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화북1동
유형 ; 포구
시대 ; 조선
화북포구는 조선시대말까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대표적 관문으로 외래문물의 유입과
교통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포구였다.
화북포(禾北浦, 일명 別刀浦)는 제주목의 육지 출입 포구로 화북진은 처음 수전소(水戰所)였다가
나중에 진(鎭)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화북 마을지 68쪽) 제주도에는 수전소가 열 곳에 있었는데
화북·조천·어등·애월·명월·열운·서귀·모슬·색·우포이다.
제주도의 방어시설로는 3성·9진·10수전소·25봉수·38연대가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데
진과 수전소는 다 같이 ○○진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 곳에 진과 수전소가 함께 있는 곳도 있었으니 조천·애월·서귀 등이다.
탐라지(耽羅志, 서기1653년 刊) 水戰所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水戰所 禾北浦
有板屋戰船中部左部右部各一隻待變粮六石格軍一百八十名射砲八十七名 礁嶼險惡大風常多板屋船不但(?)運用難便□泊亦易□□若去其板屋如戚繼光福船之制則物力省而運用便格砲足矣 水兵補覽錄而藏之與水操式軍減而財 省似可
'화북포에 판옥전선이 중부·좌부·우부에 각각 1척씩 있다.
비상양곡이 6섬, 격군 180명, 포를 쏘는 사수 87명이다. 이
곳은 바위들이 험악하고 태풍이 많아 판옥선의 운용이 용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박하는 것도 불안하니 옛날로부터 내려와 이루어진 제도를 비록 쉽게 계청하여 개혁하기가 어려우나,
만약 판옥을 철거하고 척계광복선과 같은 제도를 도입한다면 물질과 노력이 덜어지고 운용이 편하여
격군이 감축되어 사포가 족하리니 수병보람에 기록하고 간수하여 수조식과 아울러 참관함이 가할 것이다.'
당시 화북포는 목을 보호하는 수전소로 수전에 대비하여 전선이 항시 대기하였으며
아울러 화북포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한편 지금의 무기고와 같은 息波庫를 두어 무기를 보관하였으며 당시 도내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커서 화북수전소의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식파고에는 交子弓 45장, 長箭 45부, 片箭 75부, 環刀(還刀?) 9자루, 地字銃 3문, 玄字銃 6문, 宙字銃 10문, 勝字銃 8문, 화약 75근, 水鐵丸 9천개, 鐵甲 3부, 鐵冒 3부 등을 보관하였다.
(화북 마을지 36∼38쪽)
그런데 이 글에 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의문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성이 없는 상태였다가 서기1678년에 이르러서야 최관 목사에 의하여 최초로 성이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이원진이 성에 관한 기록을 누락했었고 최관 목사는 어떤 형태와 규모로든지 있었던 성을
확장 개축한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서쪽의 성문은 포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 옆으로 길이 나 있고 포구가 40여m 밀려나 있지만 일제시대까지도 성벽 바로 아래가 바다였다고 한다.
또 일제시대에는 등명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영조11년(1734) 김정(金 政) 목사는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항만이 불완전하여
풍랑이 일 때는 항내에서 파선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등 배 출입이 불편하므로
몸소 부역을 독려하여 방죽을 쌓았는데 3읍 주민들이 동원된 이 포구확장공사는
화북포 외에도 건입포에서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직접 돌을 지고 나르며 공사를 독려하였다.
길이 210척, 너비 21척, 높이 13척으로 하니 배 출입이 편해졌다.
그 위에 영송정(迎送亭)을 지어 공사 선박 출입의 검문소로 하였다. 그
후 김정 목사는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나기 위해 화북진성에 체류 중 과로로 병을 얻어
화북진성 안 객사에서 숙을 거두었다. 포구에는 김정 목사를 기리는 공덕비가 남아 있다.
(제주의 방어유적 65∼68쪽)
그는 화북 일주도로변에 있는 삼사석을 정비하고 삼천서당을 건립하는 등 인
재양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었는데, 그를 기리는 ‘노봉 김선생흥학비(蘆峰金先生興學碑)’가 삼천서당 터에
세워졌으며 지금은 오현단 경내에 옮겨져 있다.
