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일)
오늘은 김장하는 날이다. 자식들은 몇년 전부터
김장하지 말고 각자가 알아서 먹자라고 어머니께
건의를 드렸지만, 텃밭을 직접 가꾸어 오신 어머니
는 올해만 하자 라면서도 매년 김장을 하셨다.
말로만 그만하자 하시면서 매년 배추,무, 파를 재배
하여 김장을 하셨다. 그것이 마치 당신의 의무이고
책임인양 김장을 하여 사남매의 겨울철 김치를
마련해 주셨다.
올 추석을 지나며 갑자기 쇠약해지신 어머니, 한달
여를 앓으셨다. 우리는 올해는 김장 없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럴 생각이
없으셨다. 어느 정도 움직이실만 하니 김장 생각에
바빠지셨고 김장할 생각으로 힘을 내시는 듯 보였
다.
금요일 아침 일찍 어머니를 찾았다. 일요일에 와서
김장김치 가져가라고 하신다. 중독으로 방황할 때
매년 아무 일도 안하고 식구들 김장 끝날 때 즈음
찾아서 수육에 소주 한잔하고 김치만 달랑 가져왔
었다. 손에 물한방울 묻히지 않았다.
올해 김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참석하겠다 말씀드렸
더니 어머니께서 정말 좋아하신다. 혹시라도 올해
가 어머니의 마지막 김장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꼭 참석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나
보다.
일요일 아침, 아내는 컨디션이 안좋아서 나 혼자
가기로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어머니와 여동생,
제수씨는 수돗가에서 절임배추를 고르고 있었고,
형님과 매제는 김장속을 버무리고 있었다.
여동생이 작은 오빠가 이렇게 일찍 오다니 서쪽
에서 해가 뜰 일이라며 좋아한다. 나도 김장하러
왔다 했더니 이것 저것 나를 시킨다. 빵좀 사와라,
배추 들여 와라, 김치통 찾아 와라, 김치통 내가라,
바구니 좀 씻어라, 김치통도 씻어라...잠시도 쉴 틈
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김장을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형제들은 그렇지 않았다.
온통 관심이 도박에만 쏠려 있었으니 김장같은
집안 행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어머니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김장. 웃으며 떠들며
김장을 하는 시간이 좋았다. 이런 것이 소소한 일상
이고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맛있게
삶은 수육을 내오셨다. 술한잔 마시고 김장속 듬뿍
얹어 쌈싸먹으니 꿀맛이다.
나이드신 형님과 살고 있는 도박중독자 친구를
불렀다. 이 친구때문에 피씨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도 원망한 적은 없었다. 내가 바로 선택
한 길이었으니까... 지금 이 친구도 회복하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다. 일요일에 어머니댁에서 김장
한다니까 김치 좀 달라하기에 김치가져 가라고
불렀다. 친구는 어머니 드시라고 음료수와 고기를
가져왔다. 어머니가 친구에게 맛갈스러운 김치 한
통을 싸 주셨다. 친구는 너무 좋아한다. 이런 것이
살아가는 맛 아니던가!
김장을 끝내고 형제들끼리 소주 한잔 더하였다.
조카들도 와서 집안이 시끌벅적하다. 어머니 옆에
누워 잠도 자고 술이 완전히 깨기를 기다렸다.
어머니. 내년에도 우리 꼭 김장해요. 꼭 하셔야
해요.
왜? 김장하지 말라며 그렇게 말리더니...
어머니가 건강하셔야 김장을 진두지휘하실 수
있다. 내년에도 김장을 통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 부디 오늘이 어머니의 마지막 김장이 아니길
위대한 힘께 간구하고 또 간구한다.
첫댓글 함께 기도드립니다.
어머님과 더 많은 시간 행복하게 좋은 추억들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공님의 온전한 치유과 바아풀님의 건강한 치유를 통해, 온 가족이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다음에 서울에 가면, 함께 모임에 참석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애정어린 후원
항상 마음에 두고 잊지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