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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35. [역경의 열매] 조형섭 (1-17) 28년 사랑으로 섬긴 선교지 ‘에볼라’로 큰 고통
신학대 입학금 마련 위해 막노동… 하나님의 주관대로 선교지 파송돼
조형섭 라이베리아 선교사가 지난 12일 파송 교회인 서울 안디옥교회에서 세계지도 속 라이베리아를 가리키고 있다. 허란 인턴기자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일을 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고향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됐다. 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달라고 늘 기도해 왔다. 그동안 이 기도의 열매를 체험하며 살아왔고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지면을 빌어 감사로 점철된 삶을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52년 경북 안동 유교 집안의 10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수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나는 큰 어려움 없이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맏아들이 제사를 이으니 죽어도 굶을 걱정은 없다”며 교회 출입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유교 집안인지라 신학대 진학에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입학금과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당시 정부가 전국 산에서 아카시아나무를 제거하고 밤나무로 대체하는 사업을 펼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국책사업에 지원했다.
비탈진 산에서 하루 종일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밤나무를 수백 그루 심었다. 하도 삽질을 하느라 물집이 많이 잡혀 손바닥에 염증이 생겼다. 나머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탄광에서도 일했다. 하지만 1주일 만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이 같은 고생을 견딘 후 그토록 소원하던 신학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힘들고 외로운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동료 신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내게는 교회를 소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저 주말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 제발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연결해 주옵소서.”
수개월 뒤 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역자 사례비가 전혀 없는 미자립교회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섬겼더니 교회에서 첫 달은 교통비를, 이후에는 생활비를 지원해 줬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신학 공부를 하며 교회를 섬겼던 이때가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목회의 기본을 배웠고 독실한 신앙인이자 간호장교인 아내와 만나 결혼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와 함께 선교지에서 살며 현지인들을 살리고 위로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내가 28년간 사랑하며 섬긴 선교지는 오랜 내전을 겪은 아픔의 땅이다. 최근엔 세계를 공포로 떨게 했던 에볼라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이름은 ‘라이베리아’다.
나는 선교지에서 세 가지 원칙을 정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첫째, 한 알의 밀알(요 12:24)이 땅에 떨어지듯 영혼을 살리는 일에 모든 것을 희생한다. 둘째,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에 따라 산다. 셋째,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남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다 쏟는다.
세 가지 선교 원칙의 근본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나를 희생할 때, 하나님은 선교지에서 변화를 이끌어내셨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그러기에 모든 생사와 소유를 하나님께 맡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 28년 사랑으로 섬긴 선교지 '에볼라'로 큰 고통
* [역경의 열매] 조형섭 (2) 사고로 대수술 "주님, 다시 걷게 해주신다면…"
* [역경의 열매] 조형섭 (3) 추장·원주민들 "우리 마을에 교회 지어주세요"
* [역경의 열매] 조형섭 (4) 슬픈 내전의 선교지 "내가 죽어 묻힐 곳은 이곳"
* [역경의 열매] 조형섭 (5)"내전의 땅 지킨 당신은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
* [역경의 열매] 조형섭 (6) 선교센터 찾은 난민들에 음식 제공·상처 치료
* [역경의 열매] 조형섭 (7) 14년 내전 최대 피해자 아이들 위해 학교 설립
* [역경의 열매] 조형섭 (8) 태권도 보급 통해 국위 선양·그리스도 제자훈련
* [역경의 열매] 조형섭 (9) 간호장교 출신 아내는 주께서 예비한 의료선교사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0) "한국인 목사님,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세요"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1) 의료시설 낙후 의약품도 없어… 오직 주님만 의지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2) 아내, 내전 속에서 성경만으로 두 아이 한글 교육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3) 세살 때부터 자갈 깨던 아이들 위해 학교 설립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4) 오지 마을 천사들 위해 봉헌한 그레이스 학교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5) 에볼라 국가비상사태에도 "현지인과 고통 함께"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6) 태권도협회 300명 '에볼라를 차 버리자' 행사
* [역경의 열매] 조형섭 (17·끝) 14년 내전·에볼라 위에 나를 세우신 하나님!
◇약력=1952년생, 81년 대구신학대학 졸업, 84년 총회신학대학원(서울 사당동) 졸업, 87년∼현재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선교사, 라이베리아태권도협회 대표이사, 라이베리아 KLCM 선교회 대표, 2013년∼현재 밀알복지재단 라이베리아 책임프로젝트매니저.
***[역경의 열매] 조형섭 (2) 사고로 대수술 “주님, 다시 걷게 해주신다면…”
서원기도 후 기적적으로 건강 회복, 그러던 어느날 아프리카 선교 소명이
1987년 선교지인 라이베리아로 떠나기 전 찍은 가족사진. 조형섭 선교사는 현재 대구 늘빛교회에서 파송 받아 라이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3년 벚꽃이 필 4월 무렵,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는 총력 전도주간이었다. 종일 교회 홍보를 마치고 밤 11시쯤 귀가하던 중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하늘로 솟았다. 만취 상태의 오토바이 운전자가 인도에서 걷고 있던 내게 돌진한 것이었다. 왼쪽 다리에 큰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수술해도 걷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때 아내는 둘째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걷게만 해 주신다면 어디라도 부르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발목 관절에 4개의 핀을 박아 고정하는 대수술을 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수술이 잘 돼 기적적으로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술 후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당시의 기도를 잊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보게 됐다. 항생제 한 알이 없어 사소한 상처에도 팔, 다리가 잘렸고 목숨마저 잃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곳에 우리 부부가 간다면 저 아이들 몇 명이라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당시 아내는 육군간호장교 대위였다. 우리 부부가 선교사로 가 나는 복음 전파를, 아내는 의료 봉사를 하면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86년 어느 날, 나는 담임목사와 함께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의류 사업을 하다 일시 귀국한 한 자매를 심방했다. 그 자매는 “라이베리아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며 “한인교회가 세워지길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아프리카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곁에 있던 담임목사가 내게 갑작스런 질문을 던졌다.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할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나는 “저 같이 부족한 사람도 선교를 할 수 있나요? 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이 라이베리아 선교의 단초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날 저녁 담임목사는 아내와 장모도 참석한 수요예배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광고했다. “조형섭 목사가 아프리카로 선교를 간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족과 한마디 상의도 해 보지 못한 채 라이베리아행이 확정됐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4개월 만이었다. 아내는 간호장교로 일하며 두 자녀를 키우는 동시에 8년간 내 신학과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부모와 친지 모두 아내에게 “신학생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다”며 “목사 안수를 받으면 모든 고생은 끝날 것”이라고 위로했다. 나 역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앞으로 잘하겠다’며 아내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아내는 퇴근 후 수요예배에 참석했다가 난데없이 남편의 아프리카 선교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얼마나 서운하고 당황했을까. 하지만 아내는 묵묵히 아프리카 선교 행을 지원했다.
