기에 등장한 악장이다.
<악장가사>에 전하는 상대별곡, 화산별곡 은 경기체의 악장으로서 대표적인 것이다.
다음은 이에 해당하는 각 작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① 상대별곡
조선 초기 때의 문신인 권근이 지은 가요. 경기체가(景幾體歌)형식으로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궁중에서 연악(宴樂)으로 쓰이던 송도가(頌禱歌)로서 악장 문학에 속한다. <악장가사>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 보이는 상대(霜臺)는 사헌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작자가 1399년(정종 1년)에 대사헌을 맡았으니, 그 뒤의 어느 시기에 사헌부에서 하는 일을 칭송한 이 노래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장체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1장부터 4장까지는 경기체가의 정격(正格)형식을 정연히 지켰으나 끝의 5장은 형식을 상당히 벗어나 변격(變格)으로 되어 있다.
사헌부는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이다. 서릿발 같은 기세로 새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찰하고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으니, 거기서 일하는 관원은 위의(威儀)가 대단하고 자부심도 남다르다는 관점에서 그러한 취지를 펴고자 이 작품을 지었다고 본다. 작품의 내용을 보면 1장은 새 왕조의 도읍터가 천년승지임을 말하고, 이어서 서울의 거리와 서헌부의 엄숙한 기풍 및 관원들의 기상과 자기 과시를 노래했다. 2장은 사헌부 관원들의 등청하는 광경에서 씩씩하고 믿음직한 자태를 묘사하였으며, 3장은 임금의 현명함과 신하의 충직한 모습을 그리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4장은 관원들이 일을 끝내고 술잔치에서 즐기는 장면을 노래하였으며, 5장은 어진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들이 어우러진 태평성대에 훌륭한 인재들의 모임이 더욱 좋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사헌부에서 하는 일을 하나씩 서술하면서 자부심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제시하였다. 5장은 이러한 감격을 총괄하느라고 경기체가의 특유한 형식에서 이탈한 것이다. 격정적인 감정의 표출은 형식읠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장르상으로 볼 때는 경기체가에 귀속되며, 형성기의 경기체가로서 장르양식을 굳혀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② 화산별곡
1425년(세종 7)에 변계량이 지은 경기체가. 총 8장. 궁중에서 연악으로 지은 송도가(頌禱歌)로서 악장문학에 속한다. <악장가사>에 수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에도 소개되어 있다. 조선 개국 후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나라의 기반이 안정되자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세종이 나라를 힘써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맞이하매 이를 기리고자 지었다. 작품의 형식은 연장체(聯章體)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은 경기체가의 정형적 형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즉, 각 장이 전대절(前大節)과 후소절(後小節)로 이루어지고 6행씩이며, 각 행은 3보격과 4보격으로 되고, 제4행과 제6행은 '위~景긔엇더니잇고'로 양식화되어 있다. '화산(華山)'은 삼각산의 다른 이름이며, 서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내용은 서울을 찬양하는 노래로서 1장은 빼어난 형세를 안고 있는 도읍지의 모습과 왕업을 확고하게 지켜나가는 장한 모습을 그렸다. 2장은 임금의 선정으로 나라 안팎이 태평성대임을 구가했다. 3장은 인의(仁義)를 몸소 실천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숭상하는 세종의 모습을 그렸다. 4장은 군사훈련과 사냥 등을 통하여 무력을 기르는 세종의 유비무환의 자세를 그렸다. 5장은 백성과 신하, 형벌을 다스리는 일에 자상한 은혜를 베푸는 세종의 천세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았다. 6장은 서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에 방불함을 노래하였다. 7장은 어질고 밝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 잔치하는 모습과 임금의 만세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았다. 8장은 농상(農商)을 권하고 민생을 두터이 하는 것이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고, 이어서 덕택이 지극하고 교화가 흡족하여 서울의 자연과 조선의 왕업이 함께 오래 지속되는 모습을 찬양하였다. 이 작품은 작자의 개인 생각을 나타낸 것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정치철학을 요약, 제시한 느낌을 준다. 완성기의 경기체가로서, 장르양식의 확고한 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③ 가성덕, 축성수, 배천곡
세종실록에 의하면 전 2자는 예조에서 지어 바친 것으로 하나는 6장이고 또 하나는 10장의 노래이다. 제목에서 뜻하는 대로 성덕을 기리고 성수를 축원한 내용이다.
(3) 도덕적 내용
조선조에 성리학이 대두되면서 사대부들이 생활의 규범으로 삼은 것은 도덕적 이념이다.
어느 때의 노래이든 이는 곧 자신의 생활이념을 바탕으로 하게 마련이니 사대부들의 노래에 또 도덕적 내용이 담기게 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조 초에 제작된 송도적 내용의 경기체가도 이러한 도가적 이념의 노래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당시 사대부의 노래에는 신흥국가나 임금에 대한 송영과 개인 내면생활의 인륜도덕을 강조한 오륜가 등의 두 갈래가 있다. 전자는 이미 말한 송도적 내용의 노래이고, 후자는 여기서 이르는 도덕적 내용의 노래이다. 이 후자의 경기체가에는 연형제곡, 오륜가, 도동곡, 태평곡, 육현가 등이 있다.
