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연중 3주일
제1독서느헤 8:1-3, 5-6, 8-10
성 시 시편 19
제2독서1고린 12:12-31상
복 음 서 루가 4:14-21
이 자리, 일치
1.
사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늘 두려움이 앞섭니다. 작은 소모임에서조차 내 이야기를 꺼내놓으려면 쉽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이 큰 분일수록 목소리가 크고 거칠며 남들에게 거친 언사를 일삼는다는 것을 저도 상담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 안 보다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잣대가 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하느님 앞에 가는 데 있어 큰 장애입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베드로도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습니다. 많은 성인들에게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 까닭은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갈 까봐 그런 것입니다. 죄를 짓고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자기 몸을 숨깁니다. 죄를 짓고 숨는 다는 것.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움은 하느님과 나를 멀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선뜻 나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2.
오늘 예수님은 자신을 만방에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어떠하셨을까 돌아봅니다.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은 30살 청년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시시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살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왜 고향으로 가셨을까요. 청년이 되면 대개 고향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동행자’ 계속 나눔의집 활동할 때 주장했던 모토였습니다. ‘동네에서의 행복한 자립’ 아이들이 모두 서울에 가고 싶어하고 동네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고향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은 어떤 곳인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고향은 자기를 자기 자리에 두지 못하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제 1장 신약이 시작하는 제 일장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로 시작합니다. 고향을 떠난 역사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역사로 귀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향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단단히 마음을 먹으십니다. 고향에서 시작한 하느님의 역사가 고향에서 현재 오늘 복음 안에서 역사합니다. 직면입니다.
3.
고향에는 그를 잘 안다는 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소문들이 무성한 곳입니다. 주님은 안다는 이들 앞에서는 그 진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루가 복음 11장 21절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모두 모으신 후에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제자를 열두명 다 모으신 후, 완성 후에 기도합니다.
고향 회당에 들어가 보태거나 덜음이 없는 상태, 알파와 오메가 그 진리를 그대로 읽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를 두루마리를 펼쳐서 그대로 읽고 거기 한 마디를 보탭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입니다. 실로 충격입니다. 그의 말씀은 우리를 각성하게 합니다. 멈추게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며 메시아로 그가 드디어 자신을 드러냅니다.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기대로 그를 보기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회당에서 질질 끌려 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한가운데로 당당히 지나가십니다. 당당히 그 길을 걷는 첫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향에 돌아가신 바를 이루십니다.
4.
예수님은 오늘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깨달음을 만방에 떨쳐보이시고자 합니다. 세례자요한의 세례운동은 물 속에 담갔다가 세상을 이겨내는 행위였다면 예수님은 그것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갑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합니다. 그 복음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을 가장 낮은 곳으로 이끌어 내는 행위였기에 차별화되어 있으며 엄청난 내용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주님의 전도의 방향은 바뀌게 됩니다. 어쩌면 그분은 그 일로 자신의 방향을 바꾼 것인지도 모릅니다.
5.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마귀들린 사람을 고칩니다. 그의 방향은 세상을 살아가는 고난받는 자들의 곁으로 향합니다. 삶의 무게로 지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아픈 이들을 직접 만져서 고치십니다. 그들에게 이웃이 되기 위해 한 명 한 명을 부릅니다. 그분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자로 부르고 길을 가시는 그분의 짧은 삶 동안 내내 이날의 가르침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에 응답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결론부터 보는 영화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스포일러는 끝났습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너희, 들은, 이 자리, 이루어졌다.. 모두 우리가 답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무엇인지, 너희들은 누구인지. 듣는 다는 것은, 자리가 어디인지,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6.
그분은 이제 가난한 이들을 찾아갑니다. 묶인 이들에게 찾아가십니다. 눈 먼 사람들에게 가십니다.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일을 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로 결심하십니다. 눈을 들어 그분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받은 당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사람들을 위해 씁니다. 그 치유는 사회 통합의 치유였으며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이들을 위한 치유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소외받는 이들은 더욱 안으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적으로 참 외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그분의 깨달음은 오늘 시편의 한 구절 처럼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변함없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주는 것이었습니다.
7.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 몸입니다. 우리들이 받을 은총은 우리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결국은 한 빵을 나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안의 연약한 부분을 더욱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추위 속에서 노숙하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내 안의 약하디 약함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약함을 내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까지 오늘 2독서의 마지막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구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