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년 소감문 (2016년 12월 18일)
도박으로 얼룩진 저의 전생애에 처음으로 4년동안 도박을 안했다는 뜻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데 대하여 송구스럽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한
마음부터 전하고 싶습니다.
그럼 저의 4주년
소감문을 발표하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비교적 경제력이 있는 집에서 태어나 중3이 될때까지 모범생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님이
그 때쯤 돌아가셨습니다. 친구들끼리는
명절 때 가끔씩 섯다나 구삐같은 화투놀이를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학교성적도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탈선하기 시작하면서 거의 매일 저녁 선창가에
있는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부터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다행히 고등학교는 억지로 졸업을 했지만 졸업식엔
가지도 않았습니다. 대학시험 준비를
위해 서울을 가게 되었고 처음보는 서울의 풍경은 저를 들뜨게 했습니다. 첫해에 낙방을 해서 재수의 길로 들어셨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낙방을 하고 3수의
길을 걸을때는 학원에서 공부는 안하고 거의 서울의 빠징고장 아니면 저녁엔 술집에서 시간을 탕진했습니다. 빠징고 장에서 잭팟이 터지면 떨어지는 동전소리에 중독이 되어 하루라도
안가면 안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어머님이 계시는 집에 가서 팔수 있을만한 물건을 내다 팔고 그 돈을 술값과 도박자금으로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어머니와 친구분들이 거실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제
주먹만한 금덩어리였습니다. 어머님의
친구분들이 떠나시고 어머님 마저 집을 비우셨을 때 그것을 바로 들고나가 자주 다니던 빠징고 장의 지배인을 찾아가 맡기고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지배인을 건물 2층의 귀금속 가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가게주인으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손에 받아쥐고는 돈이 마련되는대로 바로 찾아가겠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그 돈으로 매일 빠징고 장, 저녁엔
나이트 클럽등을 전전하며 탕진했습니다. 얼마지나지않아
돈은 떨어지고 잘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만 바른대로
얘기해 주면 금에 대해서는 야단을 안 치시겠다고 약속을 하셔서 귀금속 가게에 금을 맡긴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바로 다음날 어머님의 꾀에 넘어간 저는 어머님의 고발로 특수절도로 종로경찰서에
구속이 되었고 어머니는 종로 경찰서장을 미성년자 빠징고 출입을 막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직무유기로, 귀금속
가게 주인은 장물취득으로, 지배인은 장물알선으로 고발을 하셨습니다.
그날부터 저희 집에는 경찰서장과 귀금속 가게 사장
그리고 빠징고 장 사장까지 찾아와서 고소를 취하하면 금도 바로 돌려주고 저도 유치장에서 바로 나오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몇번 거절하시다가 승낙을 해주시면서
이 사건은 종결이 났습니다. 이렇게
저의 도박의 첫 여정이 유치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서울의 유명호텔 빠찡고 장을 제 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아까운 20대를 보냈습니다. 집에서는 거의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혼적령기가 되어도 누구하나 저의 결혼을 걱정하는 가족들이, 누님이나 어머니를 포함하여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직장에 4년간 다니면서 많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늘 쪼달리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왠일인지 둘째누님이 소개를 해서 미국에 살고있던 정여사와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몇번의 만남 후 양가부모의
허락하에 약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하고 미국에 가기위해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정여사가 있는
미국 버지니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도착 후 처음엔 영어가 많이 필요치 않은 일을
찾아하다가 영업직을 하면서 우연히 카지노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잠자고 있던 도박병이 되살아나 카지노를 들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공금에도 손을 대고 가정을 위해 사업을 해보겠다고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거짓말을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큰 액수의 돈을 한국에서 송금하시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큰 돈이 다 없어지기까지는 채 1주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잦은 도박으로
생활은 계속 쪼달리고 첫 도착지인 버지니아에서는 제대로 정착도 못 해보고 정여사의 동생이 있는 산호세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난다고 이사간 곳엔 동네에
사설 도박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합법적 도박장이었습니다. 일을 마치면
그 곳에 가서 거의 살다시피하여 저의 생활은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더욱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도박에 빠져 지내던 어느날 정여사한테 이끌려 단도박모임을 알게
되어 한 두번 나갔는데 동양인은 저 혼자뿐이었고 모임에 앉아있는 것이 무척 긴장되고 고달팠습니다.
산호세에서도 역시 정신을 못 차리고 살다가 접고
어머님이 미국에 사는 아는 분하고 다리를 놓아
자영업을 하기위해 애틀란타 죠지아로 옮겨갔습니다.
처음 3년간은 장사도 잘 되었고 시간도 없어 도박생각이 한동안 나지 않았다가 장사가
한가해 지면서 재정적 위기가 찾아오고 업종도 바뀌면서 그곳에서도 또다시 정여사 모르게 카지노를 찾아내어 몰래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카지노 빚을 어떻게 할
길이 없어 개인파산을 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6월 지역 한국신문에 토니선생님이 단도박모임을 시작했다는 앞면 기사를 읽게 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도박을 끊기위해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
다니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며 새로운 삶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재발이 닥쳐왔습니다. 미국에서의 최장 단도박 기간은 2년
입니다.
그러던 중 어머님의 요청으로 한국에 와서 살게
된지 5년 남짓 되었습니다. 어머님의 간병 목적으로 한국에 왔지만 항상 저의 머릿속엔 카지노 장이
맴돌았고 유혹이 또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산에서
택시를 타고 어머니께는 대충 거짓말을 하고 거의 매일 저녁 부산 카지노에 다녔습니다. 어머니께는 너무나도 불효를 한다는 걸 이성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조절불능
상태가 되어있었습니다. 2012년 12월 23일 마지막으로 부산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다시한번 도박을 잠재우기
위해 새로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단도박 4주년을 맞으며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론 제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오늘로서 저의 단도박으로의 여정이 더욱더 굳건해 지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단도박을 위해서 몇십년을 참고 인내해
준 정여사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그동안 겪게 한 고통에 대해 사죄하고싶은 마음 또한 가득합니다.
그리고 우리 창원월남모임의 월영류선생님, 월영김선생님외 모든
협심자분과 가족분들께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또한
미국에 계시는 존경하는 토니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저의 글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우 축하드립니다.
한국에 와서 부모님 뵙고 모신다고 바쁜 관계로 이제야 카페에 들어와 반감고 기쁜 글을 읽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형제님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치유를 위한 평생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합니다. 귀한 축복의 통로가 되어주심에, 감사와 존경을 전합니다. 월영유 형제님의 가정에도 평생 치유가 이루어지는 은헤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화이팅!
모든게 토니형제님 덕분입니다.감사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