문제는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만류였다. ‘별나게 예수 믿는다’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미개한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 사실이냐’ 등 별의별 말이 들려왔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부족한 종을 선교사로 택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염려는 크게 되지 않았다. 주님께서 선교사로 택하셨다는 것만으로 배부르고 넉넉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생의 큰 위기를 기회 삼아 머나먼 아프리카로 나를 보내신 하나님.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하나님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3) 추장·원주민들 “우리 마을에 교회 지어주세요”
라이베리아 오지마을 가난·질병 고통… 주민들에 사랑 베풀자 마음의 문 열어
조형섭 선교사가 1987년 라이베리아 오지 마을에서 현지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87년 2월 4일. 3일간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 도착했다. 당시 라이베리아는 우리나라 6·25전쟁 후의 모습과 비슷했다. 일전에 심방했던 그 자매가 공항에서 나를 맞았다. 공항 밖을 조금 나서자 낙후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아내와 아이들보다 먼저 온 나는 가장 먼저 지낼 집부터 구했다. 수중의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수도 몬로비아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3년간 아무도 살지 않던 집에는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렸고 벽은 곰팡이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급한 대로 대충 수리를 해 생활했다. 집에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이곳을 출입구 삼아 도둑이 수시로 들어왔다. 도둑은 옷 신발뿐 아니라 밥그릇과 수저까지 훔쳐갔다. 도둑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에서 이것저것 훔쳐갔는데 고맙게도 내 생명은 해치지 않았다.
이곳에 온 지 4개월이 지난 6월 24일, 아내와 아이들이 도착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라이베리아에 정착한 한인뿐 아니라 지역 원주민을 모아 ‘성천교회’를 개척했다.
이 시절 아내와 나는 각 지역의 현지인이 사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오지 마을을 찾았다. 방문한 마을 대부분은 주민들 종교가 이슬람이라며 우리를 거부했다. 매일 같이 아침 일찍부터 마을을 방문해 계속 거절만 당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일정 중 마지막으로 도착한 마을에서 우리 부부가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오지 마을의 삶을 살펴보게 되었다. 마을에는 환자가 많았다. 근처에 갈 만한 병원도 없고 구할 수 있는 약도 없어서였다. 오지 마을로 갈 때마다 차에 약품 의류 쌀 등을 싣고 다니던 나와 아내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 마을부터 돕기로 마음먹었다.
오지 마을 주민들은 오랜 굶주림으로 체력이 약해져 작은 상처나 가벼운 감기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우리는 굶주린 이들에게 쌀과 생필품을 주고 말라리아나 상처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를 치료했다. 마을 사람들은 잔치가 열린 듯 하루 종일 환호하며 기뻐했다.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해 쌀과 약품을 나줘 주고 진료 활동을 펼쳤다. 그러자 갑자기 마을 추장과 원로들이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어 달라는 것이 아닌가. 추장은 “우리 마을에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위한 교회를 세워준다면 우리도 그분을 믿겠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추장과 원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현지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기뻐했다.
“하나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릴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며 우리는 자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차에 의약품과 생필품뿐 아니라 의류, 소형 발전기, 비디오 등을 싣고 가 오지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한 뒤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니 점차 더 많은 마을이 마음을 열었다. 또 더 많은 지역의 현지인들이 교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건축의 ‘ㄱ’자도 몰랐지만 나는 이들의 요청에 힘입어 88년 수도 인근 콩고타운에 선교센터(이후 Korean Liberian Church Mission)를 짓기 시작했다. 몇 십년 후 라이베리아를 넘어 아프리카 전체를 품을 생각으로 기대하며 공들여 건축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곳에서 내전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에 맞서야 했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4) 슬픈 내전의 선교지 “내가 죽어 묻힐 곳은 이곳”
반군, 주민 무차별 학살에 재산 약탈… 죽음의 위기에도 성도들 끝까지 지켜
1990년 6월 라이베리아 도심의 국내선 공항에서 마지막 국제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지 3년째 되던 1989년 내전이 터졌다. 라이베리아는 19세기 초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건설한 나라다. 1847년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공화국으로 출범해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지만 미국에서 해방된 소수의 노예 출신 정착민과 토착 원주민들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건 89년 12월 반군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코트디부아르에서 라이베리아 국경지대로 기습공격을 개시하면서부터다. 반군은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며 수도 몬로비아를 향해 진격했다.
반군은 통과하는 마을마다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는가 하면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성폭행했다. 반군을 피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수도로 피난을 왔다.
나는 수도 인근의 콩고타운에서 선교센터를 짓고 있었다. 콩고타운이 수도와 가깝고 대사관 밀집 지역이라 그런지 외지에서 반군을 피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오지 마을에서 전도했던 성도들도 피난을 와 교인 수는 점차 불어났다.
90년 4월쯤 반군이 수도 인근 마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제 반군이 들이닥칠지 몰라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주라이베리아 한국대사관과 한인들은 5월쯤 라이베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는 성도들에게 인근 국가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나는 선교사로서 전쟁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지인을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죽을 각오로 라이베리아에 계속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인과 현지인 성도들은 ‘그럼 나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이들은 ‘반군과 정부군 누가 수도를 장악하든 길어야 3개월 내에 끝난다’고 생각했다. 정부군이 “반군이 와도 1주일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생활하던 사람들은 재산을 지키고픈 생각에 피난을 꺼렸다. 하지만 내전은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인 대다수가 철수하던 5월쯤 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태웠다. 당시 열한 살이던 큰딸은 ‘아빠도 같이 가자’며 울면서 매달렸다. 그럼에도 뜻을 꺾지 않자 아내는 “당신은 정말 고집도 세다”며 울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을 보낸 뒤 성도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는 데 집중했다. 나는 1주일간 마른 빵을 먹고 땅바닥이나 선교센터 승합차 밑에서 잠을 자며 한인과 현지인 성도 15명을 승합차에 태워 기니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라이베리아에는 떠날 돈도, 떠날 곳도 없는 500여명의 현지인 성도가 남아 있었다. 기니에서 성도들을 안정시킨 후 다시 라이베리아에 들어갈 방도를 찾았다. 마침 라이베리아에서 약탈한 물건을 시에라리온에 실어 나르는 도둑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배를 타려고 기니에서 이틀을 걸어 시에라리온으로 갔다.
도둑들은 배에 외국인을 태울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험상궂게 생긴 한 도둑이 “당신도 물건을 훔치러 가느냐”고 물었다. “당신 나라, 라이베리아를 도우러 간다”고 하니 그는 날 배에 태웠다.
6월쯤 반군에게 국제공항이 파괴된 뒤 임시로 사용하던 국내선 전용 공항에서 타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가 출항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비행기에 일부 성도를 태우고 선교센터로 돌아오면서 ‘주님 앞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반군이 무차별 공격을 해오면 죽는 일만 남았다. 선교사인 내가 죽어 묻힐 곳이 라이베리아 땅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동시에 가족들 얼굴도 아련히 떠올랐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5)“내전의 땅 지킨 당신은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
반군, 선교센터 점령해 주둔지로 사용 다시 찾은 선교지… 외국인은 나 혼자뿐
내전 중 라이베리아 콩고타운 시내 거리에서의 조형섭 선교사.거리에서 본 전쟁의 모습은 참혹했다. 수도 근처로 반군이 접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두와 시가지는 폭격에 맞아 불탔다. 10∼12세 남짓한 소년병들은 자신의 키만한 총을 든 채 도로를 점거하고 목표물 없이 총을 난사했다. 점차 거리엔 시체들이 쌓였다.
