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게 모두 진실일까
이번 주 주제인 ‘눈’ 이나 ‘봄’과 관련해서 어떻게 글을 쓰나 하다,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춘추복을 입었을 때다. 담임선생님은 일주일 마다였는지 한 달 마다였는지 한 줄씩 앞으로였는지 뒤로였는지, 아무튼 자리 이동을 시키셨다. 어떻게 해서 내가 맨 뒷자리에 앉게 되던 날.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였다. 얼보이고 집중도 안 되고. 나는 아빠에게 맨 뒷자리에 앉으니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인다며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얘기를 한다. 사실, 안경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친구들 안경 쓴 모습이 부러워서 어떻게든 안경을 써보고 싶은 마음에, 아빠에게 속마음은 가린 채 기회는 이때다, 하며 말한 것이었다. 그때도 튀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하여튼, 특별히 눈이 나빠져 그런 건 아니니까 보안경을 쓰라는 안경사의 말로 이 해프닝은 일단락되었다.
요즘 안경은 시력을 교정하기보다는 하나의 패션 소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어느 모임이든 열 명 가운데 한 대여섯 명은 안경을 쓰고 있다. 그만큼 세상이 혼탁하다는 뜻이겠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사막에서는 사방이 다 트여 있고 모래밖에 없는 터라, 수백 킬로미터 앞에 있는 낙타의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분명 검은 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텐데도, 낙타가 몇 마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육안(肉眼)으로 보는 가시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육안으로 보는 게 다는 아닐 터.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친구 중에 취미로 사진을 찍는 이가 있다. 하루는 그 친구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린 왕관처럼 생긴 정체가 궁금해, 이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부추꽃이란다. 전체는 왕관처럼 생겼는데, 각각의 왕관 모서리처럼 생긴 곳에는 또 다른 작은 왕관 모양처럼 아주 앙증맞고 잘잘한 이파리가 있다. 나중에 동네를 산책하면서, 친구는 이 꽃이 부추꽃이라고 가리켜 주었는데, 사진 속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실물로 보는 건 아주 작은 들꽃 같았다. 애기 손톱만한 아주 작은 꽃잎이 여러 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친구는 부추꽃 다발을 찍은 게 아니라 부추꽃 한 송이만을 확대해서 찍은 거였다. 이걸 ‘접사’라고 하던가. 잘 모르겠다. 순간 든 느낌은 ‘실상’과 ‘허상’에 대한 혼돈이었다.
내가 내 몸의 일부인 눈으로 본 그 부추꽃은 내 눈에 비친, 작고 앙증맞은 그냥 스쳐 지나가며 보는, 그런 들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 속 부추꽃은 화려함에 고귀함까지 풍긴,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그 자체였다. 어떤 게 부추꽃인가? 내가 동네에서 본 부추꽃이 진짜 부추꽃인가, 아니면 확대해서 세밀하게 들여다 본 사진 속 부추꽃이 진짜인가?
내가 내린 결론은, 둘 다 부추꽃이다. 내가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그것만 부추꽃 ‘너’라고 말할 권한이 내게는 없다. ‘너’는 너일 뿐인데, ‘내’가 어떻게 ‘나’의 눈으로 본 것만이 진짜 ‘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거는 사물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일일 것이다.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의 눈만을 믿지 않으려 한다. 육안으로만 보는 대상을 전부라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겠다.
내가 여러 차례 읽어 온, 말로 모건이 쓰고 류시화가 옮긴『무탄트 메시지』(정신세계사, 1994)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말로 모건이라는 미국의 여의사가 자신들을 일컬어 참사람 부족이라고 하는 호주 원주민들과 넉 달 동안 함께 지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문화인을 가리켜 ‘무탄트’(mutant)라고 한다. 돌연변이란 뜻이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인은 순수한 인간성을 잃어버린 변종이라는 것이다.
참사람 부족은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며 자연스레 동식물과도 교감하고 놀라운 텔레파시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육안이 아니라 심안(心眼)으로 사물이며 사람을 본다. 그들의 육안을 넘어 심안에까지 이르고, 마지막에는 혜안(慧眼)에까지 이르는 그들의 삶을 닮고 싶을 뿐이다. 책 속에 담긴 몇 구절을 읽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울림을 느껴 보기를 바란다.
“모든 준비는 갖추어져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모든 일은 필요한 때에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30쪽)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었다. 사람이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각을 전달한다면 문자와 언어의 차이가 대화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했다. … 말은 마음이나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해 말을 하면 사소하고 불필요한 대화에 빠져들기 쉬우며, 정신적인 대화로부터는 아득히 멀어진다. 목소리는 노래와 축제와 치료를 위해 있는 것이다.”(96-97쪽)
“축하란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건데, 나이를 먹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이를 먹는 데는 아무 노력도 들지 않아요. 나이는 그냥 저절로 먹는 겁니다. …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117쪽)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당신의 영혼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그 사람의 어떤 면을 보고서 감탄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그런 특징을 갖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 사람의 어떤 행동과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 또한 자신의 그런 점들을 고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 존재의 어떤 차원에서 그것과 똑같은 장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과 그 사람은 단지 자기 수행과 표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156쪽)
이연수(2012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