김정 목사의 비 옆에는 김정 목사의 비를 받쳤던 것으로 추정되는 龜趺가 있는데
귀부의 상면에는 폭 3cm, 길이 20cm 정도 홈이 나 있는데 銅碑를 세웠던 것으로 생각되며,
건립년대는 咸豊丁巳年(함풍7년 서기1857)이라고 석실 측벽 전면에 刻되어 있다.
이로 보면 성창을 축조한 지 122년만에 비를 건립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화북마을지 94쪽)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는 바 1702년 이형상 목사가 그린 탐라순력도 禾北城操에는
이미 방죽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객사는 왕명을 받들고 화북포구를 오가는 관리들이 묵을 수 있도록 1699년(숙종 25) 남지훈 목사가 지었다.
추사 김정희와 면암 최익현 등 유배인들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
이처럼 화북포구는 제주를 오가는 이들에게 많은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애환이 서린 포구였으며 역사의 현장이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배비장전(裵卑將傳)'의 도입부인 정비장(鄭卑將)과 제주기생 애랑이
이별의 정회를 나누던 문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포구 서쪽에는 바다 용왕신을 모시는 해신사(海神祠)가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할 때면
제를 올려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곳이다.(잊혀져가는 문화유적)
다음은 인조 때 유배된 왕족 이건(李健.1614~1662)이 제주를 떠나면서 쓴 시 ‘바람을 기다리다
성을 나서며(待風出城)이다.
今日離耽島 何時到蔚珍 煙波頻極目 雁鴨亦沾巾 長嘯思歸路 悲吟愧野人 傷心重掩涕 廻首望城闉
(“오늘 탐라(耽羅) 섬 떠나면/ 언제 울진(蔚珍)에 닿으랴/ 안개는 자주 끼어 눈 닿는 곳까지/ 기러기며
물새소리에 더욱 수건 적시네/ 긴 휘파람 불며 돌아갈 길 생각하는데/ 슬픈 신음, 시골사람에게 부끄러워/ 상한 마음 다시 눈물 거두고/ 머리 돌려 성문을 바라보네.")
이건은 선조의 손자로, 광해군복위사건에 연루된 아버지 인성군의 죄에 연좌되어 1628년(인조 6)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길에는 어머니 윤씨와 형제 5남2녀가 함께 했다.
8년여 간 제주읍성에 안치된 그는 1625년(인조 13) 원종(인조의 부친)이 종묘에 배향되는 경사로,
그 해 11월 강원도 양양으로 이배 명령을 받는다. 그는 유배생활의 회한을 정리하고,
별도포를 통해 하루 빨리 육지에 닿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의 육지행은 쉽지 않았다.
겨울 동남풍을 만나야 육지로 갈수 있는데, 바람이 그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두 번은 출항을 했지만,
역풍을 맞아 별도포로 되돌아온 후, 한달여 만인 12월 26일 출항하여 추자도에 닿는다.
출처 : http://jejuhistory.co.kr (고영철의 역사교실)
첫댓글 화북포구가 육지를 드나드는 관문이었군요..자전거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포구기행을 하면 괜찮을거라 생각합니다.
도서관가서 다음의 책 적극 추천합니다.너무 너무 재밌엇음.울 카페에도 적용시킬 부분이 많앗읍니다.
"제주역사기행? - 2010년 2월 21일
제주역사기행. 저자: 이영권 지음; 출판사: 한겨레신문사 ... 현대사의 비극 4.3 등 제주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은 기행 안내서. 제주 역사 탐사의 키포인트들을 한 ..."
한번 빌려서 읽어봐야 겠네요...
포구의 역사도 알아가면 아주 재밌있는것 같아요... ^^
심지어 한라산일기도 사진반+글자반 대충읽엇습니다만
제주역사기행은 주번에 후다닥 다 읽음.
크~! EPL님 하나 사주삼~!~! 그럼 읽을의향 있습니다.~!~!ㅋㅋ 포구여행 정말 재미나죠.
돈지다.....ㅋㅋ
제가 토욜 점심시간 소풍으로 가는 곳이네여.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무쟈게 반갑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