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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으로 발길을 옮기며, 제[第] 일 [一]
평안도[平安道] 영원군[寧遠郡]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歷史]에 있어서,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우리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과 천하[天下]의 종주[宗主]로서 천자국[天子국]의 위상[位相]을 유감없이 발휘한 천년[千年]의 대제국[大帝國]이었다.
평양[平壤]은 고조선[古朝鮮]의 도읍지[都邑地]였으며, 은[殷]나라 기자[箕子]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이며, 고구려[高句麗]가 도읍[都邑]을 정한 곳이다. 또한, 고려[高麗]의 서경[西京]이었으며, 조선[朝鮮]의 서도[西都]였고, 조선[朝鮮]의 평양부[平壤府]로서 서북[西北]의 변방[邊方]이며, 서북[西北]의 거진[巨鎭]이었다.
평안도[平安道]의 영원군[寧遠郡]은, 평양[平壤]의 묘향산[妙香山]을 내리 누르고, 요동[遼東]의 요수[遼水]가 발원[發源]하는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명[郡名]도 요원[遼原]이라고 하였다. 평양[平壤]도 요동[遼東]과 인접하고 있었고, 영원진[寧遠鎭]도 요수[遼水]의 근원[根源]이 되는, 요수[遼水]의 상류[上流]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요동[遼東]에 대한 이설[異說]이 분분 하듯이, 고구려[高句麗] 평양[平壤]의 위치[位置]에 대한 여러 주장[主張]들은,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을 찾는데 있어서 많은 혼란[混亂]을 초래하고 있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을 바탕으로 그 기록[記錄]들이 가리키는 지역과, 그 기록[記錄]들이 가리키는 지역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역사서[歷史書]의 내용과 현지[現地]에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역사[歷史]에 관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지명[地名], 산천[山川]의 형승[形勝], 자연환경[自然環境], 그리고 그 지역에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역사[歷史]에 대한 유래[由來]등이, 과연 사서[史書]의 기록[記錄]들과 얼마나 부합[符合]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평양[平壤]과 요동[遼東]을 찾아 이를 논증[論證]하여 보기로 한다.
요동[遼東]과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이 어느 곳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는가를 논증[論症]하는 것은, 장문[長文]의 글이 필요하므로 고구려[高句麗]의 주 무대인 평안도[平安道]의 여러 지역들을 먼저 살펴보고, 평양[平壤]을 논증[論證]하는 순서로 하여, 여러편의 글을 통하여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와 평양[平壤]이 어느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는가를 알아 보기로 한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평안도[平安道] 영원진[寧遠鎭]
靖宗七年, 命崔冲, 築城.
정종[靖宗] 7년[七年]에 최충[崔冲]을 시켜 성[城]을 쌓게 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평안도[平安道]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희천군[熙川郡)
熙川郡 知郡事, 兼江界道左翼兵馬。 本高麗靑塞鎭, 後改威州, 又改熙州, 爲价州兼官。 本朝太祖五年丙子, 析爲知郡事。 太宗癸巳, 例改今名。[중략]
희천군[熙川郡], 지군사[知郡事] 강계도[江界道] 좌익 병마[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高麗]의 청새진[靑塞鎭]인데, 뒤에 위주[威州]로 고쳤고, 또 희주[熙州]로 고쳐서 개주[价州]의 겸관[兼官]을 삼았다. 본조 태조[太祖] 5년[五年] 병자[丙子]에 갈라서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가, 태종[太宗] 계사년[癸巳年]에 예[例]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중략]
妙香山。在郡南四十里。四境, 東距咸吉道 馬踰峴一百五十里, 西距理山五十七里, 南距寧邊三十里, 北距江界九十八里。[중략]
묘향산[妙香山], 군[郡]의 남[南]쪽 40리에 있다. 사방 경계[境界]는, 동[東]쪽으로 함길도[咸吉道] 마유현[馬踰縣]에 이르기 1백 50리, 서[西]쪽으로 이산[理山]에 이르기 57리, 남[南]쪽으로 영변[寧邊]에 이르기 30리, 북[北]쪽으로 강계[江界]에 이르기 98리이다. [중략]
溫泉二 皆在郡東, 一洪原里, 一古寧遠 仇老坡。遞馬所一, 長洞津里 狄踰合排 [중략]