내전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먹을 것을 못 구해 죽어갔다. 굶주림에 지친 이들은 해변의 코코넛 나무를 모두 잘라 나무속을 파먹었다. 나무가 하나도 남지 않자 쥐 개 고양이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었다.
내전 기간에 격전과 소강상태가 반복됐다. 반군과 정부군은 격렬히 싸우다가도 소강상태가 되면 그게 몇 달이든 아무 일 없던 듯이 지냈다. 교전이 멈추면 배나 비행기 등 교통수단이 다시 운행됐기 때문에 그때마다 기니에서 쌀을 사오거나 현지인 성도들과 예배를 드렸다. 라이베리아에 홀로 남은 나는 격전 기간에 조금 남은 쌀을 빗물에 불려 먹으며 근근이 생명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기니의 성도를 만나러 갔을 때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반군이 선교센터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영국 BBC 뉴스를 보니 정말 선교센터 앞에 철제 바리케이드와 모래포대를 쌓은 방어벽이 설치돼 있었다.
반군의 수장 찰스 테일러는 콩고타운에 진격해 선교센터를 장악했다. 뒤는 끝없는 늪이요, 앞은 대서양이 펼쳐진 선교센터가 방어와 공격에 최적의 장소라 여겼기 때문이다. 선교센터는 1984㎡(약 600평) 규모로 많은 군인들이 머물기에 적합했고 웬만한 폭탄이 떨어져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뉴스를 본 뒤 대책을 상의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 후원교회를 찾아갔다. 후원교회는 라이베리아 선교를 중단할 것을 제의했다. 나는 “내전은 3개월 내에 끝나며, 고난 속의 라이베리아 성도를 외면할 수 없다”며 맞섰다. 그러자 후원교회는 91년 모든 후원을 중단했다. 후원이 끊기면 자연히 선교를 그만둘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지인들과 기니로 피신했던 한인들의 지원을 받아 라이베리아로 돌아갔다. 훗날 이들은 내전 중 굶주리는 현지인에게 줄 쌀을 후원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콩고타운으로 돌아가니 상황이 변해 있었다. 반군이 주둔했던 선교센터를 정부군이 점령한 것이다. 정부군은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군인 가운데 내게 복음을 전해 듣거나 태권도를 배운 제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교 지도자를 우대하는 전통대로 다시 돌아온 나를 해치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찾은 선교센터엔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둥은 무너지고 천장과 벽에는 금이 가 있었으며 센터 앞 대로에는 탄피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심지어 방 안의 모든 책에도 총알이 박혀 있었다.
동네 모습은 더 처참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콜레라가 창궐해 내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죽었다. 현지인도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곳에 남은 외국인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살아남은 현지인과 정부군은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나를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
‘함께한다’는 말의 의미는 즐거운 시간뿐 아니라 고통의 시간도 같이 견디는 것이다. 지금도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현지인들을 생각하면 옷 한 벌 사는 게 망설여진다. 이 값이면 더 많은 약과 쌀을 나눠줄 수 있어서다. 앞으로도 이 마음이 변하지 않길, 그래서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으로 평생 살아가길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6) 선교센터 찾은 난민들에 음식 제공·상처 치료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던 아내, 태권도 가르쳐준 경찰 도움받아
1997년 1월 내전 당시 라이베리아 장애인에게 쌀을 전달하는 조형섭 선교사.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고난 가운데 놓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라이베리아에서 내전과 굶주림을 모두 체험하니 도움을 갈구하는 현지인의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1994년 내전이 소강상태가 됐을 때 다시 라이베리아로 돌아왔다. 기니와 한국에서 각자 지내던 우리 가족은 이때 다시 만났다. 다시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이야말로 현지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강상태라고는 하지만 끝날 듯 계속되는 교전으로 도심을 제외한 지방은 아직 위험했다. 도심 밖에는 5㎞마다 검문소가 있어 자유롭게 이동하기 힘들었다. 난민들은 그나마 안전한 도시로 모여들었고 곧 도심은 복잡한 난민촌이 됐다.
한두 평 되는 흙집이라도 얻은 난민촌 사람들은 사정이 그나마 나았다. 비정부기구(NGO) 등 국제원조단체에서 나눠주는 식량이라도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못 받는 이들은 굶주림 속에 허덕였다. 우리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나누고 치료해줬다.
그랬더니 선교센터 앞으로 매일 40∼50명의 헐벗고 아픈 이들이 찾아왔다. 우리도 가진 것이 거의 없었지만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쌀이 없으면 옷이나 물건을 줘 식량을 구하는 데 보태 쓰도록 했다.
식량이 워낙 부족해지자 우리 가족과 현지인들은 사료나 쥐똥 섞인 쌀을 삶아 먹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이런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설사를 하다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매일 아프다며 선교센터를 찾아오는 이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내전으로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배를 드리며 점차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매일 밤이면 한두 번씩 총성이 들렸다. 우리 가족은 언제든 급히 피난 갈 수 있도록 식량과 물, 옷가지를 항상 곁에 두고 잠들었다.
96년 부활절 전날 밤이었다. 피난 간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 나 홀로 기니에 가 있을 때였다. 평소였다면 몇 번이면 끝났을 총성이 이튿날 정오가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아내는 5분 만에 짐을 챙겨 자녀 둘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아내는 선교센터를 나와 강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90년 내전 당시 한국 대사관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강 근처 다리는 반군들이 지키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교전이 벌어져 이동이 쉽지 않았다. 총격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상황에서 아내는 미국 대사관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피난 가는 이들 사이에서 정신없었던 아내에게 한 현지인 경찰이 '조형섭 목사'를 안다며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알고 보니 그는 내게 태권도를 배운 제자였다.
제자인 현지인 경찰의 도움으로 아내는 몇 시간 뒤 자녀들과 함께 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 대사관에 있다가 한국 정부의 긴급 조치로 안전하게 라이베리아를 빠져나온 아내와 자녀들은 기니에서 날 만나자마자 목 놓아 울었다.
라이베리아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내려놔야 했던 건 단순히 안전과 편리함뿐만이 아니었다. 재산, 교육, 목숨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28년간 이들을 위해 생명을 내건 삶을 살았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7) 14년 내전 최대 피해자 아이들 위해 학교 설립
반군 소년병들 최전선에서 총알받이… 팔·다리 잘린 아이들 구걸·노숙생활
1996년 내전으로 학교를 못 다닌 아이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는 조형섭 선교사.
“탕! 탕! 탕!”
열 살가량 된 소년병들은 언제나 제일 앞에서 자신의 키만한 총을 들고 목표물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초점을 잃은 눈빛에서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반군에게 붙잡힌 아이들은 맨 앞에서 가장 먼저 쓰러지는 총알받이로 희생됐다. 반군들은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에게 ‘총알이 피해가는 약’이라며 마약을 먹였다. 마약에 중독된 소년병 대다수는 내전 중에 팔과 다리가 잘리거나 목숨을 잃었다. 요행히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은 소강상태 때마다 도시에서 구걸하며 노숙생활을 했다.
