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꽤 오랫만의 글이다.
오늘은 자본주의에 대한 냉정한 단면을 보여줄 애니메이션 한편을 가져와 본다.
https://youtube.com/shorts/ms2ep-zISLc?si=iSFxrAZrjlVqa68M
어떤이는 자본주의에서 한 부분이지만, 최근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텀블러에 대한 집단소비심리를 좋은 기능이라고 말한다.
어느 전문적인 사회를 보는 자의 안목에서 한치 앞만 보았을 때는 그렇지.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서는 극단적인 폐해가 더욱 심해져 차라리 없는 이만 못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부분만을 원문에서 빼와서 왜곡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치명적임을 감추려는 것이든지 둘중에 하나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일예는 내가 수차례 비판했던 동물의 숲이라는 게임이다.
사람이 극단적인 소비심리에 끌려갈 때 자신의 의지는 깡그리 무시된다.
자유와는 극대칭이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극단적인 소비심리는 마약을 했을 때 만큼이나 좋지 않은 심리상태가 된다.
이것을 어렷을 때부터 방관하는 부모들이 더 나쁜 것이라는 말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
자식 키우는 것이 마음같지 않다고?
자식이 원수로 자랄 바에야 차라리 시도하고 원수가 되야한다.
시도조차 하지 않고 놔두어도 어차피 그런 자식은 커서 부모와 원수가 된다.
부모라는 작자들이 자식들을 고아처럼 내버리고 키웠을 때부터 원수는 이미 된 것이지.
기독교적으로는 정반대적인 용어로 깨어짐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 존재 자체가 깨어져버리고 의식부터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격변을 겪는다.
그리고 그것은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생에서 전반적이며 점진적으로 진행이 된다.
그런데 왜 깨어짐과 정반대가 극단적 소비심리일까.
본래 현대화되어진 인간들은 장기간의 학습으로 기계적인 두뇌구조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르게 되고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하던 많은 것들이 깨어짐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게 된다.
공부를 잘하면 잘 할수록, 계산을 잘하면 잘 할수록, 암기를 잘하면 잘 할수록 사회구조가 요구하는 많은 것들을 잘 할수록 그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조금 지식이 있고, 자신이 저명하다면 저명할수록 예수님을 믿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평생 자신이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믿다가 그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죽어간다.
종국에는 깨어짐을 통해서 얻어진 자유의지를 조롱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기도 한다.
현대인이 가축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지극히 사실이고 당연한 수순이다.
스스로 가축의 길을 걸어가고, 가축들이 무리지어 있으면 없던 포식자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인류가 걸어갈 길이고 선택이었다.
자, 위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얻고 싶은 많은 것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활로를 찾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시도하기에는 애매하고도 어렵다.
왜냐하면 길이 다르기 때문이고 목표가 다르기 때문인 연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