온천[溫泉]이 2이며, 모두 군[郡] 동[東]쪽에 있는데, 하나는 홍원리[洪原里]이요, 하나는 옛 영원[寧遠]의 구로파[仇老坡]이다. 체마소[遞馬所]가 1이니, 장동진리[長洞津里]의 적유합배[狄踰合排]이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의 기록[記錄]은 간략하다. 평안도[平安道] 영원진[寧遠鎭]에, 靖宗七年, 命崔冲, 築城 정종[靖宗] 7년[七年]에 최충[崔冲]을 시켜 성[城]을 쌓게 하였다. 라는 기록[記錄]이 유일하다. 영원진[寧遠鎭]은 평양[平壤]과 인접한 중요[重要]한 지역[地域]이다. 이러한 지역에 성곽[城郭]을 축조[築造]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단 한 줄만 기록[記錄]이 되어 있다는 것은, 의문[疑問]이 아닐 수 없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서 영원진[寧遠鎭]은, 평안도[平安道]의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희천군[熙川郡]과 인접한 지역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리고 妙香山。在郡南四十里, 묘향산[妙香山]은, 군[郡]의 남[南]쪽 40리에 있다. 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묘향산[妙香山]은 평양[平壤]과 인접한 지역에 있는 천하[天下]의 명산[名山]이다. 당시[當時]에 조정[朝廷]의 명[命]을 받아 평양[平壤]에 부임하여 평양[平壤]을 다스리고, 평양[平壤]을 오고 갔던 많은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들을 보면, 묘향산[妙香山]은 험하고 높은 산이며, 평양[平壤]과 인접하고 있는 명산[名山]으로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또한, 산이 높아 한여름에도 한기[寒氣]가 도는 서늘한 산으로 시편[詩篇]을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 산천[山川]편을 보면, 백산[白山]은, 군[郡]의 북[北]쪽 1백 8리에 있다. 산 동[東]쪽에는 두첩굴[頭疊窟]이 있으며, 산허리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흰돌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구인성령[蚯蚓城嶺]은, 군[郡]의 서[西]쪽 74리, 이산군[理山郡]과의 경계[境界]에 있으며, 호현[狐峴]은 군[郡]의 서[西]쪽 45리, 영변부[寧邊府]와의 경계[境界]에 있으며, 평전령[平田嶺]은 군[郡]의 동남[東南]쪽 93리, 영원군[寧遠郡]의 경계[境界]에 있다. 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원림현[元林峴]은, 군[郡]의 남[南]쪽 22리, 영변부[寧邊府]의 경계[境界]에 있고, 묘향산[妙香山]은 군[郡]의 남[南]쪽 59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영변부[寧邊府]에 보라. 고 말하고 있다. 평양[平壤]과 희천군[熙川郡], 영변부[寧邊府], 영원군[寧遠郡] 묘향산[妙香山], 백산[白山]은, 모두 서로 인접[隣接]한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이는 대신[大臣]들이 남긴 문집[文集]들의 기록[記錄]들 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향산[香山]은 평양[平壤]과 요동[遼東]을 경계[境界]로 하는 산[山]이라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향산[香山]과 묘향산[妙香山]은 산[山]에 향나무가 많아서 산명[山名]이 묘향산[妙香山]과 향산[香山]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朝鮮]의 후기[後期]까지도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향산[香山]과 묘향산[妙香山]을 오고가며 겪은 생생한 현지[現地]의 체험[體驗]담을, 문집[文集]을 통하여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
산천[山川]
백산[白山], 군[郡]의 북[北]쪽 1백 8리에 있다. 산 동[東]쪽에는 두첩굴[頭疊窟]이 있으며, 산허리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흰돌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적유령[狄踰嶺], 군[郡]의 북[北]쪽 1백 50리에 있다. 강계부[江界府]와의 경계[境界]에 있으며, 백산[白山]의 동[東]쪽 등성이다. [중략]
구인성령[蚯蚓城嶺], 군[郡]의 서[西]쪽 74리, 이산군[理山郡]과의 경계[境界]에 있다. 호현[狐峴] 군[郡]의 서[西]쪽 45리, 영변부[寧邊府]와의 경계[境界]에 있다. 평전령[平田嶺]은 군[郡]의 동남[東南]쪽 93리, 영원군[寧遠郡]의 경계[境界]에 있다. [중략]
원림현[元林峴], 군[郡]의 남[南]쪽 22리, 영변부[寧邊府]의 경계[境界]에 있다. 남산[南山]은 군[郡]의 남[南]쪽 1리에 있다. 묘향산[妙香山]은 군[郡]의 남[南]쪽 59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영변부[寧邊府]에 보라.