① 연형제곡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른 세종이 양녕, 효녕대군을 형님으로 받들면서 그 우애를 돈독히 하고, 그 형들은 신하로서 동생인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왕실의 지극한 우애를 창작 배경으로 깔고 있으며, 그러한 형제간의 우애를 바탕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고 태평을 구가하게 된다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경기체가 특유의 형식에 담아 당당하게 노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의 선대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를 죽여야 하는 혹독한 윤리적 시련이 있었음에 반해, 세종의 형제들은 그 우애와 직분을 다함에서 건국 초기의 국가의 기반이 확고해졌음을 감격해하고 과시하는 어조로 담은 작품의 창작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② 도동곡
작가가 안향의 옛집터인 순흥의 죽계에 문성공사(안향을 모신 사당)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고 나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그 뒤 작가가 이 작품 등을 '죽계지'에 수록하려 하였을 때, 황준량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논쟁이 있었는데 작가는 그의 시가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고 옛 성현의 격언을 옮긴 것이므로, 수양과 풍속교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어 뺄 수 없다고 하였다. 본래 경기체가는 그 형태의 단형성으로 인하여 내용의 서술이 크게 제약되어 사건의 서술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 작품은 그 연장구조를 통하여 사상르 시간적 순서로 배열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서사의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형태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경기체가 본래의 정형인 전대절과 후소절으 결합 형태에서 전대절을 탈락시키고 후절만으로 구성되는 변모를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제 1장은 "4.4/4.4/偉……景幾何如"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변모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제8.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절만으로 된 작품안에서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 기미가 보이기도 하여, 권호문의 '독락팔곡'에서와 같은 파격적인 장형화의 조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③ 오륜가
조선 세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경기체가. ≪악장가사 樂章歌詞≫에 전하며, ≪악학편고 樂學便考≫에도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악장가사≫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궁중의 연향(宴享)에 쓰인 악장의 하나로 보인다.
형식은 경기체가의 전형적인 율격양식을 준수하고 있으며,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서장에 해당하고, 나머지 5장에서 오륜을 하나씩 노래하였다.
오륜가는 유교윤리의 중추적 바탕이 되는 다섯가지 기본 항목인 오륜을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시켜 함께 향유하기 위하여 노래로 풀이한 작품을 총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경기체가로 된 것은 이 노래뿐이다. 부자․군신․부부․장유(형제)․붕우 사이의 상호존경․상호애정․상호평등․상호질서․상호조화를 지향하면서도 상하․존비․귀천의 차별을 인정함으로써 가부장적인 가정질서 및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로 지어졌다. 따라서, 수직적 인간윤리관계를 객관화하여 규범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
이 작품은 조선의 건국 초기에 국가의 안정을 다지고 그 질서의 확립을 확인하는 작품으로써, 중기 이후에는 안정과 질서회복을 호소하고 설득하는 작품으로써 왕조의 체제를 굳건히 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4) 불교적 내용
이는 종래에 거의 도외시되었던 경기체가의 내용이다. 근래에 와서 승려의 노래가 차차 발굴되면서 관심을 갖게 한 찬불가들이다.
경기체가는 처음 사대부들이 발견하여 삶의 체험과 학식을 노래했던 것이다. 조선조에 와서는 새로운 작자층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이 곧 승려들이 자신의 생활이념을 담은 불교적 내용의 경기체가이다. 사대부들이 발견하여 즐기던 시 형식을 이와 대조적인 계층의 승려들까지 수용한 것은 주목되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조 초에는 미타찰, 안양찬, 미타경찬 등 각각 10장으로 된 경기체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의상화상은 전 9장의 서방가를 지었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는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가자는 뜻에서 부른 경기체가다.
이러한 노래들은 대개 불의 찬양과 포교 등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Ⅲ. 가사
1.시대구분
가사는 17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가사는 주로 사대부계층에 의해 창작되었다. 그 내용은 혼란스런 세속을 떠나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강호가도, 또는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사대부로서의 고뇌와 유교적 충의를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기술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단순히 사실의 기술이나 서정의 표출에만 그치지 않고 물아의 합일을 통해 조화로운 삼을 추구하려는 차원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의 가사는 작자의 계층이 확대되고, 현실적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다루게 된다. 사실적 체험을 기술하는 기행가사· 유배가사를 비롯하여 부녀자들의ㅏ 삶에 초점을 맞춘 내방가사, 평민들의 현실관을 반영한 평민가사등은 후기 가사의 대표적 형태이다. 한편, 개화기에 이르러 4음보의 연속이라는 가사의 형식은 소멸되고 분절체의 4음보 시가인 개화가사가 출현한다.