“이 어린 것들이 할 수 있는 게 구걸이나 총질밖에 없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14년 내전 동안 라이베리아 국민 35% 이상이 희생됐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에 중독됐고 고아가 돼 거리에 방치됐다. 나는 가족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며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숨지는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도했다. 이들을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교육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야말로 아이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라이베리아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교센터로 불렀다. 순식간에 250명 정도가 모였다. 1996년 선교센터의 한 공간을 학교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학교 이름은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Korean Liberian School)’로 정했다.
우리 부부는 알파벳과 숫자부터 가르쳤다. 학교에 지붕도 없었고 교과서 공책 등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벽에 검정색 페인트를 칠해서 칠판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인근 기니에 가 칠판과 분필을 구했다. 책걸상을 마련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들은 돌멩이나 벽돌을 가져와 쪼그려 앉아 공부했다. 배움을 향한 아이들의 열의는 뜨거워 공사 중인 공간에도 3∼4개 반의 수업이 함께 진행됐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두 맨발로 학교에 와 허기진 배를 달래며 공부했다. 내전 기간 모든 학교가 문을 닫아 스무 살 엄마와 다섯 살 자녀가 손잡고 학교에 오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5학년 교실, 딸은 유치원 교실에서 공부했다. 자녀가 있는 중학생들도 많았다. 열일곱 살 청소년이 2학년 교실에서 한참 어린 동생들과 수업을 듣기도 했다.
라이베리아 상황이 점차 안정되면서 교사에게 월급도 주고 학생에게 학비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교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생활비를 쪼개 교사의 양적·질적 향상을 위해 제자들을 교사 훈련원에 보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지 28년. 라이베리아 어딜 가도 제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어느새 30∼40대가 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했다.
우리는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을 시작으로 라위스, 크로존타운, 로파 포야 등 10개 지역에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를 거친 라이베리아인은 2000여명에 달한다. 제자들은 나를 ‘파더(아버지)’라 부른다. 정말 이들은 내가 가슴으로 낳은 자녀들이다. 이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오래 살면서 우리를 계속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교통사고를 선교의 기회로 바꾸신 하나님께서는 내전으로 상처 입은 땅에 복음과 교육을 전해 라이베리아 미래를 바꾸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8) 태권도 보급 통해 국위 선양·그리스도 제자훈련
내전으로 약해진 아이들 체력 단련, 라이베리아 정부·국민에 폭발적 인기
1988년 조형섭 선교사가 창단한 할렐루야태권도팀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있다.
라이베리아 사람들은 태권도를 좋아한다. 태권도 행사에서 품새 시범을 보이기만 하면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따라한다. 이들이 태권도를 좋아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1987년 라이베리아에 도착해 보니 이곳에는 일본 가라테와 중국 우슈 등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태권도는 한국정부가 사범을 파견해 오다 70년대 후반부터 지원을 중단해 널리 보급되진 못했다. 나는 라이베리아에 국위선양과 체력증진, 복음 전파의 통로로 태권도를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는 모두 조국을 사랑했다. 우리 부부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애국심이 크다고 자부한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태권도 단기선교사들과 라이베리아 여러 마을을 돌며 태권도의 기본을 가르쳤다. 수년간 매일 새벽기도를 마친 후 마을을 돌면서 가르치니 내게 배운 제자들이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아 가르치게 됐다. 70년대 초반 군대에서 딴 태권도 1단으로 사역을 시작했던 나 역시 부단한 노력 끝에 3단까지 올랐다. 지금은 선교센터에 라이베리아 태권도협회 본부를 설치해 라이베리아 태권도 발전에 힘쓰고 있다.
태권도를 전파한 지 2년쯤 지나자 라이베리아 정부가 관심을 보였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태권도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던 때라 그런지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 그 결과 라이베리아 대통령궁 경호실과 경찰학교, 군부대, 정보부, 이민국 등에 태권도가 보급됐다. 현재 라이베리아 전역의 18개 도장에서 국민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
정부 고위 관료 가운데에도 태권도 유단자가 여럿이다. 이들은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전력을 가다듬고 있는데 현 라이베리아 국방부 장관인 사모카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태권도 유단자로서 태권도 발전과 선교 사역에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는 라이베리아 모든 학교에서 태권도 수업을 하게 하는 것이다. 내전 당시 매일 학교에 오던 아이가 체력이 약해져 죽었는데 나는 이 일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 체력을 기르기 위해선 급식으로 영양을 공급할 뿐 아니라 반드시 운동도 필요하다는 걸 이때 알았다. 학생들의 체력단련을 위해 나는 현재 학교 다섯 곳에 제자들을 파견해 태권도 정규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군대에서 익힌 태권도로 낯선 땅 라이베리아에 태권도협회를 설립해 전파할지 누가 알았으랴. 그러고 보면 태권도는 제자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사범은 태권도 기본을 가르쳐 제자를 기른다. 제자는 체력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며 사부의 말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 또 실력을 쌓은 뒤 새내기에게 배운 것들을 전수하며 사범이 된다. 지극히 성경적인 제자훈련의 원리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말씀으로 영성을 키우고 변화돼 또 다른 이들을 돕는 자로 서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제자들은 나를 ‘태권도의 대부’라고 부르며 어딜 가든 환영해준다. 내가 이들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라이베리아 태권도협회에 가입한 1500여명의 제자들은 내전 때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며 치열하게 싸웠지만 지금은 태권도를 배우며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전투복이 아닌 도복을 입은 제자들이 라이베리아 곳곳에 예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길 기도한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이들의 곁을 지키지 못할 때 이들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치유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영적 대부’가 되길 바란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9) 간호장교 출신 아내는 주께서 예비한 의료선교사
의료시설 열악 무당 등이 주술치료… 아내 사랑의 진료로 주민 마음 열어
조형섭 선교사의 아내 오봉명 선교사가 오지 마을을 찾아 환자를 검진하고 있다. 오 선교사는 간호장교 출신이다.
2005년 당시 18세 소녀였던 ‘수모’의 어머니는 네 번째 남편을 잃고 집안일이 잘 풀리지 않자 무당을 찾았다. 무당은 수모가 귀신이 들렸으니 아이 다리에 상처를 내면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했다.
그해 라이베리아 오지 마을에서 수모를 만났다. 수모는 상처 때문에 다리 살이 썩고 있었고 걸을 수조차 없었다. 우리 부부는 5년간 꾸준히 수모를 찾아 상처를 치료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무당도 귀신을 쫓는다며 수모 다리에 계속 상처를 냈다. 수모와 병원을 찾으니 의료진은 다리를 절단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모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살길을 내셨다. 수모는 한 비정부기구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수술을 받아 다시 걷게 됐다.