입암[立巖] 장동[長洞]의 동북[東北]쪽 10리에 있다. 조그만 봉우리가 외로이 솟아 있는 모양이 송곳을 세워 놓은 듯하며, 물가에서의 높이가 세 길이 넘는다. 서천[西川] 군[郡]에서 4리 떨어진 곳에 있다. 백산[白山]에서 나와 영변부[寧邊府]의 어천[魚川]으로 들어간다. [중략]
제영[題詠],
坐對香山一望中 앉아서 향산(香山)을 한 눈 안에 마주한다. 박은[朴訔]의 시[詩]에,....... 작은 누각[樓閣] 동녘에서 여울 소리는 흐느끼는데, 앉아서 향산[香山]을 한 눈 안에 마주한다. [중략]
고구려[高句麗]는 조선사[朝鮮史]에 위대[偉大]한 족적[足跡]을 남긴 왕조[王朝]였다.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가 700년[七百年]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의 비극이다.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인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아가다 보면, 혼란[混亂]스럽고 모순[矛盾]된 기록[記錄]들이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矛盾]되고 혼란[混亂]스러운 기록[記錄]들은, 중요[重要]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고증[考證]하고 나면 스스로 확연[確然]히 풀린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동명왕[東明王]은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대로 기원전[紀元前] 100년[百年] 전후[前後]의 사람이 아니다. 부여[夫餘]의 금와왕[金蛙王]도 또한 이와 같다.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 혼동[混同]되는 기록[記錄]들이 전하고 있으나, 이는 후대[後代]의 잘못된 의문[疑問]의 기록[記錄]일 뿐이다.
동명성제[東明聖帝]와 부여[夫餘]의 금와왕[金蛙王]에 대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조선사[朝鮮史]의 대신[大臣]들이 남긴 문집[文集]의 기록[記錄]대로, 은[殷]나라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그 역사[歷史]를 같이 하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원[始原]은, 은[殷]나라 말기와 주[周]나라의 시원[始原]과 그 역사[歷史]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分明]한 기록[記錄]을 통하여 확인[確認]되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가 무너진 극명[克明]한 예[例]를 보여주는 기록[記錄]이 있다. 을불[乙弗]은, 고구려[高句麗]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중심[中心]이 어느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는가를 대륙사[大陸史]에서 보여주는 기록[記錄]이다.
