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영천이씨는 입향조 이헌(李軒)이 군기시소윤을 지내다가 고려 말에 영천에서 안동으로 이거한 후 후손들이 도산면 일대에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연원]
영천이씨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시조 이문한(李文漢)의 후대에 내려와서 이약(李約)을 파조로 하는 서승공파(署丞公派), 이대영(李大榮)을 파조로 하는 영양군파(永陽君派), 이중영(仲榮)을 파조로 하는 울산공파(蔚山公派)로 분파되는데 안동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 이대영의 5세손 이헌의 후손들이다.
[입향경위]
고려 말 군기시소윤의 벼슬을 지내던 이헌이 국운이 기울어갈 때 영천에서 산수가 아름다운 예안으로 이거하여 정착함으로써 예안은 영천이씨 소윤공파(少尹公派)의 입향지가 되고 이헌이 파조가 되었다. 현재의 예안면 분천리에 자리잡은 영천이씨는 대대로 벼슬길이 끊이지 않아 이헌의 아들 이파(李坡)와 이오(李塢)는 각각 의흥현감과 예문관직제학을 지냈고, 손자 이효손(李孝孫)은 통례문봉례, 증손 이흠(李欽)은 인제현감을 지냈다.
이헌의 현손이며 이흠의 아들인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어부가(漁夫歌)」, 「농암가(聾巖歌)」, 「효빈가(效嚬歌)」 등 불후의 한글 시가를 남긴 가사문학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현보의 동생 이현우(李賢佑)는 분천에서 낙동강 상류인 사천으로 분가하였으며, 아들 이충량(李忠樑)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인 박승장의 사위가 되어 영주 구룡동(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로 이거하였다. 이충량의 아들 간재(艮齋)이덕홍(李德弘)은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제자로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등의 저서를 남긴 조선 중기의 유생이다.
이현보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이석량(李碩樑)은 일찍 죽고, 차자 벽오(碧梧)이문량(李文樑)은 평릉찰방, 3자 이희량(李希樑)은 봉화현감을 지냈고, 4자 이중량(李仲樑)은 문과에 올라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5자 이계량(李季樑)은 현감을 지냈으며, 6자 매암(梅巖)이숙량(李叔樑)은 사마시를 거쳐 왕자사부가 되었으며, 7자 이윤량(李閏樑)은 내의원판사, 8자 이연량(李衍樑)은 사복시정을 지내는 등 예안에 정착한 영천이씨는 이현보 이후 안동 지방의 이름 있는 가문으로 발전하였다.
[현황]
영천이씨는 안동댐 건설로 세거지가 수몰되면서 후손들은 흩어지고 종택을 비롯한 유적들도 훼손되거나 여러 곳으로 분산, 이건되어 옛 모습을 잃게 되었다. 현재 도산면 원천리에 집성촌이 있다.
영지산(靈芝山) 오지랖에 자리하여 동북으로 十리에 이어 펼져진 陶山들판을 꿰어 누비는 汾江(洛東江상류)을 바로 무릎앞에 깔고, 이름 그대로″푸른 병풍″이런 듯 東 - 南을 에워 두른 翠屛山을 마주 보는 汾川마을은 그 수려한 풍광이 그대로 그림이 었는데..... 永川 李씨가 이 터전에 주인이 되기는 一四세기 중엽 松都 五百年 왕조도 기울어, 세상이 자못 뒤숭숭할 무렵, 고려에 軍器寺少尹을 지내던 李軒을 入鄕祖로 해서다. 神虎衛大將軍으로 永陽君에 봉해진 시조 大榮의 六세손인 李軒이 어지러워 가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향 永川을 떠나, 깊숙하고도 泉石이 아름다운 여기 汾江 굽이에 安住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山川의 정기가 온통 鍾集 된 듯 양명 수려한 汾川에 정착하자, 입향조 軒의 현손인 聾巖 이름 賢輔을 전후하여 숱한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 고장의 명문으로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여기에 터전을 열은 軒의 아들 坡는 太宗때 현감, 塢는 禮安고을의 첫급제로 藝文館直提學파의 손자 欽은 현감, 흠의 아들 賢輔가 청직한 인품에 효행이 도타왔고, 司馬·文科에 급제, 戶曹·刑曹參判을 거쳐 知中樞府事로 崇政大夫에 올랐으며, 詩文에 뛰어나 漁父詞며, 시조 聾巖歌등 훌륭한 작품을 남겨, 國文學史에 빚을 드리웠다.그 아들 文樑이 察訪, 希樑이 承旨, 季樑이 군수, 叔樑이 퇴계문인으로 進士. 글씨에 뛰어났으며, 임진왜란에 의병장, 潤樑이 역시 퇴계문인으로 文科에 급제, 內醫院正을 지내고, 의학에 정통, 明나라에 가서 神宗황제의 포상을 받는등 여러 형제가 모두 현달했다. 농암의 증손 芸이 軍資監主簿를 지내고, 임진왜란에 곽재우장군을 도와 활약했으며, 후손 用正이 進士로 文行이 있었고 昌葉이 효행으로 旌閭, 元承이 진사, 起郁이 병자호란에 의병으로 雙嶺서 전사했다. 농암의 아우 賢俊이 察訪, 후손 德弘 (호 艮齋) 이퇴계 高弟로 性理學에 깊었으며, 그 아들 시(蒔)는 鄭寒岡 문인으로 학문에 독실하여, 많은 후진을 길렸다. 현준의 손자 德承은 進士로 主簿를 지냈다.
聾巖에 올라 보니 老眼이 猶明이로다. 人事 - 병한들 山川이딴 가샐가, 巖前에 某山某丘이 어제 본 듯하여라.
이는 너무도 유명한 聾巖歌 - 李聾巖이 四○여년 벼슬길에서 歸去來를 부르며 물러와, 고향의 예런듯한 모습이 하도 반가와 읊저린 노래다. 영화롭던 옛꿈을 속삭이는양, 바로 몇해 전까지만해도 汾川에 소스라니 보존되어 오던 유서 깊은 옛 자취들 - 漁父詞로 흥을 도두던 汾江이, 작은 배를 매던 江언덕 버들 숲이, 여울 소리에 세상 시비를 흘리며 낚시를 드리우던 聾巖반석이, 誠孝로 어버이를 모시던 愛日堂이, 그리고 보배로운 유적을 숱하게 간직해 오던 聾巖舊宅이며, 聾巖을 제사하고 선비를 기르던 汾江書院이.... 安東댐 으로 하여, 망망한 湖水에 잠겨, 그 터 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실로 滄桑의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