라이베리아에는 의료 지식의 부족으로 전통적 주술에 기대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곳에서 치사율이 가장 높은 말라리아에 감염되면 고열과 설사를 동반해 탈수로 죽거나 며칠씩 일어나지 못한다. 해열제와 말라리아 약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현지인들은 풀을 짓이겨 몸에 바르거나 나뭇잎 삶은 물을 마신다. 고열에 시달릴 때는 뙤약볕에 맥없이 누워 있곤 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우리 부부는 1987년부터 오지 마을을 돌며 약품을 전달했다. 아내는 평균기온 40도에 이르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 하루 종일 환자를 치료하느라 매우 고생했다. 그러나 우리가 고생할수록 환자들은 치유됐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들이 연신 고마워하며 복음을 받아들일 때면 모든 고생이 물밀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오지 마을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생후 1년 정도로 보이는 아기가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몸은 뼈밖에 없어 앙상했고 눈은 초점이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기를 안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을 추장에게 우유와 쌀, 돈을 주고 아기를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당부했다. 병원에서는 아기의 위장이 상했다고 했다.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자란 아기는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위장에 상처가 났던 것이다. 나는 추장에게 우유와 쌀을 더 주며 병이 회복될 때까지 아기를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후 다시 가 보니 죽어 가던 아기가 살아 마을을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산골에서 하릴없이 죽어 가던 어린 아기가 우리의 작은 후원으로 살아난 것이다. 이러니 내가 이 일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시골 교회를 찾아가는데 한 여인이 차를 막아섰다. 차에서 내려 연유를 물으니 여인은 갑자기 윗옷을 들추고 불룩 나온 배와 부상 입은 가슴을 가리켰다. 어린 시절 숯불 화덕에 넘어져 크게 화상을 입은 그는 8번 해산했지만 유두가 없어 매번 젖을 먹이지 못해 자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번만은 자녀를 꼭 살리고 싶다며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마을 주민들도 그의 딱한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출산 후 연락하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한 달 후 여인은 아들을 낳고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아이 이름을 ‘보아스’라 짓고 여인에게 우유를 공급해줬다. 보아스는 건강하게 자라 이제 일곱 살이 됐다. 그 마을만 가면 가장 먼저 뛰어나와 반갑게 맞는다. 마을 주민들은 보아스를 우리 손자라 부른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약한 것을 치료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게 선교이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내 눈에 불쌍한 소자(小子)가 보이면 목숨을 걸고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0) "한국인 목사님,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세요"
주민들, 출혈 심한 환자 들것에 싣고 내전 아픔 함께 겪은 우리 부부 찾아와
라이베리아 오지 마을에서 몸이 아픈 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조형섭 선교사
2008년 정커팜 지역에 개척한 은혜교회로 예배드리러 갈 때의 일이다. 교회 앞에서 나를 맞는 성도들이 보일 때쯤 갑자기 내 차 앞으로 장정 10명이 뛰어왔다. 네 명은 들것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코리안 파스터(한국인 목사)! 여기 사람이 죽어 갑니다!"
현지인과 동일하게 내전을 겪은 외국인으로 유명해진 나는 사람들에게 이름 대신 '코리안 파스터'로 불렸다. 들것을 보니 한 여인이 누워 있는데 담요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장정들 중 한 사람이 이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는 출산하다 출혈이 심해져 아내가 이렇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 목사만이 아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나를 만나러 2시간 동안 죽기 살기로 뛰어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이 여인을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에게 설교를 부탁하고 여인과 장정들을 차에 태워 병원을 향해 달렸다.
그 지역에서 가장 가까웠던 엘와 병원까지는 차로 족히 40분을 가야 했다. 여인이 부디 조금만 더 견뎌주기를 애타게 기도하며 병원에 도착하니 관계자들이 차를 멈춰 세웠다. 나는 급한 환자가 있으니 빨리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가 차 안 여인의 상태를 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고칠 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들은 자신들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면서 그저 병원에서 나가라고 했다. 제발 도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병원을 찾았다. 20분 만에 어렵사리 두 번째 병원을 찾았는데 이 병원 의료진도 '수혈할 피도 없고 치료 방법도 없다'며 여인을 환자로 받지 않았다. 여인이 과다출혈을 한 지 3시간 가까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 갈 병원도 없었다. 나는 의사를 붙잡고 매달렸다.
"나는 한국에서 온 목사요. 환자가 피를 흘린 지 3시간이 넘었소. 이 여인은 당신 나라 사람 아니오? 당신 나라 사람이니 당신들이 책임지고 살려주오!"
간곡히 부탁했지만 의사는 차갑게 손을 내젓고는 병원 응급실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온 사람들은 "우리가 요청해봤자 들어주지 않으니 목사님이 도와 달라"며 날 붙잡고 울며 사정했다. 나 역시 죽어가는 여인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병원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외쳤다.
"이 환자를 치료하지 않으면 정부에 보고하겠소! 만일 이대로 방치해 환자가 죽으면 내일 기자들을 불러 모든 사실을 밝힐 것이오!"
그러자 의사와 간호사들은 겁에 질려 다시 병원 문을 열었다. 의사는 당황한 기색으로 나오더니 "알았으니 조용히 해 달라"며 여인을 환자로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간절함에 응답하셨다. 여인은 치료 받아 두 달 후 무사히 퇴원했다. 여인과 남편은 커다란 자루에 옥수수 호박 바나나 고구마 등을 가득 가져와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목사로서 말씀으로 영혼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리라. 주께서는 할례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노라고 하시며 새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다. 전쟁 빈곤 질병 재난 등 온갖 종류의 고난이 있는 땅, 라이베리아. 인생에서 강도 만난 이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날 머나먼 이 땅에 보내셨다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1) 의료시설 낙후 의약품도 없어… 오직 주님만 의지
맹장염으로 병원 갔지만 수술 거부… 오진·수술후 감염으로 생사 기로에
라이베리아 오지 마을 학교 건립을 위해 다친 손으로 공사를 계속하는 조형섭 선교사.
선교지에 있다 보면 힘든 상황을 자주 접한다. 생활환경 자체도 열악하지만 의료시설이 낙후돼 고통 받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현지인뿐 아니라 나 역시 현대의학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질병으로 생사를 오간 기억이 꽤 있다.
내전 중이던 어느 날 일이다.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는 맹장염 같다며 당장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단순한 배탈일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전 상황에선 어떤 병원에 가도 의료시설이나 의약품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심한 오한에 시달렸다. 온몸에 힘이 없었고 정신이 혼미했다. ‘맹장염인지 아닌지만 확인해보자’는 아내의 설득에 못 이긴 나는 비몽사몽간 현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말라리아 검사만 한 뒤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는 백혈구 수치도 확인해야 한다며 의사를 다그쳤다. 아내의 끈질긴 요청 덕에 검사해 보니 백혈구 수치가 정상이 아니었다. 검사 결과나 증상으로 봤을 때 맹장염이 분명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검진한 의사에게 당장 수술하자고 애걸하니 수술 담당 의사가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백혈구 수치 결과표 한 장 받아들고 다른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결과표만 쓱 보더니 나를 바로 수술실로 옮겼다. 혼미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때 의사가 바로 맹장 수술을 하겠다고 말했다.
피 검사나 엑스선 촬영 등 추가 검사 없이 바로 수술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아내는 두 시간 정도 수술할 거라 예상하고 집에 가서 입원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수술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의사는 황급히 찾아온 아내에게 수술이 완벽하게 잘 됐다며 떼어낸 맹장을 보여줬다.