통전[通典] 변방전[邊防典]
통전권제일백구십[通 典 卷 第 一 百 九 十]
서융이[西 戎 二]
토곡혼[吐 谷 渾], 을불적[乙 弗 敵], 탕창[宕 昌], 등지[鄧 至], 당항[党 項] 백란[白 蘭], 토번[吐蕃], 대양동[大 羊 同], 실위[悉 立], 장구발[章 求 拔], 니파라[泥 婆 羅]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고구려[高句麗]의 미천왕[美川王] 을불[乙弗]이 어떻게 을불적[乙弗敵]이 될수 있겠는가 ? 이와 더불어 더욱 괴이[怪異]한 것은, 을불[乙弗]을 서융[西戎]편에 기록[記錄]하고 있다는 사실[史實]이다. 통전[通典] 변방전[邊防典]의 서융[西戎]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나라들은, 지금의 역사[歷史] 해설에 따르더라도, 천산[天山]과 히말리아를 기준으로, 남북[南北]과 동서[東西]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에서는 서역[西域]을 경영할 때, 서융교위[西戎校尉]의 직책을 주었다. 서역[西域]은 천산[天山]의 동[東]쪽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산[天山]과 히말리아 산맥[山脈]의 서[西]쪽 지역과, 넓게는 서북[西北]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인도의 북부[北部] 지역에 고구려[高句麗]의 유적[遺跡]이 지금도 전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그 곳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鮮卑]와 흉노[匈奴]를 복속하고 숙신[肅愼]을 내지[內地]에 두고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으로부터, 천산[天山]을 넘어 서역[西域]인 서토[西土]를 귀복[歸復]시킨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천자지국[天子之國]의 나라이며 천하[天下]의 대제국[大帝國]이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현지[現地]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로 들어나고 있는 이러한 고구려[高句麗] 천년[千年]의 역사[歷史]가, 어찌 반도[半島]와 동북삼성[東北三省]에 머물렀겠는가 ?
현재[現在]의 한자사전[漢子辭典]에서도, 선비[鮮卑]에 대하여, 고대[古代]에 북[北]아시아에 살던 몽고[蒙古]의 퉁구스계에 속[屬]하는 유목[遊牧] 민족[民族]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동북삼성[東北三省]과 북경[北京]의 북[北]쪽이, 북[北]아시아 지역이란 말인가 ? 일부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사람들조차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강역[疆域]을 만리장성[萬里長城]안으로 국한 시키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몽고[蒙古]의 퉁구스계에 속[屬]하는 유목[遊牧] 민족[民族]은, 오늘날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서[西]쪽으로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광대[廣大]한 지역에 걸쳐 활동하던 민족[民族]의 총칭[總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平安道] 영원군[寧遠郡]
동[東]쪽은 함경도[咸鏡道]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1백 60리, 남[南]쪽은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1백 2리, 서[西]쪽은 덕천군[德川郡] 경계까지 1백 6리, 북[北]쪽은 희천군[熙川郡] 경계까지 4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8리이다. [중략]
건치연혁[乾置沿革]
본래는 고려[高麗] 영원진[寧遠鎭]이다. 태조[太祖] 5년에 영청현[永淸縣]에 속했고, 정종[靖宗] 7년에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성[城]을 쌓게 했다. 후[後]에 영청현[永淸縣]해변으로 옮겼다가 후[後]에 희천[熙川]으로 옮겨 속하게 했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5년[五年]에 또다시 영청[永淸]에 합하여 영녕[永寧]이라 일컬었고 세조[世祖] 12년에 고영원[古寧遠] 땅에 나아가 따로 군[郡]을 두고 그대로 진[鎭]으로 삼았다. [중략]
관원[官員] 군수[郡守], 훈도[訓導] 각 1인.
군명[郡名], 요원[遼原].
산천[山川]
쾌산[快山]은 군[郡]의 서[西]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은 군[郡] 남[南]쪽 1백 리에 있다.
지막지산[池莫只山]은 군[郡] 북[北]쪽 60리에 있다. 낭림산[狼林山]은 군[郡] 동[東]쪽 1백 80리에 있다. 북[北]쪽은 강계부[江界府] 경계[境界]에 있으며, 동[東]쪽은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경계[境界]에 있다.
광성산[廣城山]은 군[郡] 북[北]쪽 30리에 있다. 산중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석굴[石窟] 안에는 좌우[左右] 양쪽에 작은 못이 있다. 또 두 개의 석룡[石龍]이 있는데 꿈틀꿈틀하고 위로 오르는 형상이 같으므로 이름하여 석룡굴[石龍窟]이라 한다.