그러면 이제 이를 더 구체적으로 내용·형식·작가의식 등의 변모에 따라 대략 5기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1) 제1기
고려 말엽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로서, 가사가 발생하여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는 시기이다. 가사의 기원과 발생 시기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나 이두문으로 표기된 나옹화상〈승원가〉와 신득청의 〈역대전리가 〉가 발굴되었고, 〈서왕가〉 등 나옹화상의 작품이 여럿 되는 것으로 보아, 가사의 발생시기는 고려 말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가사의 기원문제는 경기체가에서의 발생설, 시조에서의 발생설, 악장체에서의 발생설, 한시현토체에서의 발생설, 교술민요에서의 발생설, 불교계 가요에서의 발생설 등 여러 의견이 있지만, 4음보 민요의 율격적 낯익음과 대구형식인 사부의 영향, 그리고 불교의식에 쓰이던 화청(등에서부터 가사의 관습적이고 개방적인 형식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제1기 가사문학의 전개양상은 승려계층에 의해 발생된 가사가 몇몇 사대부 관료에 의해 수용되고, 차츰 그들의 기호에 맞는 형식으로 자리 잡아 조선 초기에 정극인의 〈상춘곡〉과 같이 세련된 작품으로 나타났다고 정리할 수 있다.
(2) 제2기
성종시대 이후 임란 전까지, 가사가 본격적인 문학양식으로 성장한 시기로 사대부 가사의 절정기라 할 만하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퇴계·율곡과 같은 대학자들이 성리학 이론을 완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교의 세계관에 의해 사회가 안정되던 시기였던 만큼, 사대부의 이념을 바탕으로 강호자연을 관조하고 유유자적하게 자연미(를 완상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한편으로 정치적 패배에 따른 울분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가사들도 나오는데, 뛰어난 형상성을 지닌 작품이 많다. 사대부 삶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허강의 〈서호별곡〉, 정철의 〈성산별곡〉 등과 임지(任地)를 여행하면서 얻은 감흥과 관료 생활의 즐거움을 읊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정계에서 밀려난 후 사랑하는 님에 의탁하여 연군을 드러낸 정철의 〈사미인곡〉·〈속미인곡〉과 적객의 쓰라린 회포와 충의심을 토로한 조위의 〈만분가〉 등은 연군 및 유배 가사의 전형이 되었다.
이 시기 가사의 형식적 특징이 가사의 형식의 전형으로 인정되는데, 그것은 율동 실현이라는 범위 내에서 4음 4보격의 안정된 율격을 비교적 온전히 지키고 있으며, 결구를 시조의 종장 형식으로 마감하는 형식의 완결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가사의 형식의 특징은 가창)과 음영및 완독이라는 향유 방식을 동시에 갖는 사대부가사의 관습적 장르 수행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제3기
임진왜란 이후부터 숙종 전까지, 사대부가사가 변모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로 작가의 시선이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현실의 문제로 이동하는 특징을 보인다. 박인로의 〈누항사〉와 정훈의 〈우활가〉·〈탄궁가〉는 안빈낙도를 표방하지만 생활고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박인로의 〈태평사〉·〈선상탄〉, 채득기의 〈봉산곡 〉, 최현의 〈용사음〉 등에서는 임진·병자 양란을 배경으로 왜나 청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하면서 전쟁의 비참함이나 전쟁으로 인한 사회의 피폐상을 읊었고, 파당과 분쟁을 일삼으며 수탈을 자행하는 위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전쟁포로로 일본에 끌려 갔던 백수회는 〈도대마도가 〉·〈재일본장가〉 등에서 울분을 토로했고, 허전의 〈고공가〉와 이원익의 〈고공답주인가〉에서는 임란 이후 위정자의 부패상과 무력감을 우의적 수법으로 꼬집기도 했다.
불교 가사도 고려 말 나옹화상의 작품을 잇는 휴정의 〈회심곡〉, 침굉선사의 〈귀산곡〉 등이 나왔다. 물론 이 시기에도 전기의 강호가사·연군가사·유배가사·기행가사의 계통을 잇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창작된다.
강호가사로 고응척의 〈도산가〉, 박인로의 〈사제곡〉, 윤이후의 〈일민가〉, 조우인의 〈매호별곡〉이, 연군가사로 조우인의 〈자도사 〉가, 유배가사로 송주석의 〈북관곡〉 등이 이어졌다. 기행가사는 조우인의 〈출새곡〉·〈관동속별곡〉, 이현의 〈백상루별곡〉, 박권의 〈서정별곡〉 등이 창작되었다.
이 시기의 가사 형식은 4음 4보격 율격을 이탈하면서 2음보를 기본 율격으로 하는 6음보 실현의 빈도가 다소 높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가사 향유 방식의 변모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 내용의 전달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창보다는 음영이나 완독의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4) 제4기
숙종 때 이후 동학 창도 이전까지, 가사의 담당층과 향유층이 크게 확대되어 가사의 성격이 크게 변모하는 시기이다. 사대부가사의 영향을 받아 규방에서도 가사 창작과 유통이 활발해졌고, 시정문화가 확산되면서 계층을 넘어서 향유될 수 있는 서민 취향의 가사가 생성된다.
