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언덕_잡초 잔치.
일상영성 3) 잡초제거 영성
이 에스더 사제
초록이 모두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 바야흐로 이제는 밖에서 지낼 시간이 많아진 시기 ‘봄’이다. 야외 수업도 봄 소풍도 다 이 시기에 경험해본 기억이 있다. 초록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싱싱해지는 기분이 들고 건강한 마음이 불어온다. 그러니 급기야 사람들은 들에서 초록을 뜯어다 반찬으로 요리해 먹어 몸까지 봄 준비를 단단히 시킨다. 언제인가 TV에서 ‘풀쌈 공동체’를 소개하는 영상을 본적이 있는 데 사람들이 둘러앉아 온갖 이름 모를 풀들을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장이나 다양한 소스와 함께 먹으며 한끼 식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보기만 해도 싱그러워지고 기분 좋아졌다.
처음 전도사를 시작할 때 가장 낯선 일은 잡초제거였다. 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풀과의 전쟁은 정확한 시기가 있었다. 시기가 지나면 이제는 뽑을 수 없고 제초기를 돌려야 했다. 이 시기에 전도사라면 풀과 화초를 구분하고 직접 가꾸는 부지런함도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미 들고 비자발적인 동기로 어설픈 전도사시절 들에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점점 그 초록을 만지는 일이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덕이려니 하고 시작한 일들이 간단한 컴퓨터 게임보다도 더 재밌었다. 초록 너른 들판에 풀을 뽑으면 그 만지는 흙은 내 마음 자락이 되곤 했다. 잡초를 뽑으며 하느님도 내 마음을 만지시려니 하면 콧노래도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흙을 만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신 골고타 언덕(마 27:33) 길에 넘어져 만나는 그 흙바닥을 내가 만난다고 느껴졌다.
한 순간 한 순간 살아 작용하는 것들과 뽑아내야 할 말씀을 그대로 묵상할 수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말씀 중 ‘겨자씨의 비유(마 13:31-32)’, ‘가라지 비유 설명(마 13:36-43)’을 읽고 잡초 제거에 들어가면 절로 그 말씀이 체화(體化)된다. 같은 풀이로되 저절로 키우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나 밭에 따라서 어떻게 열매맺어가는지는 땅을 만져본 사람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농부 하느님의 말씀은 곡식을 키워본 사람의 입장에서 쉽게 설명한 복음 아니겠는가. 더 이상의 어려운 문구나 신학의 구절을 찾지 않아도 복음이 깨달아지니 잡초제거는 좋은 기도 소재다. 그래서 기도의 산실 수도원에 가면 정원이 손질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교회 앞마당은 사제 닮아 너무 자유분방하다.)
이런 아름다운 영성을 키우는 일을 공동으로 할 때 몇 가지 에피소드도 따른다. 몇 분이 함께 풀을 뽑다 보면 서로 같은 것을 뽑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남기는 꽃을 다른 분은 열심히 캐버린다. 잡초제거 후에 흔히 “내가 심어놓은 귀한 꽃이 없어졌어요”라는 슬픔 섞인 한탄을 종종 들은 바있다. 잡초의 기준이 다르기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보기에 따라 잡초가 다 다르니 그것을 정하는 일은 주인의 몫이다. 그런데 교회 앞마당은 공동의 소유이다. 사제의 소유도 한 명의 소유도 아니니 시시 때때로 잡초들이 범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마당에 온갖 이름을 가진 아이들도 잡초라고 규정된다. 토끼풀도 민들레도 쇠뚝이도 잡초다. 온갖 흙에서 나는 귀한 것들이 모두 잡초가 되어 주인공인 잔디 주인들에게 혼꾸멍이 난다. 그 서러움 때문인지 뽑힌 잡초는 해마다 더욱 짙어져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킨다. 이 즈음 되면 ‘잡초의 다른 기준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잔디 말고도 주인공을 여러 명 세우는 것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다름을 받아드리는 과정이다. 늘 초록이 범람하는 시골교회 살이를 하다보면 늘 정원은 온갖 생물체들의 집합이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이상 잡지나 그림에서 보는 깔끔한 풀밭은 없다. 다름의 잔치라고 할 만큼 형형색색 자기 색을 가진 이들이 놀러와 주인처럼 산다. 그 곳은 무릇 그들 모두 주인공이어서 어울려 핀다. 그러니 애써 공동의 소유의 텃밭에 ‘홀로 잔디’만을 주장하는 ‘영성’보다는 ‘잡초 잔치’의 ‘영성’을 주장하자고 말해주고 싶다.
갖가지 풀들이 어우러지는 풀밭에는 주인공이 꼭 하나임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에게 하나의 주인공은 의미 없고 다만 어울림,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의 실천의 현장은 그대로 구현할 뿐이다. 서로 배움 터전이다.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지기에 모양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시기가 다른 것이 아닌가. 그간의 잡초제거 영성이 다분히 가라지의 비유처럼 뽑아내야 할 것과 좋은 땅에 대한 영성이었다면 사실은 무릇 다른 것들에 대한 인정, ‘서로 사랑하여라’의 깊은 성찰로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더 넓은 다양한 초록을 받아드리면 모두 ‘더불어 함께’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잡초를 뽑기 힘들어서 잡초제거 영성이 더 발전한 것을 절대로 아니라고 당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