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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20(주) 주일예배 / 제목 : 믿음 성장을 원하시는 하나님(막 8:22~25)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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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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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도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8장 22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믿음 성장을 원하시는 하나님’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론 / 오늘은 믿음 성장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단번에 고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기사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안수 기도를 하심으로써 고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맹인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함이셨습니다. 맹인은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믿음이 없는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맹인의 믿음이 온전히 세워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처음 믿음을 갖게 된 이후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의 믿음은 계속 자라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자라야 할까요? 그 수준은 예수님의 수준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주실까요? 오늘은 이런 관점에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주실까요?
1. 먼저 믿은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22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님이 벳새다 지방에 도착하셨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오늘 나오는 본문의 맹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은 맹인 바디메오를 고치시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맹인 바디메오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를 지르며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막으면, 더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찾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은 어떻습니까?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잘 보면, 이 맹인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맹인을 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맹인이 치유 받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벳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 치료를 받게 한 사건처럼 그 이웃의 믿음으로 치료를 받은 사건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 벳새다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1:21, 눅10:13)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가장 타락했던 두로와 시돈에 이 벳새다만큼 능력을 행하였으면 변하였을 텐데, 너희들은 변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면 벳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벳새다 사람들이 앞을 못 보는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찾아와서는 예수님이 손을 대서 병을 낫게 해주시기를 부탁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과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임을 확신해서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들에게 단순히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싶지는 않아서입니다. 반면에 맹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맹인은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타의에 의해서 예수님께 이끌려 나왔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맹인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거기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믿음이 점점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기 위해서 신앙의 먼저 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은 당대에 유명한 자였으나 나병(문둥병)에 걸려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하 5:1~14) 그때 포로로 끌려와서 자기 집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한 소녀가 이스라엘 땅에 나아만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아람 왕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을 통하여 나병을 고침 받았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처음에 나아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으나 연약한 한 소녀의 인도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을 하나님께로 이끈 중보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예수님께 먼저 부름을 받은 제자 빌립이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요 1:43~51)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처음부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짧고 확신에 찬 말로 권하였습니다. “와서 보라.” 이 말에 나다나엘은 친구가 하도 강하게 말하기에 속는 셈 치고 빌립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미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서 말씀하니까 놀라서 예수님께 고백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그 날부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빌립도 나다나엘의 믿음의 시작을 도와주었던 귀중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준 것에 대하여 평생 빌립에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어디 나다나엘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오늘 믿음의 자리에 서기까지 나를 이끌어준 먼저 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수고와 헌신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할 때입니다.
누군가가 믿음이 전혀 없었는데 그가 나로 인하여 믿음을 갖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요? 나아만이 포로로 잡혀온 소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나다나엘이 빌립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역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먼저 그분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하시고 나도 누군가를 주님을 믿게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주실까요? 1. 먼저 믿은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2. 예수님이 붙드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23상)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왜 이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셨을까? 그리고 이 맹인은 어떻게 그 마을에서 나갈 생각을 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맹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맹인에게는 간절함이 없었고 나음을 받고자 하는 소망도 믿음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벳새다 라는 그 마을 자체가 불신앙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는 “터”를 바꾸셨던 것입니다. 장소를 바꾼 것입니다.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디메오처럼 바로 그 자리에서 치유를 베풀어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소만 바꾸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데리고 나갈 때 어떻게 나가셨습니까? 맹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믿음 없는 자의 손을 붙잡으시고 인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손을 잡으심은 바로 이 맹인만을 위한 사랑의 표현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 맹인은 애초에 예수님도 잘 모르고, 남들에 의해서 억지로 그 자리에 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그 마을에서 이끌어 내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바로 순종했습니다. 이 맹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을 다른 곳으로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맹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 난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로 가자는 것이지?” 라는 마음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예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의 결과가 그의 치유로 이어졌습니다.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처음에 그에게는 없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의심하거나, 반항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거나 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예수님이 이끄시는 데로 따라 나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믿음이 없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단번에 그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맹인이 믿음을 갖고 믿음으로 병이 낫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바깥으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능력의 손으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것도 보통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계속해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만한 믿음이 자라났을 때 놀라운 치유를 베풀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주실까요? 1. 먼저 믿은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2. 예수님이 붙드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3. 예수님이 점점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23하~25절) “...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님은 침을 뱉어 눈에 바르신 후에 안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이에 맹인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처럼 생긴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입니다.”
맹인은 아직 시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희미하게 사람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의 눈을 완전하게 회복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계적인 회복 과정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세워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맹인에게 안수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이번에는 집중해서 주변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주변 사람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은 독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도, 그 방법에도 순종합니다. 23절을 보니,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참 특이하시죠? 이와 비슷한 치료 방법이 또 나옵니다. 마가복음 7장 33절에도 보면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도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9장 6절에서도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실 때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독특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전승에 따르면 당시 이렇게 침을 바르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동물들이 침뭍은 혀로 새끼를 핥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손을 머리에 얹어 안수를 하기도 하고, 아픈 곳을 직접 대기도 하지만, 때로는 백부장의 종을 살리실 때처럼 말씀으로만 치료하시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여러 모습으로 치유하셨지만, 그 방법들에는 형식이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바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받는 자의 자세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도 예수님의 방법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해 되지 않는 것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되는 것만 순종하는 것은 선택적인 수용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방법이 비록 이해하기 힘든 방법일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형통의 길로 들어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처럼 철저하게 주님의 방식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우리의 영적인 눈을 점점 밝혀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아침 안개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영원하고 아름다우신 주님과 주님께 함께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
결론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주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하나님은 믿음이 전혀 없던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첫째, 먼저 믿은 사람들이 와서 믿음의 씨를 뿌리고 물 주게 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이 내 손을 꼭 붙잡으시고 인도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이 나에게 안수해주시어서 믿음의 내 눈을 열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렀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의 수준까지 믿음이 자라나도록 매일 매일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럴려면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하고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이런 믿음성장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결론핵심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성장임을 깨닫고 믿음 있는 사람이 됩시다.
요약정리 :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주실까요?
1. 먼저 믿은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2. 예수님이 붙드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3. 예수님이 점점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