규방가사는 안동 권씨의 1746년작 〈반조화전가 〉나 전의 이씨의 1748년작 〈절명사 〉, 연안 이씨의 1794년작 〈쌍벽가 〉와 1800년에 지어진 〈부여노정기〉 등으로 미루어 늦어도 18세기 중반에는 규방가사가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전통적 질서가 흔들리던 상황이어서 유교 이념 강화를 주장하는 가사가 많이 지어졌는데, 이기경의 〈심진곡〉, 권섭의 〈도통가〉 등으로 전기 교훈가사를 잇고 있다. 새로 들어온 천주교 측에서 교리와 포교를 내용으로 하는 천주가사를 내놓았다. 정약전의 〈십계명가〉, 이벽의 〈천주공경가〉, 이가환의 〈경세가〉, 최도마 신부의 〈지옥가〉 등으로, 이들은 18세기 말엽부터 교리의 전달과 포교에 사용되었다. 사대부가사도 지속적으로 창작되어, 남도진의 〈낙은별곡 〉, 박리화의 〈낭호신사〉, 조성신의 〈개암가 〉 등이 강호가사의 맥을 이었고,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이용의 〈북정가〉, 정재문의 〈화양별곡〉 등도 전기 기행가사를 잇고 있다.
연군가사로는 김춘택의 〈별사미인곡〉,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등이, 유배가사로는 안조환의 〈만언사〉, 김진형의 〈북천가〉 등이 창작되었다. 이 시기 가사 변모의 특징은 작품의 장편화 현상과 4·4조의 음수적 규칙을 고수하는 율격적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장편가사의 등장은 가사의 향유 방식 가운데 율독의 비중이 높아져 가사가 독서물로 전환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율격 경직의 원인은 주 담당층인 양반 사대부계층의 이념의 경직성에서부터 말미암은 현상이 아닌가 한다.
한편 시정 음악문화의 성행으로 가창 위주의 가사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 가사 변모의 한 특징인데, 오늘날 ‘12가사’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이 가창가사는 시정 음악문화권을 통해 ‘형성’된 작품들로서 가사의 외연을 넓히면서 잡가 장르 형성에 주요 동인이 되기도 했다. 사실 통속적 애정을 주요 주제로 삼는 서민 취향의 작품들이란 대부분 이러한 시정 음악문화권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5) 제5기
동학의 창도와 개화기를 거쳐 1920년대까지로, 개화기의 격동하는 시대정신을 담아낸 작품들이 주로 창작되는 시기이다. 규방가사의 창작 및 유통이 활발해지고 의병가사와 개화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가사의 쇠퇴기이기도 했다.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의 ≪용담유사≫가 창작되어 만민 평등사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했으며, 홍순학은 〈연행가〉에서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어 뜨거운 항일 구국의식을 담아낸 유홍석의 〈고병정가사〉, 신태식의 〈창의가〉가 지어졌다. 이러한 의병가사에서는 역사에 대응하는 사대부정신을 읽을 수 있다. ≪독립신문≫에 실린 개화가사는 개화기 지식인의 입장에서 자주독립과 개화사상을 고취했고,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가사들은 무비판적인 신문화 수용을 반대하였다.
이들 개화가사는 〈우국가〉·〈애국가〉란 제목이 유독 많으며, 대부분 애국·계몽의 성격을 지닌다. 또 출판 매체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밖에 유영무의 〈오륜가〉, 김경흠의 〈삼재도가〉 등 사대부 가사들이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기의 근대교육과 1910·1920년대 신문학의 확산,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은 표현의 억압 등은 가사의 창작을 급속하게 위축시켰으며, 비교적 제약을 덜 받은 규방문화권에서 규방가사의 유통을 끝으로 가사는 쇠퇴하고 말았다.
2.가사의 개념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발생한 문학의 한 형식으로 4음보 율격의 장편연속체로 된 시가이다. '가사'(歌詞)라고도 표기했으나 지금은 '가사'(歌辭)로 표기한다.
3.가사의 기원에 관한 설
가사의 발생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 말 발생설과 조선 초 발생설이 있다.
고려 말 발생설의 근거는 고려 말 나옹화상이 지었다는 〈서왕가〉인데, 국문이 없을 때 창작되어 후대의 문헌에 실린 것이므로 나옹의 작품인지 의심스럽다. 조선초 발생설의 근거는 정극인의 만년작인 〈상춘곡〉이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후대의 문헌에 정착되었으므로 정극인의 작품인지 의심스럽다. 두 설이 모두 의심스럽기는 하나, 많은 가사작품이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불경의 부록으로 나와 전파되었으며, 〈상춘곡〉보다 앞선 가사의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 등에서 고려 말 발생설이 좀 더 설득력을 갖는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려 속요 또는, 경기체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
② 4음보의 연속체 교술 민요가 기록문학으로 정착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
③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등의 악장에 보이는 시형이 그 기원이라는 설
4.가사의 특징
① 서정성 : 내면적인 심리나 정서, 자연을 보고 느끼는 감동 등을 노래함
② 서사성 : 기행 가사와 같이 이야기 구조를 가진 가사가 많았다.