수술 사흘 후 현지인 의사 지시대로 퇴원했는데 1주일 뒤 문제가 생겼다. 수술 부위에서 고름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복부가 합판처럼 단단해졌다. 아내는 복막염 같다며 병원에서 재수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전 중의 병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병원 말고 집에서 죽겠다며 고집을 부리자 아내는 약국을 전전하며 항생제를 구해왔다. 아내가 밤낮으로 정성껏 치료한 덕에 점차 고름이 줄어 1주일 만에 다 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소독도 하지 않은 수술 도구로, 괴사돼 다 터진 맹장만 꺼냈는데도 살아남은 건 정말 기적이다. 라이베리아에 나를 보낸 하나님께서 남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생명을 허락해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전기와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현지 사정상 우리는 하루에 2∼3시간씩 자가발전기를 가동해 땅 속 물탱크에 저장한 빗물을 사용하곤 했다. 우리는 20년간 사용한 노후 자가발전기가 고장나지 않도록 조심히 썼다. 그러다 사고가 생겼다. 노후 발전기에서 샌 기름을 밟고 미끄러져 왼손 약지를 다친 것이다.
현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일시 귀국해 뼈를 이식했지만 수술 후 건축 공사에 참여하는 등 손을 무리하게 사용해 손가락 속 고정핀이 부러졌다. 최근 한국에서 재수술을 했지만 지금도 왼손 약지에 붕대를 감은 채 살고 있다.
한국이라면 결코 죽지 않을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라이베리아에 제대로 된 병원이 세워져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고난을 덜어주는 날이 하루속히 오길 소망한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2) 아내, 내전 속에서 성경만으로 두 아이 한글 교육
선교지 열악한 환경에 책은 성경뿐… 아이들, 말씀 읽고 쓰며 은혜롭게 커
첫딸 한나가 라이베리아에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모습.
아내는 자신을 늘 ‘과부 후보생’이라고 불렀다. 내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마다 기니에 가족을 두고 식량을 전하러 라이베리아에 수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말라리아나 풍토병의 위험에도 개의치 않고 오지를 돌아다녔고 차가 고장 나 연락이 두절된 채로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언제 사망·사고 소식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아내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면 남편이요, 대문 밖에 나서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딸은 여덟 살 때, 아들은 다섯 살에 라이베리아로 와 현지인과 똑같이 자랐다. 내전 기간 현지인 학교에서는 학생보다 교사들 결석이 더 잦았다. 교사들은 학교에 올 택시비가 없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출근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도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첫딸 한나가 학교에서 노는 게 지겹다며 책을 구해 달라고 했다. 어렵사리 책을 구해오면 금방 읽고 다른 책을 더 달라고 했다. 나중엔 읽을 책이라곤 성경책 밖에 남지 않았다. 한나는 그해 학교에서만 성경을 8번 읽었다.
아들도 성경을 읽으며 자랐다. 아내는 아들이 여섯 살 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집 안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교재는 성경이었다. 아내는 아들에게 “성경책 중 한 권을 택해 다 읽으면 갖고 싶은 것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 하던 아들은 자신이 성경책 중 유일하게 알고 있는 요한복음을 택했다.
요한복음 1장의 다섯 줄을 읽는데 보름이 걸렸다. 6개월 만에 완독한 아들은 한글도 깨치고 자전거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자녀 모두 하나님과 공부한 셈이다.
자녀들이 다니던 현지인 학교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다. 그러나 내전으로 수도관이 파괴돼 물이 공급되지 않자 화장실은 그야말로 오물통이 됐다. 딸은 학교에서 화장실을 안 가려고 하루 종일 굶었다고 했다. 매일 집에 오는 시간까지 소변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기도 했다.
나는 두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선교지에 적응하느라 고생한 자녀들을 잘 챙기지 못해서다. 그러다 최근 한 의대 편입학을 위해 딸이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온 가족이 병에 걸렸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족 모두에게 주사를 놓은 뒤 자신의 팔에 주사하는 걸 보고 처음으로 의사가 돼 어머니께 주사를 놓아 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전 기간에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를 말라리아로 떠나보낸 일, 아버지가 현지인 의사에게 맹장 수술을 잘못 받은 일, 약을 받기 위해 집으로 끝없이 찾아오는 병든 현지인들…. 이런 일을 겪으며 반드시 훌륭한 의사가 돼 아픈 이의 몸과 영혼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소망은 부모님께서 위대한 사명을 위해 젊음을 바치신 곳, 라이베리아에 의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훌륭한 삶은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글을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고난을 배움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을 하나님께 내드리겠다는 딸의 마음이 기특하고 감격스러웠다. ‘선교사의 가족은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말이 있다. 나는 자녀들에게 최고의 것을 해 주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 아이들에게 세상 무엇보다 값진 가치를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3) 세살 때부터 자갈 깨던 아이들 위해 학교 설립
하루종일 노동으로 겨우 1달러 벌어 밀알복지재단과 협력 교육의 기회를
세 살부터 자갈을 깨 생계를 유지하던 라지에(왼쪽)는 2012년 조형섭 선교사의 소개로 밀알복지재단을 만나 망치 대신 연필을 쥐게 됐다. 오른쪽은 교복을 입은 라지에 모습.
“안녕하세요. 밀알복지재단입니다. 선교사님이 사역하는 마을에 열악하게 살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2012년 한국 구호단체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라이베리아에는 도울 아이들이 참 많다’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혹시 내가 발견하지 못한 빈곤 아동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세심히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선교센터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있는 ‘자갈 마을’을 알게 됐다. 라이베리아 도시개발사업으로 고향에서 밀려난 하층민 5000여명이 모여 사는 곳으로 주민들은 바위를 깨 자갈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해결했다. 어른들은 큰 바위를 쪼개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쪼갠 작은 바위를 망치로 깨 자갈로 만들어 건축자재로 팔았다.
자갈 깨는 어린이들은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돌을 깨 1달러를 벌었다. 그나마 자갈을 판 아이들은 한 끼 식사비를 마련한 행운아였다. 자갈을 못 판 아이들은 다시 무거운 자갈을 머리에 이고 빈손으로 집에 갔다. 이곳 어린이들은 세 살부터 망치를 들고 일터에 나섰다. 학교에 가는 건 생각조차 못했다.
이곳을 방문한 나는 우선 주민들에게 쌀부터 전달했다. 쌀을 나눈 후 마을 주민에게 꼭 도와야 할 아이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내게 세 살 때 자갈을 깨다 한쪽 눈에 파편이 튀어 시력을 잃은 소년 ‘주니어 보’를 소개했다.
나는 밀알복지재단에 자갈 마을과 주니어 보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동안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찾아와 라이베리아를 돕겠다고 했지만 그저 말뿐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라이베리아에 온 재단 관계자들에게 만나자마자 “실제로 돕는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들을 도와줄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단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뒤 자갈 마을과 주니어 보를 위한 사업을 전개했다. 재단은 세 살부터 자갈을 깨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 또 주니어 보에게 각막 이식 수술을 지원해 시력을 되찾게 해주었다. 마을 첫 방문 당시 15명의 아이를 후원한 재단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156명을 지원하고 있다.