간삼현[干三峴]은 군[郡] 동[東]쪽 1백 리에 있다. 군[郡] 남[南]쪽으로부터 이 현[縣]에 이르기까지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들어서고 돌길이 마치 실 같아서 사람과 말이 나란히 가기 어렵고, 시내가 있는데 지막지산[池莫只山]에서 나와 고개 한쪽을 안고 남으로 흘러 덕천군[德川郡] 삼탄[三灘]으로 들어간다.
검산현[劍山峴] 군[郡] 동[東]쪽 91리에 있다. 함경도[咸鏡道] 정평부[定平府] 경계[境界]에 있다. 마유령[馬踰嶺] 군[郡] 남[南]쪽 60리에 있다. 함경도[咸鏡道] 영흥부[永興府] 경계[境界]에 있다. 광성천[廣城川] 군[郡] 동[東]쪽 3리에 있다. 근원[根源]은 지막지산[池莫只山]에서 나와 남[南]으로 흘러 흑연강[黑淵江]으로 들어간다.
흑연강[黑淵江] 군[郡] 남[南]쪽 30리에 있다. 그 근원[根源]은 두 개인데 하나는 낭림산[狼林山]에서 나오고, 또 다른 하나는 지막지산[池莫只山]에서 나와 합하여 남[南]으로 흘러 덕천군[德川郡] 삼탄[三灘]으로 들어간다. 하늘이 가물 때 비 오기를 빌면 반응이 있다 한다. 온정[溫井]은 군[郡]의 동[東]쪽 30리 구로파리[仇老波里]에 있다. [중략]
인물[人物]
본조[本朝] 오사충[吳思忠]
그 선조[先祖]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으로 후[後]에 영원진[寧遠鎭]으로 옮겨와 고려 [高麗]말에 급제하여 점차 올라 대간[臺諫]이 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 사의대부[司議大夫]로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는데, 탄핵[彈劾]을 그치지 않으므로 언관[言官]의 직을 뺏겼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봉함을 받았다. [중략]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子北夫餘天帝之子, 그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울 때, 추모왕[鄒牟王]은 북부여[北夫餘]의 천제지자[天帝之子]였다. 로 시작되는 고구려[高句麗]의 그 중심[中心] 지역은, 요동[遼東]과 훗날,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였다. 영원군[寧遠郡]은 고려[高麗]때는 영원진[寧遠鎭]이었으며, 조선[朝鮮]에서는 평안도[平安道]의 영원군[寧遠郡]이었고, 군명[郡名]은 요원[遼原]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원군[寧遠郡]인 요원[遼遠]은 어느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을까 ?
출처 구글어스
위에 표시한 지역[地域]은 현지[現地]에서 말하는 영원성[寧遠城] 섬서대사[陝西大寺] 가 있는 지역이다.
출처 구글어스
지금 카자흐스탄과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는 천산[天山] 평원[平原]에 자리 잡고 있는, 이리합살극자치주[伊犁哈薩克族自治州]에는, 영원성섬서대사[寧遠城·陜西大寺]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영원성섬서대사[寧遠城·陜西大寺]가 있는 곳이 영원군[寧遠郡]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곳에 있는 고대[古代]의 유적[遺跡]들은 예외 없이 섬서[陜西]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오늘날 중국의 섬서성[陜西省]은 본래의 섬서성[陜西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와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 나타나는 기록[記錄]들을 보고, 현지[現地] 사람들의 역사[歷史]에 대한 증언[證言]과, 이곳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자연환경[自然環境], 산천[山川]의 지형[地形] 지세[地勢]등, 역사[歷史]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곳의 인근[隣近]에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 영원군[寧遠郡]이 있었음은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과, 향산[香山]을 사이에 두고 인접하고 있는 요동[遼東]을 찾는 것은, 평안도[平安道]의 평양[平壤]을 확실[確實]히 찾아 이를 고증[考證]하고나면, 요동[遼東]은 스스로 분명[分明]하게 들어날 것이다. 오래전에 이곳을 현지[現地] 조사할 때,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백산[白山]에 관한 것이다. 