③ 교술성 :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아 가사를 교술 시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5.가사의 갈래 구분
조윤제는 가사를 시가와 문필의 중간 형태로 하고 이능우는 기본성격은 수필이지만 형식은 율문이라 한다. 또 장덕순은 주관적·서정적 작품 군과 객관적·서사적 작품 군으로 나누어 각각을 서정 장르와 서사 장르에 따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했다.
조동일은 교술 장르를 따로 설정하여 율문의 교술 문학으로 규정하고 김홍규는 서정적·서사적·이념적·교훈적 작품이 공존하는 장르를 하나의 범주에 귀속시키기보다는, 개방성을 인정하는 시각에서 혼합장르로 파악한다.
정리해보면 고려 말에 발생하고 조선 초기 사대부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잡아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의 한 갈래이다. 4음 4보격을 기준 율격으로 할 뿐, 행(行)에 제한을 두지 않는 연속체 율문형식을 갖고 있다.
6.가사의 내용
가사의 내용을 살피는데 방법은 다양하지만 주제면과 종교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해 볼 때 가사의 내용을 대별해보면 1)은일가사, 2)유배가사, 3)기행가사, 4)전쟁가사, 5)도덕가사, 6)송양가사, 7)상사가사, 8)포교가사, 9)권농가사, 10)서민가사, 11)규방가사 12)개화가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은일가사=>사대부가사. 자연에 취해 노부의 삶을 즐김. 자연친화적. 대부분 양반가사, 사대부가사에 많으니 관계를 떠나 자연에 안주하면서 노후 생애를 증기는 것들이다. 작자들은 환해풍파에 시달리거나 늙어서 세속의 복와 공명을 떨쳐버리고 강호의 은일군자로서 이른바 가어옹이 되어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펴낸 가사가 이에 속하는 데 그 효시는 상춘곡이다. 여기에 은일가사의 대표적 작품을 구별하고 그 내용이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품1)
상춘곡: 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 내 生涯(생애) 엇더고. 녯 사 風流(풍류) 미가 미가. 天地間 男子몸이 날만 이 하건마, 山林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것가. 數間茅屋(수간모옥)을 碧溪水(벽계수) 앏픠 두고, 松竹 鬱鬱裏(울울리)예 風月主人(풍월주인) 되어셔라.
(작품2-면양정가)
天根을 못내보와 望洋亭 올은말이
바다밧근 하이니 하밧근 므서신고
득 노고래 뉘라셔 놀내관
블거니 거니 어즈러이 구디고
銀山을 것거내여 六合의 리 듯
五月 長天의 白雪은 므일고
은일가사의 공통적인 성격은 강호에서 은읽하려는 현실도피사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 생활배경인 자연의 묘사가 전체에 곁들여 있어 서경시적 풍격이 짙은 것이다. 그리고 모음 은밀히 있으면서도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어 항상 자연을 바라보며 군은에 감입하고 있다. 한 편으로는 취락사상도 섞여 시우와 더불어 안빈낙도하려고 한다.
정리해보면 1. 현실도피적, 2. 충성심, 3. 자연친화, 4.안빈낙도 이렇게 네 가지라고 할 수 있다.
2)유배가사 =사미인 가사
‘만분가’를 효시로 한 당쟁의 산물이다. 조선조 사대부들의 가장 쓰라린 생활 감정은 유배가사로써 표백되었으니 그 내용은 유배지에서 겪는 온갖 고난과 고독감 속에서도 향주일편단심은 불변이어서 한결같이 충신연주지사의 성격을 지닌다. 유배가사는 애원, 상심등이 그 주조를 보인다고 할 수 있고 체념이나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임금께 나아가려는 의지력이 여운처럼 나아있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유배가사의 제목은 ‘미인’으로써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학에서 유배가사는 곧 사미인가사라 할 만큼 한결같이 연군의 정을 나타내었으니 그 대표적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1-만분가)
천상 백옥경 십이루 어디멘고
오색운 깊은 곳에 자청전이 가렸으니
구만 리 먼 하늘을 꿈이라도 갈동말동
차라리 죽어져서 억만 번 변화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어
이화 가지 위에 밤낮으로 못 울거든
삼청 동리에 저문 하늘 구름 되어
바람에 흘리 날아 자미궁에 날아올라
옥황 향안 전에 지척에 나가 앉아
흥중에 쌓인 말씀 실컷 사뢰리라
(작품2-속미인곡)
뎨 가 뎌 각시 본 듯도 뎌이고.
天텬上상白玉옥京경6)을 엇디야 離니別별고
다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고
어와 네여이고 내 셜7)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8) 가마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
나도 님을 미더 군 디 전혀 업서
반기시 비치 녜와 엇디 다신고.
3)기행가사
자자가 낯선 고장을 찾아가 그곳의 승경과 정항및 사정을 설명하면서 자기의 감정을 섞어 노래한 것이다. 이 계열의 첫 작품은 백광홍의 관서별곡이다. 기행가사들의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관서별곡, 관동별곡 등이 있다.
