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살기”를 돌아보고 내다보며
김홍술(전목사, 부산예수살기)
1. 그때 가슴이 뜨겁지 않았었나요?
2007년 5월쯤 이었을까? 허세욱 열사 분신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한상렬 목사는 “아, 전태일 열사다!” 하는 영감을 받고 전율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즈음 MB 정권의 초기에 운동이 지리멸렬해 가는 모습을 보고,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민중투쟁 운동에 합류하는 등 행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운동권의 대동단결의 과제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나 봅니다. 특히나 오랜 운동권의 계파인 ‘민족(NL)' 진영과 ’민중(PD)'진영이 통합해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시대적 요청을 감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민족진영의 대표적 조직’인 ‘통일연대’와 ‘민중진영의 대표적 조직’인 ‘민중연대’를 통합해 ‘진보연대’라는 전국 단일대오를 결성하자는 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한 목사의 이러한 절절한 운동조직에 대한 심정의 배후에는 사실상 목회자들의 운동전선이 거의 와해되어 있음을 보고, 이른바 성경의 ‘숨겨놓은 7천명’에 희망을 걸었고, 단 50명의 목사라도 찾아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기도 중 그는 벌떡 일어나 만날 대상자 명단을 들고 전국의 곳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충청, 강원, 경북, 경남, 전남에 이어 부산에 이르렀습니다. 혼자 온 한 목사는 A목사와 나를 찾았습니다. 각각 따로 한사함씩 독대한 한 목사는 커피숖에서 격정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슴을 열었습니다. ‘때가 찼다’고 하였습니다. 예수혁명의 뒤를 잇겠다는 목사들이 다시 암울해 지는 역사의 한 복판에 몸을 던질 때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목사 동지들이 이 전선의 맨 선두에서 장렬히 산화할 수만 있다면, 전태일 허세욱 열사 앞에 부끄럽지는 않을 거라는 절규였습니다.
이후 이렇게 한 목사의 열정에 포섭(?)된 전국의 동지들은, 그해 어느 여름날 자신이 시무하는 전주 고백교회에 초대를 받고 모여들었습니다. 과연 50여명이 동지적 결사가 가능할까 마음 졸였으나, 놀랍게도 전국 방방곡곡 제주도까지에서 75명의 동지들이 모였습니다. 전주 고백교회의 하룻밤은 용광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진보연대 종교분과위원회’란 기독교 운동 목회자 조직인 “예수살기”의 깃발이 막 다 그려지는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전국에서 모인 동지들은 진보연대로의 운동의 대동단결이라는 경과와 결성에 이르는 당위는 공감했지만, 일단 출발은 순전한 “예수살기”로만 결성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판은 거의 ‘전국진보연대 종교분과 기독교위원회’ “예수살기”에서, 앞머리의 모든 조직적 명칭을 모두 접고 그냥 “예수살기”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준비조직으로 지역별로 한두 명씩 두고 그 책임자는 김경호 목사를 지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활화산처럼 번개의 섬광처럼 뜨겁고도 격정적인 역할로 그 몫을 다한 한 목사의 선구적인 막은 내리고, 차분하고 온화한 논리적 이미지로 신망을 받는 김경호 목사에게 “예수살기”의 기초를 놓는 과업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현장에 뛰어갔습니다.
“예수살기” 조직의 준비과정은 지역조직이 먼저 결성되면서 지역을 기반으로 네트워크와 통합적 연대체인 중앙조직을 갖춘다는 일정목표를 정하였습니다. 이어 수도권 지역 조직에 이어 부산조직이 이듬에 이어졌고, 전북 전남 대전 등 순으로 지역조직이 계속 이어지리라 전망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상 밖으로 지역조직 건설이 속도가 미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서울과 부산 대표자들은 중앙조직 건설을 더 늦출 수 없다는 공감 하에 중앙조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중앙조직의 건설이 지역조직의 촉매제 역할도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살기”는 처음부터 지역조직과 중앙조직의 관계성 설정을 깊이 고려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지역조직 건설이 더뎌지고 중앙조직의 사무국이 꾸려지자 기다렸다는 듯 촛불정국이 펼쳐졌습니다. 예전 운동권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그리고 무관한 새로운 운동의 출현이었습니다. 단순한 미국산 수입 쇠고기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촛불은, 어린 여중생들의 반란으로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었으나 곧이어 학생들을 넘어서서 일반대중으로 삽시간에 번졌습니다. 서울 세종로를 꽉 메울 뿐 아니라 전국 대도시까지 번지는 양상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촛불행진은 유모차를 밀고 나오는 젊은 부인들과 넥타이부대까지 번졌고, 새정부 MB정권은 놀라 당황하면서 이른바 ‘명박산성’이라 불리는 컨테이너로 차단벽을 쌓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초유의 사태에 기존 운동권 연대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런 정국에 “예수살기”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현장으로 촛불을 들고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촛불을 주최하는 주체를 찾고 그 주체와 협의하는 과정이 무의미 했습니다. 촛불은 마치 수백만 마리의 물고기 떼처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바다와 오프라인 현장이 하나가 된 희한한 ‘흐름’이요 ‘바람’이었습니다. “예수살기”는 다만 그 현장에 뛰어들고 참여하는 단순한 행동 외에 더도 덜도 없었습니다.
