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쉬어가며 즐기기 - 22. 6. 14
2022년 6월 14일 불날 날씨 : 이른 아침부터 비가 소록소록 내린다. 낮에는 비가 그쳤는데 여전히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제목 : 하루 쉬어가며 즐기기
새벽에 화장실 가는 것 때문에 잠깐 깼을 때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5시 30분에 아침 채비 때문에 일어났더니 비가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비가 어느 정도 내리고 있나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왕규식 선생님이 일 나갈 채비를 하고 툇마루에 앉아 계신다. ‘매실 따기 어렵겠죠?’라고 물었을 때 당연한 답으로 ‘힘들지’라는 말이 돌아온다. 창고 일도 그다지 할 게 없는 걸로 알고 있어서 뭘 하면 좋을지 여쭤보니 쉬다가 우산 쓰고 악양 벌판을 걸어보면 좋다고 한다.
아침에 일을 하지 않으니 아이들을 일찍 깨울 까닭이 없어서 아침 채비만 마치고 자리에 더 누워서 잠을 청한다. 그런데 어제, 그저께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질 않는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과 뭘 해볼까 이것저것 궁리를 해 보기 시작했다. 뭘 그다지 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선생이 어떤 제안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지기 때문에 해 볼 만한 거리를 미리 찾아둬야 한다. 비가 오니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거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늘 만만한 것이 박물관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국립 진주박물관인데 또 좋은 것이 진주성 안에 있어서 임진왜란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왕규식 선생님 말씀처럼 잘 쉬다가 악양 벌판이나 걸어보고 그걸 시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존중해 주고 잘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8시에 아이들을 깨워서 아침을 먹인 뒤 아침열기를 하면서 물었더니 잠집에서 쉬는 것보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도훈이와 시우 둘 다 좋아한다. 그래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나가기로 하고 아침나절에는 자유시간을 가진다. 이번 자연속학교에서는 아침식사 채비와 뒷정리까지 선생이 하기로 했는데 밥을 천천히 먹기도 하고 줄곧 말장난을 하면서 노느라 밥 먹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아이들을 기다리다 뒷정리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부족한 잠이 몰려왔다. 잠깐 자리에 눕는다는 것이 한 시간을 넘게 자 버렸다. 그동안 뭘 하고 있나 하고 보니 아이들은 고양이들을 보면서 또 말장난을 하면서 잘 놀고 있다.
12시 30분에 진주성으로 떠나서 2시 조금 전에 닿아 진주성 안부터 둘러본다. 비가 올 듯 말 듯 한 안개비도 아닌 것이 화창한 날 거니는 진주성과는 크게 다른 느낌을 준다. 거의 10년 만에 오는 진주성은 흐려서 그런지 더 운치가 있다. 아이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보기도 하고 촉석루와 의암에 가서 논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면서 조금씩 임진왜란 때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5분쯤 펼쳐지는 영상이 임진왜란이 어떻게 벌어지고 이어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 뒤로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임진왜란을 둘러싼 시대 상황과 문화에 대해서 얕으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박물관에 올 때마다 고민하는 것은 어떤 눈으로 무엇을 보게 할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잘 풀어줄까에 관한 것이다. 미리 계획된 것이라면 이야깃거리를 찾아보고 들려주고 했을 텐데 가볍게 나들이 삼아 온 것이라 자유롭게 둘러보게 했다. 그래도 도훈이가 유물과 전시물을 보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봐 줘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덧 비는 부슬비로 바뀌어 있다.
다시 잠집으로 돌아오니 오가며 운전하느라 피곤한데 새참과 저녁 채비까지 해야 한다. 어제 낮부터 새참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주겠노라 약속한 게 있어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새참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마침회 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시간 살펴서 해야 할 일을 해 놓으라고 했다. 어제는 몰랐는데 오늘 아침, 점심밥을 한 시간 넘게 먹는 것을 보면서 시간을 정해둬야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밥을 천천히 먹는 것은 좋은데 그것 때문에 다른 해야 할 일이 줄곧 뒤로 밀리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역시나 걱정했던 대로 미리 알려줬던 8시 45분까지 해야 할 일을 다 하질 못했다. 아이들에게 잔소리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 있었던 일과 지내는 모습에 대해서 짚고 조금 더 책임 있는 자세를 가질 것을 이야기했다.
잔소리를 들을 때는 조금 시무룩한 것처럼 보이더니 남은 일 마저 하라고 하고 어쩌나 보니 크게 기분이 가라앉아 있거나 짜증 난 것처럼 보이질 않았다. 다행이다. 이번 자연속학교에서 자라는 점이 하나 생겼구나 싶어서 좋았다. 오늘 비가 와서 쉬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알기 공부도 했고 나름 잘 지낸 하루였다. 아이들은 아마도 일을 못한 아쉬움보다 잘 쉬고 바깥 나들이를 했다는 것이 더 좋았을 하루로 남을 것 같다. 그래서 날마다 일하고 잘 노는 자연속학교에서 오늘 같은 날은 왠지 선물 같은 하루가 된다. 아이들에게는 일을 안 해서 반가운 비와 함께 세 사람 다 잘 쉬어가는 하루를 보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