이들 기행가사의 내용에는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풍경마다 중국의 명승지와 비교하며 서술하였고 지명과 인물의 고사나 역사적 사실을 노래한 것이 특색이다.
(작품-관동별곡)
江湖(강호)에 病(병)11)이 깁퍼 竹林(듁님)의 누엇더니
關東(관동) 八白里(팔니)에 方面(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셩은)이야 가디록 罔極(망극)다
延秋門(연츄문)12) 드러라 慶會(경회) 南門(남문) 라보며
하직하고 믈러나니 玉節(옥졀)13)이 알 셧다
平丘驛(평구역) 을 라 黑水(흑슈)로 도라드니
蟾江(섬강)은 어드메오, 雉岳(티악)이 여긔로다
4)전쟁가사
전쟁이란 극한상황에서 임란은 승리를 기원하고 현실적인 비극을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를 나타낸다. 가사작품으로서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은 남정가가 그 효시이다. 이는 을묘왜란을 당한 작자 양사준이 남정군으로 영암에 내려가 왜군을 무찌르던 전투과정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것이었다. 그 뒤 로 임진왜란 때 박인로는 종구하여 ‘태평가’와 ‘선상탄’을 지었다. 여기서 ‘태평가’는 전쟁가사의 대표로 서사시라고도 할 수 있으며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또한 최현은 ‘용사음’을 지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변득기의 ‘봉산곡’ 등이 나타났다.
이들 전쟁가사의 공통된 특색은 적군에 대한 적개심과 군왕을 위한 충성심의 발로이다. 그리고 전쟁에 휘말려 감정에 휘말려 불안정한 정서에서 지었기 때문에 리듬의 템포가 빠르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 앞서 말했던 전쟁가사들 가운데 남정가를 살펴보자.
(작품-남정가)
나라히 무야 이년이 너머드니
文恬武嬉14)야 兵革을 니젓다가
時維乙卯ㅣ오 歲屬三夏애
島寇雲翔15)니 수 뉘 혜려요
혜욤 업 뎌 兵使야 네 딘을 어 두고
達島로 드러간다
5)도덕가사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하였으므로 유교적인 도덕생활을 강조하게 되니 가사를 통해서도 유가의 교훈을 나타내었다. 유교는 효제충신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인의예지로써 최고이념을 삼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룩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황은 ‘상저가’, ‘도덕가’, ‘효우가’등을 통하여 도학자다운 교훈으로 도덕심을 계도하였고 조식의 ‘권선지로가’와 이이의 ‘자경별곡’, ‘허진의 ’고공가‘와 이원익의 ’고공답주인가‘등이 모두 삼강오륜을 비록하여 사군, 부부등에 관한 교훈으로 되어있다.
(작품-권선지로가)
이보쇼 사드아 이말 드러보쇼
한길란 어두고 小路로 드러시며
낮즈란 어두고 밤으로 단니다
堯舜적 닥근길이 네붓터 닐러시며
너 무닐노 小路로 드러시며
仲尼적 놉픈날리 이져지 거
너 무닐로 밤으로 단니다
6)송양가사
어떤 인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용맹을 찬양하거나 덕행을 송축하는 내용의 가사들인데 그 효시는 ‘미인별곡’이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하여 그 전체를 알 길이 없지만 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17세기 이후에 나온 박인로의 ‘영남가’와 고령진민의 ‘상저가’, 북청부사 성대중의 심정을 기린 작자미상의 ‘갑민가’등은 위정자의 선덕을 송양한 것이다. 또 이휘녕의 ‘방경무도가’, ‘회혼축가’, ‘악민송’등도 경축일에 그날의 주인공을 송양하는 점에서 여기에 속한다.
(작품-미인별곡)
7)상사가사
주로 규방가사에 나타나는 내용인데 여인이 그의 낭군을 멀리두고 연모하며, 별거의 한을 노래하는 것이다. 허난설헌의 ‘ 규원가’를 그 효시로 삼는다.
규원가와 같이 임을 그리워하는 정이 애처롭기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가사들은 뒤에 여류들의 ‘상사별곡’, ‘상사회합곡’등으로 셀 수 없이 많다.
(작품-규원가 )
엇그제 저멋더니 마 어이 다 늘거니. 少年行樂(소년행락) 생각니 일러도 속절업다. 늘거야 서른 말 자니 목이 멘다. 父生母育(부생모육) 辛신苦고야 이 내 몸 길러 낼 제, 公공候후配배匹필은 못 바라도 君군子자好호逑구 願(원)더니, 三生(삼생)의 怨원業업이오....
8)포교가사
어떤 특정한 종교의 교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니 불교가사에, 천주교가사, 동학가사, 시천교 가사등이다.
불교가사는 주로 승려들이 염불이라는 포교적 수단을 가사로 지은 것인데 문학성은 매우 희박하다. 우리나라의 불교가사의 경우 중국의 구창문학인 변문이나 일본의 화찬등과 같이 염불포교의 내용을 작품으로 나타내었으니 서왕가, 심우가, 낙도가, 승원가, 귀산곡, 청학동가, 태평곡, 회심곡, 승가사, 우답가, 승녀답가등이 있고 이중 여말의 나옹화상이 지은‘서왕가’·‘낙도가’·‘승원가’등이 그 효시이다.