참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났습니다. 즉 기독신앙인으로서 촛불예배로 촛불에 참여하는 ‘촛불교회’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촛불교회는 작은 천막 하나와 촛불과 성경찬송만 준비하면 되는 단순하고 소박한 몸짓이었습니다. 가장 연약하면서도 가장 저항적인 촛불교회는 촛불이 흐르는 한 가운데서 흐르는 대로 같이 흘러가고 멈추면 같이 멈추었습니다. 마치 옛날 히브리민족이 광야를 거치면서 장막을 치고 걷고 하듯 하였습니다. 촛불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참된 현장기도가 가능했고, 역사의 현장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촛불교회는 2009년이 밝아오는 1월 20일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용산참사의 현장에 뛰어갔고 거기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민중의 처절한 원한과 절규가 사무친 현장, 불탄 그을음과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현장에서 추위에 떨면서 철거민 당사자들과 같이 울고 같이 목 놓아 부르짖었습니다.
MB정부는 우리 "예수살기“를 제대로 예수살기 하도록 자극을 주는 어쩌면 정말 고마운(?) 정부이기도 합니다. 4대강 사업으로 온통 국토를 헤집는 강 길을 따라 강의 노래를 불렀고, 천안함 침몰사건을 통해 은폐와 기만으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더욱 고착시키려는 책동에 분노와 슬픔으로 함께했습니다. 우리의 발길 행로에 조소하는 자 비난하는 자 앞에서도 꿋꿋이 그 길을 그대로 걸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걸음으로 가야 할 곳이었고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 예수살기는 교회운동입니다.
그러면 “예수살기”가 ‘사회정의 운동’이요 ‘역사변혁 운동’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아니라고요, ‘신앙운동’이요 ‘교회운동’도 된다고 답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살기”의 중심 기조를 보면 적어도 신앙운동은 출발에서부터 기본의 위치에 지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운동과 함께 교회운동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닌 ‘예수의 신앙’ 즉 하느님과의 관계적 신앙이요, 하느님의 나라(통치)에 관련한 신앙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해석하고 해석된 예수에게 전적 귀의와 믿음을 넘어선, 예수의 신앙적 삶으로 들어가 하나 되는 ‘삶의 신앙’이요, 오늘날 많은 관심의 주제가 되는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살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신앙’에 왜 ‘운동’을 붙여야 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또 ‘교회’도 왜 ‘교회운동’이란 운동을 굳이 붙이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냥 신앙이라고 하면 그 신앙이란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신앙으로서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마 ‘흔들리지 않는 반석’을 상징화하면서 의지의 대상에 전적귀의를 통해 얻는 신앙이기에, 그래서 그 원조 격인 보수성과 전통과 정통성이 자리를 잡게 되는 가 봅니다.
성경에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와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에서처럼, 신앙은 의문(의식과 문자)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상’을 깨는 것이요 ‘상’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반드시 움직이고 흘러야 한다는 겁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새로운 물들과 합하고 장애물에 부딪히고 달리면서 더욱더 살아있는 물로 거듭나는 생태를 가진다는 말씀입니다. 움직이는 운동성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운동체입니다. 개인의 영성적 삶이 있듯이 공동체인 교회도 움직이며 생동하는 유기체입니다. 여기서도 움직임이란 운동성은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사귀는 일련의 고정 프로그램화 된 활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조화 되고, 관념화 되고, 타성화 됨에서 안정과 평안을 누리는 교회, 이런 공동체적 의식과 행동에 저항함으로써 더불어 생명성을 찾아가는 집단적 운동을 말합니다.
우리 “예수살기”에 그것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교회개혁운동’이나 ‘교회연합운동’을 말하기에 앞서 교회 자체가 운동성이 있는가를 묻는 물음에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써의 교회를 말하려는 겁니다. 우린 아직도 여전히 기존의 교회전통, 관습, 교리,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인은 교회로부터 교역자는 교단으로부터 자유롭고 주체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 하는, 구조적이고 생태적인 한계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를 생각해야 교회운동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4. 밖에서 바라는 교회, 안으로 부응하는 교회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기독교 성장은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성장도표뿐 아닙니다. 교회의 도덕적 타락도도 도를 넘어섰습니다. 교리와 선교의 일방통행 식 폭력성은 종교의 특성을 구실삼아 사회적 윤리성마저도 무시해 버리고 짓밟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미신적이고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행태는 차라리 소아기적 종교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맘몬과 권력의 마수에 잡혀 진실과 순전함을 팔아넘기면서 자기기만에 깊이 빠져있는 영악한 영혼들이기에, 앞서 언급한 소아기적 영혼들을 밥으로 삼는 현실인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기독교에 분노를 넘어 증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심각성에서는 기독교에 버금가지는 아니지만 종교 전 영역이 깊은 밤으로 빠져드는 건 아닌지...
