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의 수난과 부활
5) 부활 주일 :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 이에스더 사제-
마지막 순서를 맞이했다. 회기마다 다시 첫 마음으로 동화를 살펴보는 과정이 소중했다. 가끔 길을 잃을 때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쉽게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아니겠는가. 짧은 여정 가운데 동화 속의 수난과 부활로 행복했다고 전하며 다음 시리즈를 고민해본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신데렐라는 아이들에게 읽히지 말아야 할 동화다. 자기 도전이나 용기없이 ‘왕자님’을 만나야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니 정말 어이가 없는 컨셉이다. 그러니 자기 추체적이지 않은 허황된 꿈을 꾸는 여성들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있다고 비판하지 않는가. 동화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구성과 전개로 이루어져있다.
내가 그럼에도 이번 시리즈에 신데렐라를 선정한 것은 유리구두 때문이다. 유리구두는 마치 열쇠와 같다. 잠겨져 있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꼭 맞는 열쇠가 필요하며 그 열쇠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문이 열리면 왕자님을 만나며 노예에서 해방된다. 마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으면 부모를 구하고 인간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유리구두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단서다.
신데렐라의 처지야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데렐라는 자기 것을 갖지 못했다. 가난한 이다. 또한 억압받는 이이며 부모를 잃은 고아이다.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는 이다. 그래서 잔치에 갈 드레스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가족이 없다.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계모와 언니들의 시중을 드는 식모일 뿐이다. 고단하다.
수난의 일상 가운데 신데렐라는 그 정점의 어느 날을 맞이했다. 수난의 정점에는 늘 부활로 열리는 문이 열리지 않은가. 모든 나라 여성들에게 허용된 권리의 날, ‘잔치 날’의 소식이 이 집에도 날라온 것이다. 그러나 언니들은 갈 수 있지만 신데렐라는 갈 수 없다. 동물 친구들이 도와주어 열심히 노력했지만 애써 만들어 둔 드레스도 망가졌고 신고 갈 신발 하나 없다. 늘 밝던 신데렐라가 어둔 밤에 슬피 운다. 그 눈물이 하늘에 닿았을까. 자기 처지에 처음으로 눈물 흘리니 다른 문이 살짝 열린다.
도와줄 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요정은 자정 전에 제자리에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한다. 현실이 아니고 그저 잠시의 이탈인 것이다. 마법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재밌다. 그것은 없어지는 것. 잔치날 왕자님과 춤을 추며 행복하게 하루저녁을 보내고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신데렐라가 직시할 것은 나의 가난함이다.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그곳에서 도망갔더라면 사랑을 이룰 수 있었을까. 차림새가 엉망이 되지만 왕자를 시험해보면 어땠을까 엉뜡한 상상을 하지만 동화 속 신데렐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정은 돌아오는 시간을 알려준다.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만나는 시간이다. 나와 그분이 만나는 시간인가.
신기하게도 그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세상이 어둠에 덮힌 시간과 일치한다. 12시, 그 시간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포기하고 돌아와야 한다. 자기 마법으로 가진 것들을 다시 놓을 수 있는 가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그렇게 했다. 물론 종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돌아오며 신발 한 짝이 벗겨지지만 그렇게 현실이 아닌 마법의 세계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신데렐라의 선택이었다.
결국은 신데렐라는 나머지 구두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자기 자리에서 다시 살아간다. 현실은 그 때부터 달라진다.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또 다시 정진하는 것 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왕자님을 만나고 신분 회복도 되는 것은 유리구두에 대한 그의 대처 때문이었다. 고난가운데 있다고 느껴진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아 기다리는 것이지 일탈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동화를 겨우 마음 속에서 다시 살려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