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들어 올렸을때 이미 꼬리 드러나”- - 무언의 설법 ‘정법안장 교외별전’-
世尊昔在, 靈山會上, 拈花示衆. 是時衆皆默然, 惟迦葉尊者, 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咐囑摩訶迦葉. 無門曰, 黃面瞿曇, 傍若無人, 壓良爲賤, 懸羊頭賣狗肉. 將謂多少奇特, 只如當時大衆都笑, 正法眼藏作마生傳, 設使迦葉不笑, 正法眼藏又作마生傳. 若道正法眼藏有傳授, 黃面老子?? 閭閻, 若道正法眼藏無傳授, 爲甚마獨許迦葉. 頌曰, 拈起花來, 尾巴已露, 迦葉破顔, 人天罔措. *세존(世尊)께서 영산(靈山)의 법상에 오르시어 꽃잎 하나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다들 의아하게 좌우를 둘러보는데 오직 한 사람, 가섭(迦葉)존자만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내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 *나 혜개가 말한다. 황금빛 얼굴의 고타마는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거창하게 내걸더니 겨우 꽃 한송이. 기특이야 하지. 그러나 그때 대중 모두가 웃기라도 했으면 정법안장을 어찌 전했을 것이며, 또 혹 가섭이 웃지 않았더라면 정법안장을 어떻게 전했을까. 정법안장이 전해지는 것이라면 얼굴 누런 늙은이는 순진한 사람들을 속인 것이 되고, 또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유독 가섭에게만 허여했는가. *송하여 가로되, 꽃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꼬리는 드러난 것. 가섭이 미소짓고 인천(人天)은 어쩔 줄 몰라.
그동안 세존께서는 참 많은 말씀을 하셨다. 최초의 법륜에서부터 소승, 대승, 밀교, 정토교까지. 그런데 선은 이렇게 잘라 말한다. “진짜 세존의 가르침은 그곳에 있지 않고, 바로 이 회상(會上)에서 무언(無言)으로 전해졌다.” 이 공안은 선의 법문이 불교의 정통 권위를 이어받고 있다는 변호, 혹은 자부심을 보여준다. 이 말씀 아닌 말씀을 전해 들은 사람은 다름 아닌 가섭(迦葉)이었다. 지혜(智慧)가 뛰어나다는 사리불(舍利佛), 신통이 남달랐다는 목건련(目健連)을 제치고 두타제일(頭陀第一)의 가섭이 세존의 정법안(正法眼)을 넘겨받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설정은 선이 논리적 변증이나 초세간적 기적에 대해 냉담한 한편, 수행의 규율을 일상의 삶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세존이 전한 것의 내용이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고 했다. 이 구절들은 동일한 실재를 여러 각도에서 소묘하고 있다. 1) 정법안장: 세존의 말씀, 그 팔만사천 장광설의 곳간을 삼장이라 한다. 이에 대해 선은 삼장에는 없는, 그러나 ‘진정한 진정한 지혜의 눈’이 담긴 곳간(正法眼藏)이다. 2) 열반묘심: 생사를 떠난 자리, 모든 이분법적 분열이 사라진 자리가 열반이다. 이 말은 욕망의 타는 불이 꺼졌다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에서 왔다. 그렇다고 이곳을 의지도 정서도 없는 막막한 정신의 풍경으로 오해해서는 안되는데, 돌에 피는 꽃처럼, 그렇게 욕망이 차단된 자리에 절대의 움직임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진정한 신비(妙)가 그곳에 있다. 3) 실상무상: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바대로의 표상(相)이 진정한 실재가 아님을 통찰한다면 그때 여래(如來)를 볼 것이다.” 여래가 바로 실상(實相)이다. 그것은 지혜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 보는 일이다. 우리네 일반적 인식은 욕망과 집착에 오염되어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같은 징표가 없다. 그래서 무상(無相)이다. 4) 미묘법문: 진리가 미묘하고 신비적이다. 혹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포착하기 어렵다. 상대적 인식의 표징을 결여하고 있는 소식을 알려주기는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미묘한 법을 설하는-아니 설할 때 이미 상대적 인식의 표징으로 떨어지므로, 설 아닌 설의-방편은 당연히 미끄러울 것이다. 그래서 미묘법문이다.
5) 불립문자: “꽃 한송이를 들었다.” 이 소식을 알겠는가. 선의 법문은 언어를 통하지 않은 단순하고 직절적인 행동이 주조이다. 마지 못해 언어를 통한다 해도 역설과 반의, 모순과 미로 등을 통해 일상적 인식을 두드리는 충격요법을 통해 그 너머의 진실을 알린다. 6) 교외별전: 정법안장과 짝을 이루고 있다. 교(敎)란 삼장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이 가르침 밖에 따로이 전한 그 소식이 바로 교외별전이다. 불립문자와 함께 선의 특징을 단적으로 일러주는 말이다.
열반의 묘심은 일상적 인식의 징표를 넘어선다고 했다. 그러니 전할 수도 없고 전해받을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웬 양두구육, “양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시다니.” 무문은 말한다. 꽃 한송이도 일상적 징표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 거창하게 내걸더니 고작 꽃 한송이를 내미시냐. 그 어색한 꽃 한송이는 대자비(大慈悲)의 기특한 일이지만 궁극은 그런 기특한 방편을 넘어서 있다. 고마움과 어긋장의 복합, 무문의 절묘한 억양을 여기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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