내가 재단과 협력해 사역을 하게 된 건 청렴, 투명함, 섬김과 희생 등 추구하는 가치가 맞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단은 지속적으로 라이베리아를 돕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 때문에 나는 2013년부터 재단 라이베리아 프로젝트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선교사인 나를 돕지 말고 ‘나와 한 약속’을 지켜 달라는 의미로 재단이 제안한 개인 차원의 후원은 거절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사는 마을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혜택을 받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약속이 계속될 때까지 나는 재단과 계속 협력할 것이다. 어려운 이를 돕겠다는 마음이 지속된다면 라이베리아를, 나아가 아프리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라이베리아 복음 사역 28년, 그간 절망뿐이던 이 땅에도 희망이 싹트고 있다. 10년 후 변화될 라이베리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겁다. 14년간의 내전에 이어 에볼라로 고통받는 땅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주님은 이곳에 보낼 바울 같은 일꾼을 기다리신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역시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선교 사명을 함께할 사랑의 동역자를 기다리고 있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4) 오지 마을 천사들 위해 봉헌한 그레이스 학교
회갑 축의금·적금 깨서 마련한 땅에 장애인 등 1000여명 수용할 학교를
라이베리아 정커팜 지역에 세운 그레이스 학교 전경. 이곳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들이 공부하며 함께 꿈을 키우고 있다.
“오지 마을에서 천사를 만났어요.”
어느 날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내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료소에서 시몬이란 아홉 살 아이를 만났는데 웃는 모습이 천사 같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시몬은 뇌성마비를 앓아 걸을 수도,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시몬의 아버지는 아들의 팔과 다리를 의자에 묶은 채 데리고 다녔다.
두 살 때까지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던 시몬이 한 차례 고열을 앓은 뒤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우리 부부는 ‘천사 시몬’을 만나기 위해 아이가 있는 마을을 자주 방문했다. 시몬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보내 달라고 밀알복지재단에 요청했다. 그러자 재단 관계자는 시몬과 같은 장애 아동이 라이베리아에 많은지 물었다.
라이베리아에는 온갖 고난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 중 하나가 극심한 가난과 내전, 질병으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아픔을 알기에 우리는 평소 슈퍼마켓 앞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을 보살피곤 했다. 나는 배움의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라이베리아 장애인들의 현실을 전했다. 그러자 재단은 현지 조사 후 라이베리아에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와 비장애 아동을 위한 일반학교를 함께 짓자고 제안했다. 장애 아동을 집 밖으로 불러 비장애 아동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4년 전 회갑 기념으로 들어온 축의금과 적금을 해지해 매입한 라이베리아 정커팜 지역의 땅이 떠올랐다. 전기도, 우물도 없는 공터였다. 이 땅을 매입한 후 “하나님의 소유이오니 이 땅에 그림을 그리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재단에서 특수학교와 강당 등 부속 건물을 지어준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응답이었다.
일반학급과 특수학급이 있는 ‘그레이스 학교’는 이렇게 세워졌다. 인근 마을 100여 가구의 아동 10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난해 5월 설립됐다. 나는 한국에서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조달해 일반교실과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된 특수교실, 도서관, 강당, 교사 숙소, 운동장, 우물 등을 짓도록 했다.
나는 주중 매일 여러 지역의 현지인 성도들, 40∼50명의 현지인과 함께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마을 주민들은 누구보다 학교가 들어서기를 갈망해 공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트럭 바퀴가 진흙탕에 빠져도 공사는 계속됐다.
학교 공사는 마을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정커팜 마을에는 100여채의 집 외에는 기본 인프라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학교 공사가 시작되면서 인부들이 마을에 상주하자 간식 및 식수 장수들이 들어와 상권이 형성됐다. 학교 건설로 지역 땅값이 30% 상승하고 거래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마을 주민의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 기여했다. 우리는 여성과 장애인에게 함께 일할 기회를 주고 동등한 처우를 보장해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공사 시작 전 우리는 매일 인부들과 기도를 드렸다. 이들에게 교통비와 숙소를 지원했으며 공사 중 술·담배를 금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공사 기간 현장에서 단 한 건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학교 공사 현장에서 기술을 연마한 인부들이 다른 곳에 좋은 조건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학교 건립으로 마을에 생기가 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5) 에볼라 국가비상사태에도 “현지인과 고통 함께”
선교센터 직원 국외로 출국시킨 후 우리 부부만 남아 학교 건축 마무리
조형섭 선교사는 밀알복지재단 후원으로 라이베리아 27개 마을에 의약품, 쌀, 분유를 지원했다. 지원 물품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학교 공사가 90% 정도 진행됐을 즈음 에볼라 바이러스가 라이베리아를 강타했다. 백신과 치료약이 없는 상태에서 에볼라 희생자들이 늘어나자 라이베리아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난해 7월 인근 국가의 국경이 폐쇄되고 항공사들도 속속 라이베리아 운행을 중단했다. 나는 선교센터와 밀알복지재단 직원을 한국과 케냐로 출국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우리 부부는 라이베리아에 남아 학교 건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내전 당시에도 교회 건축을 했던 내가 에볼라로 학교 건축을 중단한다는 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2개월쯤 지나자 에볼라 환자 발생률이 점차 줄었다. 국외로 피신했던 라이베리아 국민들도 서서히 돌아왔고 라이베리아 정부도 업무 정상 복귀를 공표해 이제 에볼라의 악몽에서 벗어난 듯했다. 우리 역시 에볼라 바이러스가 종식된 줄 알고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다시 에볼라에 대한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속수무책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를 접하니 더 이상 한국에서 편안히 지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먼저 라이베리아에 다시 들어온 선교센터 직원들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금식 기도 후 선교지로 귀임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현지인들이 힘들 때마다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4년간의 내전 속에서도 떠나지 않았던 라이베리아 아니었던가.
라이베리아 사람들이 에볼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단순히 질병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들의 열악한 의료 환경과 영양 결핍이 사태의 본질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현지인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영양제를 제공해 에볼라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만 했다.
하지만 라이베리아로 향하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프리카 직항 노선이 중단돼 독일과 벨기에를 거쳐 가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했다.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를 찾아 라이베리아 입국이 금지됐는지 물으니 직원은 “정부가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말리에 거주하는 교민들에게 철수 공문을 내렸지만 국내 출국에 대한 규제는 따로 없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이 됐는지 “현지에서 에볼라에 감염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라이베리아에 무덤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에볼라에 걸린다면 절대 한국에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소속 선교단체와 여행사도 위험하다며 라이베리아 입국을 말렸지만 내 뜻을 꺾지는 못했다. 이튿날 나는 독일과 벨기에를 거쳐 라이베리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발권 받았다.
