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5일 달날
제목 : 똑같은 공부를 하더라도
옹달샘 아침나절 공부로 ‘슬픔’ 받아들이기 공부를 했습니다. 세월호 추모와 안전교육주간을 맞아 한 공부인데 작년 옹달샘에서 했던 공부 흐름과 구성이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준 책도 말입니다. 작년에 이어 2학년을 연이어 맡고 있으니 큰 틀에서는 작년에 했던 좋은 교육활동은 올해도 이어서 하겠다는 밑그림이 있어서 같은 방식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똑같이 풀어냈을 때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면서 작년에 했던 흐름을 되살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슬픔을 색으로 입혀보기도 하고 글쓰기로도 정리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작년 아이들과 비슷한 반응과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감정이 ‘슬픔’이고 아이들과 가족이 직접 겪지 않았어도 그 슬픔은 이야기와 제가 들려주는 세월호와 관련된 사실에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지난 뒤 태어난 이 아이들은 ‘이제 안전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게 지지난해인 것을 떠올리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이 여전히 안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는 불안이 올라오는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내가 가장 슬플 때>라는 책을 읽어주면서 슬픔을 떠올리고 느껴보게 했습니다. 내가 슬플 때는 언제일까요? 라고 물으니 아이들은 저마다 부모님과 관련된 것을 쏟아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선생에게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아서 안 쓸쓸하냐고 신윤우가 물어봅니다. 안 그렇다고 하니 “왜 안 쓸쓸하지?”라고 하면서 “엄마 아빠 보고 싶고 쓸쓸하잖아요.” 쓸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강요하듯이 말합니다. 아이들이 느끼는 부모와 어른이 느끼는 부모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지금 혼자 사는 게 편하다는 것으로 넘어갔습니다.
슬픔에 색이 있다면 어떤 색일지 그리고 어떤 느낌일지 사각 크레용으로 색을 채워가면서 저마다 생각하고 느끼는 ‘슬픔’을 선 그리기 공책에 채워갔습니다. 평소에 열 어린이가 한두 마디만 던져도 와글와글한 분위기가 되는데 선 그리기 할 때 만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해집니다. 지금 내가 채워야 하는 색을 느낌을 잡아내려고 천천히 집중해서 크레용을 문지르는데 빠져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 그리기 공부할 때마다 집중하는 아이들 모습에서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슬픔을 색으로 채우는데 다 채우지 않아도 좋다고 했더니 어느 한 쪽을 비운 아이들이 몇 있어서 또 놀라웠습니다. 의도가 없었을 것이지만 그 여백에서 슬픔 한 조각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 같기도 해서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슬픔을 색으로 입히는 공부를 하고 나서 마무리로 글쓰기를 하고 나니 정말 작년과 거의 비슷하게 ‘슬픔’ 받아들이기 공부를 진행했고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수가 늘었고 작년 아이들 분위기와 올해 아이들 분위기가 다른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똑같은 공부를 해도 똑같은 진행과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면서 교육활동을 하다 보면 늘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수업 채비를 애써서 하지만 아이들 분위기와 이해 정도에 따라 다르게 풀어내거나 다른 것으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호와 <내가 가장 슬플 때>에서 슬픔을 잘 떠올렸고 그걸 색과 글로 저마다 잘 드러냈으니 계획한 대로 공부를 잘 마무리한 셈입니다.
그러면 작년과 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공부를 똑같이 잘 풀어냈으니 잘 된 수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선생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작년과 다른 책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슬픔을 사각 크레용이 아닌 수채화 물감으로 입혀봤다면? 색이 아니라 연극놀이로 감정 조각상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슬픔에서 벗어나 희망과 행복의 이야기도 들려줘야 하지 않았을까?’ 그밖에 떠오르는 생각은 많습니다. 모든 교육활동을 이렇게 되짚거나 돌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똑같은 교육활동을 똑같이 풀어내고 거의 비슷한 결과를 얻어낸 것에서 선생은 만족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반성하는 물음이 들어서입니다. 대상이 다르니 같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긴 했는데 역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선생 윤리가 저절로 작동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들기도 합니다.
똑같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에서 최근에 가장 회의감을 느끼는 게 있는데 그게 탈춤입니다. 전통예술이고 전승과 보존이 큰 기둥이라 10년 넘게 가르치면서 배운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중등학교에 있을 때도 그랬고 맑은샘에서 6학년에게 3년 동안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몸에 익을 때까지 춤사위를 반복 연습하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끝은 늘 기본 연습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업 시간도 모자라서 점심시간에 따로 개인 연습을 봐줘야 하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기운을 많이 쏟아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습시켜서 공연을 올리면 보는 관객들은(주로 부모님들)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애써 연습하고 공연까지 잘 마친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힘들었지만 괜찮았다.’라고 하기도 하지만 ‘힘들었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실제 배운 아이들도 마음이 그러한데 옆에서 슬쩍 보는 동생들은 어땠을까요? 자연스레 탈춤은 ‘재미없다. 하기 싫다.’라는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2년째 춤 수업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가 고민입니다. 아이들과 신나게 연습하고 뭔가 쿵작쿵작 재밌게 공연을 만들어 가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고 제 마음이 식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똑같은 공부를 하더라도 다르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을 찾는 애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에 잘했다고 저 나름으로 생각하지만 완벽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달라졌고 분위기도 달라졌으니 그에 맞는 변화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년을 연이어 2학년을 맡은 것이 선생으로 보면 더 끈질기게 수업 연구를 하라는 뜻인 것도 같다는 게 이제야 조금 눈에 들어옵니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체력이나 열정이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서 조금 무기력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바짝 굳을 정도로 정해진 것을 애써 다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 쫓기지도 않아야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유연하게, 아이들의 기운을 살펴 공부의 뜻을 잘 살릴 수 있게 채비하고 풀어가야겠습니다. 아이들이 이따금 저에게 달려들면서 하는 “또 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오게끔요.
첫댓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탈춤을 자연스럽고 재밌게 흡수 할 수 있을까요? 2005년 스무살때 대학로에서 처음 봤던 봉산탈춤 공연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참 재밌게 봤었는데요, 탈춤에 나오는 대사, 내용, 애드립 그리고 춤사위가 지금 현재 세대를 잘 아울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저는 부끄럽게도, 봉산탈춤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나 자신과, 천년이 넘는 전통예술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께서 얼마나 노력하시는지 고민과 번뇌가 담겨있는 글에서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