(작품-서왕가) 선지석을 친견하야 이 마음을 발키리라....
천주교가사는 영정조에 서학이 수입되면서 나타난 가사로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사향가, 삼세대의, 션죵자, 성당가, 벽악수선가, 자신책가, 충효가등이 지어졌다.
천도교가사는 조선 말기에 일어난 천도교의 교리를 가사체로 설명한 것이니 동학본부에서 포교를 목적으로 간행하여 널리 퍼뜨린 것이다. 이는 동학가사라고도 하여 <용당유사>에 실렸으며 교훈가, 안심가,최재우(용담사), 몽중노소문답가, 도수사, 근학가, 도덕가, 흥북가, 몽중간답가,등이 있다.
9)권농가사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농사를 권면하는 권농가사가 나왔으니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있다.
(작품-농가월령가)
天地(천지) 肇判 (조판)하매 日月星辰(일월성신) 비최거다 日月(일월)은 度數
(도수)있고 星辰(성신)은 輾次(전차)있어 一年 三百 六十日에 제 度數돌아
오매 冬至(동지) 夏至(하지) 春秋分(춘추분)은 日行(일행)을 推測(추측)하고
上弦(상현) 下弦(하현) 望晦朔(망회삭)은 月輪(월륜)의 盈虧(영휴)로다 大地上
(대지상) 東西南北(동서남북) 곳을 따라 틀리기로 北極(북극)을 보람하여
遠近(원근)을 마련하니 二十四 節候(절후)를 十二朔(십이삭)에 分別(분별)하여
每朔(매삭)에 두 節候(절후)가 一望(일망)이 사이로다
10)서민가사
조선조 중엽인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실학사상과 서민의 각성을 배경으로 해서 서민가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사대부가사에 대하여 서민 곧 양민과 천민들이 지은 가사를 말한다. 김문기는 서민가사를 음영가사와 가창가사로 나누고 음영가사에는 현실비판류의 ‘갑민가’· ‘거창가’·기음노래‘등과 상사탄식류의 ‘거사가’. ‘노인가’등이 있으며 가창가사에는 12가사 곧 ‘수양산가’. ‘상사별곡’등이 있다고 했다.
사대부가사의 내용이 대체로 충군위국, 안빈낙도, 은일충류와 같이 긍정적인 것들인 것과는 달리 서민가사는 현실적 모순의 폭로와 같이 긍정적인 것들인 것과는 달리 서민가사는 현실적 모순의 폭록의 비판, 기존관념에의 도전과 인간본성의 추구, 연정 및 신세한탄, 인생무상과 추리락, 서민적인 소박한 꿈과 소망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들 서민가사의 표현상 특징은 사실성과 해학성이 있고 사설시조와 판소리보다는 혅실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 직접적이고 저항의 대상도 뚜렷했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동학가사와 개화기의 사회등가사및 의병가사로 이어져 내려왔다.
예로는 갑민가와 우부가등이 있다.
수양산(首陽山)의 고사리를 꺾어 위수빈(渭水濱)의 고기를 낚아 의적(儀狄)의 빚은 술 이태백(李太白) 밝은 달이 등왕각(縢王閣) 높은 집에 장건(張騫)이 승사(乘槎)허고 달 구경(求景)가는 말명을 청(請)허자 바람불고 눈비 오랴는가 동(東)녘을 바라보니
11)규방가사
사대부가사와 서민가사는 주로 남성들에 의해서 지어지고 향유되었던 가사였으나, 또 한편 여류들의 손으로 가꾸어진 규방가사가 있다. 이것은 내방가사· 두루마리· 여류가사등으로 불려지기도 하지만 규방가사라고 일컫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또 규방가사의 발생과 전승, 향유는 주로 영남지방 특히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규방가사의 효시는 허난설헌이 적은 규원가로서 뒤에 많은 상사별곡류와 규원상사곡, 원한가, 한별곡등에 영향을 끼쳤다.
규방가사의 형식은 전기가사에 속하는 규원가처럼 3·4조의 정형가사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거의 모두가 4·4조의 변형가사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낙구도 사대부가사와는 달리 4·4조로 끝나고 있다.
(작품-규원가)
父生母育(부생모육) 辛苦(신고)야 이 내 몸 길러 낼 제, 公侯配匹(공후
배필)은 못 바라도 君子好逑(군자호구) 願더니, 三生(삼생)의 怨業(원업)
이오 月下(월하)의 緣分(연분)로, 長安遊俠(장안유협) 경박자 치
만나 잇서, 當時(당시)의 用心(용심)기 살어름 디듸는 듯,
12)개화가사
갑오경장으로 이 땅에 팽배해진 개화사상은 마침내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등에 수많은 개화가사가 쏟아져 나왔다. 최 병헌의 ‘독립가’를 비롯해서 의병가사와 사회등가사인 일급비룩등은 개화가사의 다양성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게 강탈당한 뒤로는 ‘창의가’등 독립투쟁가사는 그때의 사회적 상황을 잘 표현했다.