지난해 10월 나는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를 가족과 눈물로 이별하고 라이베리아로 떠났다. 독일에서 벨기에로 이동해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에볼라로 라이베리아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비행기 안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알고 보니 이들은 WHO와 국경없는의사회(MSF) 의료진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 확산된 에볼라를 잡기 위해 자원해 죽음의 땅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이들은 ‘에볼라에 감염되면 본국으로 소환하지 않는다’ ‘사망하면 현지에서 장례를 치르되 화장 혹은 매장을 원칙으로 한다’ ‘에볼라가 완전히 퇴치되기까지 의료 활동을 계속한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고 라이베리아에 파견됐다. 이들의 놀라운 인류애와 박애정신에 존경심을 느꼈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6) 태권도협회 300명 ‘에볼라를 차 버리자’ 행사
내전의 땅 덮친 에볼라 치사율 90% 피해 심각 27개 마을에 의약품 지원
라이베리아 태권도협회 회원들이 ‘에볼라를 차 버리자’는 캠페인의 대형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나는 에볼라의 심각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9시부터 아침 6시까지 계엄령으로 거리 통행이 금지됐고 곳곳에 ‘에볼라 캠프’로 명명한 대형 천막이 설치됐다.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경찰과 군인들이 에볼라 환자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길거리마다 경비를 섰다. 마치 전쟁터 같은 모습이었다.
에볼라가 무서운 건 환자의 타액이 피부에 닿으면 3일 만에 발병해 한 주 동안 눈 코 입 등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10일 안에 죽기 때문이다. 현지인들도 에볼라 공포 속에 살기는 마찬가지여서 함부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체는 그대로 방치됐다. 선교센터에 도착해 보니 인근 지역 도로에 한 40대 여인이 숨져 있었다. 또 정커팜 지역을 방문할 때 지나는 팅커타운 도로에도 에볼라로 숨진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평화로웠던 시골마을 꼬토타운도 에볼라가 집단 발병해 수십명이 한 번에 희생됐다. 많은 이들이 집을 떠났으며 마을에 남은 몇몇 사람들은 가족을 잃고 에볼라로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어느 마을을 가도 에볼라로 가족을 잃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왔다는 소식을 들은 태권도협회 임원과 유단자들이 도착한 다음날 선교센터로 모였다. 이들은 “에볼라보다 더 시급하고 무서운 건 에볼라로 인한 불안과 공포심”이라며 “모든 사람이 위축돼 식량조차 구하러 다니지 못하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일에 적극 나서자”고 제안했다. 에볼라 예방 및 퇴치 운동을 함께 펼치자고 건의하러 온 것이다. 당시 라이베리아 정부는 에볼라 전염을 염려해 모든 행사와 모임을 중단시켰지만 정부 요직에 근무하는 태권도협회 중진들이 나서 정부 허가를 받았다. 에볼라 발병 6개월 만에 최초로 정부의 허가를 얻어 치른 대형 행사였다.
태권도협회가 연 행사는 ‘에볼라를 차 버리자(Kicks Ebola out of Liberia)’는 캠페인이다. 제자 300여명은 도복 대신 에볼라 퇴치 구호가 적힌 옷과 모자를 입고 악대와 함께 수도 중심가를 행진했다. 또 시민들에게 태권도 시범을 보이며 에볼라를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를 북돋우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없앤다고 에볼라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의료 지원이 있어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겨낼 수 없다. 찰스 매클래인 라이베리아 농수산부 장관은 “라이베리아인의 에볼라 치사율은 90%이고 외국인은 40%인데 그 이유는 14년간의 내전으로 인한 영양 결핍과 기초 체력 약화 때문”이라며 내게 쌀 고기 등 식량 지원을 부탁했다.
에볼라의 폐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에볼라로 인한 두려움은 당장 생계를 위한 일자리마저 찾아 나서지 못하게 했다. 물가가 급등해 식량과 생필품 가격이 치솟아 가난한 이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나는 밀알복지재단이 지원한 재난긴급구호기금으로 3개월에 걸쳐 에볼라로 큰 피해를 입은 27개 마을에 의약품, 이동식 손세척기, 쌀, 분유 등을 지원했다. 에볼라 발병으로 외국인들이 철수해 일자리를 잃고 식량과 생필품을 구할 수 없던 주민들은 구호물품과 식량을 받자 춤을 추며 감사를 표했다.
식량과 의약품을 배포하는 동안 기적적으로 에볼라가 진정 국면으로 돌아섰다. 에볼라는 라이베리아에 고아 2000여명을 남겼다. 아직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아 있으니 그 사명을 끝까지 마무리하고 오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조형섭 (17·끝) 14년 내전·에볼라 위에 나를 세우신 하나님!
28년 선교지에서 겪은 주님의 계획 고난 강해질수록 순종하는 법 배워
안식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조형섭 선교사가 지난달 12일 서울의 한 교회에서 아내 오봉명 선교사와 라이베리아 전통의상을 입고 함께 포즈를 취했다.
현재 한국인 선교사 2만7000여명이 타국에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며 순교자의 삶을 산다.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깊은 존경심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유교 가문 출신인 나를 제자로 불러주셨다. 주님은 욕심을 내려놓고 헌신할수록 더 많이 채워주셨다. 그렇기에 28년간 선교지에서 겪은 최악의 상황들은 우리에게 예비한 축복의 통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선교가 힘든 건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 예수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베리아 사역 3년 만에 발발한 내전은 ‘사방으로 욱여쌈’(고후 4:8)을 당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바라볼 곳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었다.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던 그 시간이 도리어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는 법을 다시금 배우는 시간이 됐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 순교한 세례요한처럼 나 또한 에볼라가 창궐하는 라이베리아에서 죽을 각오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사명을 더 감당하라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만왕의 왕, 승리의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12)라고 약속한 말씀을 믿고 최후 승리의 그날까지 주님만을 의지하며 맡기신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신앙 성장을 돕는 교회뿐 아니라 현지인의 자립을 돕는 종합병원, 기술학교, 태권도장을 세울 것이다. 또 밀알복지재단 그레이스학교에서 장애·비장애 아동 통합교육으로 이 땅의 어린이들이 장애의 유무를 떠나 나라의 주역으로 자랄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신 인생을,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겸손히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데 쓰려고 한다. 이러한 삶을 위해 나는 날마다 그분께 무릎을 꿇을 것이다.
나 선교사 조형섭은 이 ‘역경의 열매’ 연재기사의 주체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빚은 질그릇이자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작은 씨앗일 뿐이다.
벳세다 들판에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길 정도로 풍족한 식량을 배고픈 군중에게 주셨다. 나 역시 라이베리아에서 현지인 영혼 구원 사역과 더불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오병이어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선교사인 내가 해왔고 앞으로 할 일은 세례요한의 마음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며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신에 찬 담대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선교와 복음 전파는 언약의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을 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예수 오실 날을 소망하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려 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나는 이것이 진정한 ‘역경의 열매’라 확신한다.
남편이자 부모로서 많이 부족했음에도 나와 함께 선교 사역을 감당한 가족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하나님은 부족한 나를 위해 아내인 오봉명 선교사를 동역자로 주셨다. 아내는 내 부족한 점을 묵묵히 감싸주고 돕는 배필의 역할을 훌륭히 감당했다. 두 자녀 또한 사역에만 몰두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족한 아빠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줬으며 선교 사역을 지지해줬다. 마지막으로 오랜 세월 동안 라이베리아 선교에 동참해 주시고 후원해 주신 한국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