극성스런 안티기독교의 출현은 무엇을 말하며, 사이비 종파나 신흥종교의 출현들은 또 무엇을 웅변해 주는 것일까요. 종교권력에 짓눌린 민중들은 허탈과 분노에 영혼들이 병들어가고 있으며, 해갈할 오아시스를 찾아 대안의 광야를 헤매는 형국입니다. 새로운 교회를 요청해도 응답이 없고, 밖에서 새로운 기독교를 바라도 기척이 없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썩어 냄새가 나도 차마 인간관계(인정이나 생존네트워크)를 저버리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소속한 교단이 악마의 노리개로 변질되어 있음을 뻔히 보면서도, 이리저리 물려있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미적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자신이 처한 교회와 교단에 저항의 몸을 던지든지 탈출해 나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할 건 아닌지... ‘무용무용’이란 말이 있더군요. 용기가 없는 사람은 쓸모도 없다는 뜻이라 하더군요.
이미 세계의(서양 중심적 사고로 볼 때) 궁극적 관심의 이동이 동양으로 옮겨졌고, ‘동서양의 만남’이라든가 ‘동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이 출현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역사적 예수연구와 인간예수 찾기가 활발하게 진행되자, 알려진 바대로 교회의 기초가 크게 잘못 놓였지 않았는가 하는 논의와 성찰이 일고 있습니다. 즉 권력(땅의 권세)에 영합한 교회가 정통성을 확보하고 다른 다양한 전통들을 축출하거나 압살해 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겁니다. 니카야 주교회의에서부터 칼케돈을 거쳐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르는 굴절의 역사를 왜 모르는 체하고, 덧칠하고 왜곡된 교회의 비극을 알면서도 눈 지그시 감고 있는가 말입니다.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가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남단 부산 땅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2000여년을 이어온 세계교회가 왜 하필 이 역사적 정점에 한국과 한국교회를 찾아오는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기독교 성장신화를 경하하려고 오는 겁니까, 아니면 세계에 유례없는 분단과 냉전의 땅에 화해와 평화의 천사로 온다는 말입니까. 한국교회는 세계교회를 맞이하면서 무엇을 내 놓겠다는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이제 대형교회와 교단의 정치적 흥정거리의 기관으로 전락된 지 오랜 이야기입니다. 총무를 비롯한 스탭들의 급여가 철저히 보수적인 교인들의 헌금에서 시작하여 교단교권에 세례를 받아 공급되는 것이 아닌가요. 헌금의 근원이 그렇다하더라도 세탁(세례)이라도 제대로 되었다면 저항의 생명력이 살아 움직일 수 있을 터인데, 현재의 구조로 볼 때 기대는 요원한 숙제일 뿐입니다.
5.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군요. 인생 가을을 맞고 겨울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시간이 빠르다는 걸 느끼는 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는 겁니다. 50대 중반의 한 사람의 생각입니다. 저 또한 20대를 시작하면서부터 무던히도 몸부림치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시간은 그래도 가는군요. 가만히 뒤돌아보니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어릴 적 나를 불러 세우시고, 나이 들어 가난한 걸인들 속에서 나를 불러 그곳에 세웠더군요.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세월에 어떻게 펼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마무리 할 건가를 생각게 되더군요.
하느님은 저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한 교회 품안에서 신앙이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헌데 20대 저항하는 힘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저항하였고 고이 성장할 수 있는 교단신학교에서 축출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 저를 한국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민족 주체적이고 혁명적인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 기사회생 시켜 보내주셨지요. 거기서 목사도 되었고 가난한 걸인목회를 20년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혁명적이고 저항적인 복음교회답지 못하다고 저항하다가, 결국 교단역사 73년 만에 영광스런 첫 출교 테프를 끊음으로써 두 번째 교회의 축출을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요로를 통해 ‘사과’ 한마디만 하고 복귀하라는 종용과 회유가 있습니다만, 이미 복음교회는 복음교회이기를 포기했고, 교권을 인정하라는 얘기로만 들리니 씁쓸한 심정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제가 복음교회 교단에 마지막 달랑달랑 할 때 “예수살기” 운동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물론 KNCC와 주변 에큐메니칼 운동권에서 여러 동지여러분을 만났었으나, 우리가 “예수살기”로 만남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비슷한 즈음 대안교회와 실험교회들의 한마당을 만들어가고 있던 중, 요즈음은 ‘새로운 기독교 건설운동’까지 동지들이 부르고 있는 현황입니다. 이렇게 황혼의 노을은 점점 붉어져만 가는데 몸을 가만 두지 않는군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주변에서는 몸을 혹사시키지 마라, 몸도 생각해라, 여유를 가져라 말들이 많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냥 그 몸으로 그길 그냥 가다가 스러져도 족하다면 말입니다.
“예수살기”에서 만난 동지들이 있어서 제겐 교회운동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함께 마지막 이 한 몸 여러분과 함께 한국교회 역사의 전선에 바칠 수만 있다면 더 없는 영광이 있을까 싶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년 11월 1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