(작품-셩몽가)
잠을깨오잠을깨오 깁히든잠이셔깨오
그만하면실컷잣지 무삼잠을이리자나
해가도다낫이되고 동리집이다깨엿소
모든일을다하고셔 편이안져노난구나
이때까지 잠자다가 지금깨여무엇하나
게으르고어리셕어 무삼일을하여볼가54)
이것은 문경호의 '셩몽가'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셩몽가'에서는 주변의 온 세계를 살펴보더라도 우리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그리고 문명개화가 뒤늦었음을 자탄하지 말고, 어서 빨리 깨어나서 국권을 회복하고 온 국민이 합심하여 문명개화를 하여 상등국을 건설하자고 권하고 있다.
7.가사의 형식
가사의 형식에는 정형과 변형이 있다.
1)정형가사: 그 음수율이 7자기준구의 연속형식을 이룬다. 곧 1구는 3·4조이며 1행은 내외2구로 3·4·3·4조로서 4음보격인데 행수에는 제한이 없다. 대체로 사대부들에 의하여 지어진 전기가사는 거의 모두가 이 정형가사이다.
그런데 정형가사에는 한 구의 기군자수는 7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3자부터 10자까지 있다.
2)변형가사: 그 음수율이 7자기 준구의 연속형식을 이루는데 1구는 4·4조가 으뜸이며 1행은 내외 2구가 대체로 4·4·4·4조로 제한이 없이 이어진다. 음보율도 정형의 4음보 격에서 2음보격으로 줄어들고 낙구도 종행 앞의 음수율과 같은 4·4조로 되어 있다. (결사구가 없다)
이는 후기가사에 이르러 정형이 무너지면서 민요와 현합되어 변형을 이룩하게 된 것인데 규방가사에 많이 나타난다.
한편 가사의 형식은 시조의 형식과도 비슷하여 발생초기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니 대체로 가사의 1행과 2행이 대구형식으로 된 것은 시조의 초장과 중장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또 가사의 3행은 시조의 종장처럼 되어 어떤 것은 시조의 3장형식이 대구를 이루며 연속체로 길게 늘어나서 가사형식을 이루는 것이 있다.
또 가사의 낙구는 시조의 종장과 같은 형식이어서 심지어 가사가 시조에서 발생했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가사와 시조는 둘 다 고려가요의 형상적 발전과정에서 파생된 쌍생아와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조선조 전기에 대인들이 가사를 장가로 시조를 장가라고 생각하던 의식구조와도 상관있다.
흔히 전기가사는 정형이요, 후기 가사는 변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것은 그 상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작자의 신분에 따르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사는 단형시가 아니라 장형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시형은 3·4조 또는 4·4조의 음수율을 가진 구절이 대구를 이루어 1행이 되고 , 그러한 시행이 대개 100행 내외로써 한 편의 가사 작품을 형식하고 있다. 그러 임란 뒤부터 후기가사들은 대체로 장평화하여 산문성을 띠게 된 것이 많다.
Ⅳ.참고자료
1.국어국문학회,『고려가요, 악장연구』, 서울 : 태학사, 1997
2.박광정,『재미있게 풀어 쓴 고전시가 문학』, 서울 : 좋은날, 1999
3.박노준,『고려가요의 연구』, 서울 : 새문사, 1990
4.박병채,『(새로고친) 고려가요의 어석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4
5.이은출 외, 『국문학개론』, 교학연구사, 2002
6.조규익, 『조선조 악장의 문예 미학』, 민속원, 2005
7.조동일,『한국문학통사2』, 서울 : 지식산업사, 제1판 1982-1988, 제3판 1994
8.조동일 외,『한국문학강의』, 서울 : 길벗, 1994
9.최미정,『고려속요의 전승연구』, 서울 : 계명대학교출판부, 1999
1) 「고려사」 권 70, 지 제 24, 악 1, 『역주 고려사』
「송사」 권 129, 악지 제 82, 악 4․18, 『송사』
2) 성호주, 「선초 악장의 연구」, 『부산대 석사학위 논문집』 제 2권 1호, 1974
3) 조규익, 「조선조 악장의 문예 미학」32쪽, 민속원
4) 조규익, 「조선조 악장의 문예 미학」47~48쪽, 민속원
5) 조동일 교수 저 한국문학통사 2권
6) 도가(道家)에서 이르는 옥황상제가 있다는 곳. 여기서는 한양의 임금님이 계신 궁궐
7) 사정 이야기
8) 사랑을 받음직
9) 어리광이며 애교부리는 태도며
10) 어지럽게. 난잡하게
11) 자연을 사랑하여 자연을 떠나기 싫어하는 마음. 천석고황(泉石膏肓), 연하고질(煙霞痼疾)
12) 궁궐 서쪽에 있던 문으로 영추문(迎秋門)
13) 관찰사의 상징물. 신표(信標)
14) 문무가 모두 조화로움.
15) 섬도적이 구름처럼 몰려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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