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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교회개혁, 개혁(Reformation)인가 변형(Deformation)인가?
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10월 27일
오늘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약 오백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촉발된 이른바 ‘종교개혁’운동은, 그것이 진정한 개혁(Reformation)인지 아니면 단지 변형(Deformation)에 불과한 것인지 오늘날까지도 신구교 간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16세기 개혁자들은 갈등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점은, 많은 학자와 목회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그리스도교 내에서 일어난 16세기의 교회개혁운동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종교라는 배타적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여러 훌륭한 이웃종교가 서로 공존하고 교류하는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세계였기에 교회개혁을 ‘the Reformation’이라고 부를 수 있었으나, 기독교와 불교 유교 이슬람교 등의 세계종교는 몰론 토착종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종교형태가 공존하여 종교박물관이라고 불리는 한국사회에서 16세기 교회개혁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할 뿐 아니라 이웃종교에도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여 저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앞으로는 ‘16세기 교회개혁’이라고 바꾸어 표현할 것을 한국 교계에 정식으로 제안하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16세기 교회개혁자들은 ‘오직 ~만’으로 번역되는 다음의 다섯 가지 명제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만),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 Sola Gratia (오직 은혜만), Sola Fide (오직 믿음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 ‘오직 ~만’이라는 명제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된 배타성과 독선의 교리적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개혁자들의 주장과 한국 교회의 인식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습니다. 이 신학적 명제들은 개혁자들이 살고 있던 그 시대의 사회배경 안에서 태동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족할 뿐 당시 교회가 제시한 복잡하고 어려운 수련과정을 통과하고 허리가 휘도록 교회에 충성봉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에 합당한 영광도 오직 하나님께서만 받으셔야 하며, 교황이나 사제, 또는 교회조직이 그것을 가로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규범에 대해서도,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에 근거하여 신도들에게 무거운 의무를 지워서는 안 된다는 의도로 ‘오직 성서만’을 주장했지만, 그것이 오늘날 신구약성서 66권에 절대가치를 부여하는 성서무오설의 교리를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 자신이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를 평가절하했으며, 요한계시록을 성서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힌 데서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당시 교회의 조직 내에 있었고 조직이 주는 여러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수혜자였습니다.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고 입을 닫고 살아가면 평생 명예와 부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견되는 갈등을 피해가지 않고 교회개혁의 길로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이 그들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라는 말로 번역되는 용어입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지나 ‘종교개혁 500주년’이 4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과연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교회를 이루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2.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
성서의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또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면 편안했을 가정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평지풍파가 일어날 수 있음을 예견하셨습니다. 아래 말씀은 그에 해당하는 성서본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34~3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마을 사람 모두가 마약의 해악을 모른 채 그 환각을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 나서서 “그 약을 먹어선 안 된다”고 말하면 겉으로는 평화롭던 마을에 큰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거짓된 평화는 물리쳐야 하며 바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갈등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교회개혁운동의 초석이 되는 말씀입니다.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은 유럽 전체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으며, 30년 동안 형제끼리 싸우고 죽이는 비참한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변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기득권세력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이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16세기 개혁운동의 후예인 저 역시도 “그것은 진정한 교회개혁운동이었다.”고 흔쾌히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지지했던 영주들의 의도, 오늘날 장로교의 시조가 된 쟝 칼뱅의 잔인한 제네바 통치이력 등 당시 개혁운동의 순수성에 대해서도 검토할 문제가 많지만, 무엇보다 오늘날 개신교, 특히 한국 교회의 배타적 행태를 보면, 과연 개신교의 태동이 그리스도교 전체에 순기능으로 작용한 것인지 깊은 회의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여 개신교의 교회개혁운동, 특히 한국 교회를 개혁하는 일은 우리 모두 평생의 과제로 삼고 풀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백년 전처럼 실제로 무기를 드는 과격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힘들고 더디더라도 끊임없는 의식의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평신도 교우님들’이 보편적으로 깨어나 진실을 알아갈 때 비로소 한국 교회의 개혁은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자들에 의해 개신교회가 태동된 후로 오백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래된 조직은 나태와 안일, 그리고 조직의 생리에 갇혀 초기의 생명력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교회는 치열한 내부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도록 이어진 나태와 조직 자체가 갖는 생리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으며, 오늘날 교회 내부에 깊이 배인 독선과 배타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독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3. 