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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강경수 칼럼 *----- 스크랩 마르코 4:10~12 ― 비유의 목적
강경수 추천 0 조회 47 15.03.31 13: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parables)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이사야 6:9~10)

(마르코 4:10~12, 가톨릭 성경)

 

 

  이 인용문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A)와 "그 비유의 설명"(A') 사이에 끼어들어간 단락(B)으로서, 마르코 복음서에서 종종 보이는 A ― B― A'의 구조이다. 이런 문학 기법을 "샌드위치 기법" 또는 "끼워넣기"(intercalation)라고 부른다... 라고 이전에 소개한 바 있다.

  이런 A ― B ― A' 식의 구조에서는, 가운데에 끼어들어간 단락(B)이 으레 전체 문맥 해석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

 

 

  위의 인용문, "비유의 목적" 단락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린토 전서 앞부분(1장~4장)을 정독해볼 필요가 있겠다.

  다만, 코린토 전서 앞부분(1장~4장)은 내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신비가 주어지는 내용을 다룬 반면, 마르코의 "비유의 목적" 단락은 외부 사람들에게 그런 하느님의 신비가 감추어지는 것을 다루고 있다. 즉, 강조점이 서로 다른 데 놓여 있을 뿐으로서, 이를테면 코린토 전서 앞부분은 마르코의 "비유의 목적" 단락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난할 듯.

 

  위의 인용문과 코린토 전서 앞부분에서, 언뜻 눈에 띄는 공통점들만 먼저 지적해 보기로 한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마르코 4:11)은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고전 4:1, 벧전 4:10 참조)

 

  위에 인용된 이사야 6:9~10 구절은, 코린토 전서 2:9의 성경 인용을 연상시킨다 :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이 성경 인용은 이사야 64:4 구절을 다소 변형시킨 것으로서, 딱 맞는 성경 구절은 따로 없다. 다만, 이 구절 역시 내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신비가 주어진다... 는 것을 다룬 반면, 마르코의 이사야 6:9~10 구절은 외부 사람들에게 그런 하느님의 신비가 감추어진다... 는 것을 다루고 있다. 강조점이 서로 다른 데 있는 셈이다.

  이 코린토 전서 2:9 인용문은, 초기 기독교 문헌 가운데 "이사야의 승천"의 일부 사본들(라틴어2 사본과 슬라브어 사본)에서 가져온 것 같다 :

 

이 천사는 나에게 말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여, 그대에게는 이걸로 충분하다. 이런 일들은 굉장한 일들로서, 육신을 타고난 자들이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너는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정말 굉장한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느니라."

("이사야의 승천" 11:34, 라틴어2 사본과 슬라브어 사본)

 

  코린토 전서 2장은 영지주의 색채가 다소 들어간 단락으로 보이는데, 이 단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의 승천"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정도만 지적하고 그치겠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마르코 4:10~12)의 전체 논조는, 코린토 전서의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고전 2:6~7)

 

  요컨대, 마르코 4:10~12의 "비유의 목적" 기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린토 전서 앞부분(1장~4장)을 정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만, 마르코의 "비유의 목적" 기사와 코린토 전서 앞부분은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이 차이점만 유념하면 되겠다.

 

 

  그럼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물어 보자 :

  왜 마르코 저자는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parables)로만 다가간다"라고 선을 그었을까? 마르코 저자는 "비유"의 목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건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비유"가 아니다. 즉, 일반인들이 곧바로 이해하기에는 뭔가 어렵고 심오한 내용을 쉽게 가르치기 위한 "비유"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상징, 알레고리(allegories), 외부 사람들에게 자기 분파의 메시지를 감추기 위한 코드, 일종의 영적인 우화... 식의 이미지다. 

 

  이 때문에 마르코 저자는 초기 기독교에 흔히 보이는 일종의 "분파주의"(sectism) 성향을 보이는데, 자기 분파의 메시지를 외부 사람들에게 감추기 때문이다.

  나아가 마르코 저자의 이런 "비밀주의"는 영지주의 성향을 다소 드러내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마르코 4:10~12의 "비유의 목적" 단락은 꼭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기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코 복음서에서 종종 나오는 "비유"의 목적을, 아니 더 나아가 마르코 복음서 전체 이야기의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서 전체가 일종의 상징적인 이야기, 영적인 우화처럼 읽히면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서 전체가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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