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신비와 알곡의 삶
마태 13:24-30, 36-43
관할사제 조정근 프란시스 신부
사랑하는 원주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원주성당을 둘러싼 이 푸른 숲과 맑은 공기를 보십시오. 켈트 영성에서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하느님의 임재와 인간의 마음 사이의 경계가 아주 얇아져서 서로 가까워지는 장소를 ‘얇은 곳(Thin place)’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시간,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하지만 야곱이 이 고백을 했던 자리는 거룩하고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형의 낯을 피해 도망치던 불안과 절망의 피난길, 거친 광야였습니다. 의지할 곳 없어 돌 하나를 베개 삼아 누워 자던 그 척박한 밤에 하느님이 야곱을 만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 삶이 돌베개처럼 딱딱하고 가라지 같은 문제들로 나를 옥죄어올 때, 바로 그 자리가 하늘 문이 열리는 ‘베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밀밭에 비유하십니다. 그런데 주인이 잠든 사이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이 가라지는 밀보다 훨씬 빨리 자라며 집요한 덩굴손으로 옆에 있는 밀의 줄기를 칭칭 휘감아 알곡을 맺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 해도 삶의 자리에는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가라지들이 늘 자라납니다. 이때 종들이 당장 가서 가라지들을 다 뽑아버릴지 묻자, 주인은 대답합니다.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절절한 사랑을 봅니다. 주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단 하나의 알곡이라도 다치지 않고 살려내는 것’에 있습니다. 악이 당장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하느님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눈물겨운 ‘기다림’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너무나 쉽게 판단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나는 밀이고 너는 가라지야”라며 상대를 박멸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주일학교 아이의 고백처럼 우리 중 100% 완벽한 밀은 없으며,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늘 공존하는 ‘얼룩이’들입니다.
우리가 가라지의 상태에서 벗어나 밀의 상태로 성장하는 의식의 층계를 오르는 열쇠는 바로 ‘겸손’입니다. 데이빗 호킨스 박사의 ‘의식혁명’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200(용기)’을 분기점으로 미만은 두려움과 집착 같은 가라지의 영역이고, 이상은 참된 자아인 밀의 영역이 됩니다. 이 사다리를 오르는 방법은 매일 자신을 성찰하는 겸손입니다. 가라지는 자만심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땅을 바라보지만, 알곡은 은혜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여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경영학의 ‘파레토 법칙’처럼 전체 결과의 80%는 상위 20%의 원인에서 나오며, 밭의 전체 수확도 잘 영근 20%의 알곡이 책임집니다. 우리 교회도 20%의 신자들이 깨어 열심히 기도하고 살아있으면 나머지는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최재천 교수의 대담처럼, 당장 빈둥거리는 개미처럼 보이는 이들도 위기가 오면 갑자기 열심히 일하듯이, 지금은 가라지처럼 보이는 존재들도 다 필요한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묵묵히 생명을 품고 자라는 20%의 거룩한 알곡들을 바라보시며 세상을 기다려주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삶 속에서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사람이며,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고집을 비우는 사람입니다. 저는 매일 켈트 성무일도를 바치며 저 자신을 비우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느님이 일하시는 손길이 보입니다. 평화는 총칼이 아니라, 이웃을 형제자매로 맞이하고 내 안의 가라지를 성찰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이 땅에 찾아옵니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 때는 바로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할 때 마귀와 세속의 욕심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립니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는 영혼이 ‘하느님이 거니시는 정원’과 같다고 했습니다. 정원사는 늘 깨어 잡초를 솎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간이 흐를수록 썩어 문드러지는 ‘부패’가 아니라, 은은한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는 깊은 ‘발효’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찬례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모시는 이 빵과 포도주는 수많은 밀알이 자신을 완전히 부수고 녹여내어 하나가 된 생명의 양식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 우리 마음밭의 모든 집착과 미움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우리를 온전한 알곡으로 키워내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신뢰합시다. 한 주간 삶의 가라지 속에서도 늘 깨어 기도하며, 마지막 추수의 날에 하느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눈부시게 빛나는 상속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