부처님 깨달으신 후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세상에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동안 고민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연못가에서 생각에 골몰하시던 부처님은 물에 반쯤 잠긴 연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연못 속에는 세 종류의 연꽃이 있었습니다. 물 밖으로 활짝 꽃망울을 틔운 연꽃, 물속에 잠겨있는 연꽃, 그리고 반쯤 물에 잠겨 바람이 부는 대로 물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연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생각을 정리하셨습니다. 물 밖에 있는 연꽃은 활짝 꽃망울을 틔웠으니 그대로 좋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물속에 완전히 잠긴 연꽃은 바람이 불어도 물 밖으로 나오기는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에 반쯤 잠긴 연꽃은 비록 지친 모습이지만 바람에 의해 물 밖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연꽃을 위해 바람은 필요했습니다. 부처님은 세상에 신선한 생명의 바람을 불게하고 싶었습니다. 깨달음을 전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불교라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책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에서)
올해 첫 주일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주일’이자 10월 마지막 주일인 오늘까지 저는 꼭 열 달 동안 ‘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주일편지’를 써왔습니다. 원래 계획은 올해 말까지 쓰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교우님들과 나누고 싶었던 얘기들을 어느 정도 나누었다고 생각되기에, 매주 드리는 주일편지는 오늘로 일단락 짓고자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교우님들과 나누고 싶은 주제가 생기면 언제든 다시 인터넷 공간을 통해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매주 글을 올리면서 교우님들과 네티즌들의 반응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제 글을 읽고 도움이 되었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분들이 더러 계셨습니다. 제 글에 날선 비판을 가하거나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며 가엾이 여기는 분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과 신념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저의 필력이 둔하여 수고에 비해 결실이 미약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의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또한 부처님께서 물에 반쯤 잠긴 연꽃의 가능성을 보시고 세상에 깨달음의 바람을 불게 해주신 것처럼, 이런 ‘재미없고 골치 아픈 대화’를 계속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여 제가 그동안 교우님들께 드렸던 주일편지의 내용을 주변의 교우님들과 계속 나누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4. 제가 지은 책과 저의 글을 모아놓은 글방을 소개합니다.
만일 교우님께서 그동안 제가 드렸던 글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주변에 소개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지금부터 소개하는 저의 책과 글들을 함께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대광고를 떠난 이후 다음과 같이 6권의 단행본을 출간하였습니다.
1)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도서출판 삼인, 2005년 5월 발행) :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고발한 책입니다. 2004년에 발생한 강의석 사건, 즉 ‘학교 내 종교 자유’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부록으로 담겨있습니다. 2008년 10월에 개정판을 냈습니다.
2)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 (인물과 사상사, 2005년 12월 발행) :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종교개론서입니다. 2006년 9월에 문화관광부 교양도서로 지정되었습니다.
3) <당신들의 예수> (도서출판 삼인, 2007년 7월 발행) :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의 속편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짚어내고 교회개혁의 방향을 모색한 책입니다.
4) <손에 잡히는 사회교과서 (종교)> (길벗스쿨, 2008년 5월 발행) : 어린이 학습용 참고도서이며, 학부모를 위한 교양도서이기도 합니다.
5) <소설 콘스탄티누스> (인물과 사상사, 2008년 10월 발행) : 기독교가 언제,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배타적 종교가 되었는지 세상에 증언하기 위해 쓴 팩션(fact+fiction)소설입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책이며, 저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 <신의 눈물>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3년 5월 발행) : 한반도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전망하며 종교로 인한 사회갈등이 발생할 경우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고민하며 쓴 팩션소설입니다.
DAUM 카페 <류상태 글방>에는 저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대부분의 방이 글을 읽기만 하는 열람실(댓글은 달 수 있습니다)이지만 <벗님방>에는 직접 글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때로는 거칠고 불편할 수도 있는 졸필을 읽어주신 교우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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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먼저 목사님의 주일편지가 마지막이라기에 아쉬운 마음에 처음으로 댓글을 올립니다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의문스러웠던 여러가지가 주일편지를 읽으면서 정리가 되었고 매주 목사님의 편지를 기다렸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해서 고민하던 의문들이 풀렸습니다
5년전부턴 타종교에 관심도 가지고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고 밝아지는 기쁨도 가지고 있는 중이였는데~~~
당연히 목사님 같은분들의 길잡이가 도움이 되었구요
기독교안에 갇힌 사고에 머물고 싶지 않기에
교회안에선 이방인같은 느낌을 받곤 한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저같이 눈 떠는 사람이 주위엔 있으매 힘내시고 목소리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함
고맙습니다. 스테판님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지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