평안도[平安道]의 영원군[寧遠郡]과 인접하고 있는 희천군[熙川郡]의 백산[白山]은, 산 동[東]쪽에 두첩굴[頭疊窟]이 있으며, 산허리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흰돌이므로 백산[白山]이라고 이름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지역에는 이와 똑같은 산이 웅장[雄壯]하게 솟아, 오늘날도 변함없이 그 흰 빛을 발하며, 천산[天山]의 수만 봉[峯]들을 비추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는, 사서[史書]의 소략[疏略]한 기록[記錄]과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 기록[記錄]된 내용과 부합[符合]되는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은, 천산[天山]에 활 걸고 사해[四海]에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 하는 것을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사막[沙漠]을 노래하였으며, 끝 간데 없이 황막[荒漠]한 오랑캐의 땅으로 진격[進擊]해 들어가는 것을 노래하며, 평양[平壤]은 이민족[異民族]들과 국경[國境]을 접하고 있는, 서북[西北]의 변방[邊方]이라는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계곡선생집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송천장좌체찰막부부서새[送天章佐體察幕府赴西塞]
오랑캐 땅 가득 덮은 서[西]쪽의 살기 西來殺氣暗胡天
대장이 창 비껴 들고 변방[邊方] 안찰[按察]하러 가도다 大將橫戈去按邊
범로[范老]의 본래 흉중[胸中]속 갑병[甲兵] 가득하고 范老本饒胸裡甲
자형 또한 막부[幕府]의 뛰어난 인재로다 子荊仍是幕中賢
요동[遼東] 땅 새벽 달빛 홍기[紅旗] 휘날리고 紅旗曉拂遼山月
압록강[鴨綠江] 운무 속에 옥장[玉帳] 임하리 玉帳晴臨鴨水煙
왕사[王師]는 예로부터 신중을 기하나니 自古王師貴持重
재자[才子]의 연연[燕然]을 어찌 번거롭게 하랴 不煩才子勒燕然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송이어사여성교열북변[送李御史汝省校閱北邊]
대궐에서 왕명[王命]을 받들어 모시다가 丹墀奉綸綍
북[北]쪽 변방[邊方] 대비 태세 점검하러 나가는 몸 紫塞按儲胥
언젠가는 씻어야 할 나라의 치욕[恥辱] 國恥終須洒
국경[國境]의 계책을 소홀히 해선 안 되리라 邊籌未可踈
군진[軍陣]의 병사들 학처럼 나눠 벌여 서고 陣應分鶴列
각자 무장[武裝]한 늠름한 모습 人各擁犀渠
천하[天下] 무적[無敵] 우리 육진[六鎭]의 군사 六鎭兵無敵
흉노[匈奴]가 날고뛴들 어떻게 하겠는가 ? 匈奴技不如
기재[奇才]의 손 안에 들어온 이상 奇才入彀率
승리[勝利]는 우리의 것 오랑캐를 압도하리라 勝氣壓穹廬
눈에 들어오나니 변방[邊方]의 구름이요 望極關雲逈
봄에도 녹지 않는 준령[峻嶺]의 흰눈 희게 빛나노니 春深嶺雪餘
한 계절 다 보내는 긴 여정[旅程]의 길 客程淹節序
중대한 왕사[王事]의 일 어찌 감히 머뭇거리랴 王事敢虛徐 [중략]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는, 함경도[咸鏡道]의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는,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과, 압록강[鴨綠江]과 연해 있는 요동[遼東], 그리고 향산[香山]을 지경[地境]으로 하는 평양[平壤]과 요동[遼東]을 아우르는 조선사[朝鮮史] 강역의 서북[西北]에 천산[天山]을 품고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따라서,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사실[史實]을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하기 위해서는,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되고 역사서[歷史書]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일치되는, 현지[現地]의 여러 가지 확고[確固]한 증거[證據]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
동명제[東明帝]는 천제[天帝]의 후손[後孫]으로
능히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고
왕씨[王氏]는 서경[西京]에 도읍[都邑]하여
성첩[城堞]이 중천[中天]을 가로지른다.
북관[北關]에서 바라보노니
음산[陰山]과 한해[瀚海]는 아스라이 연해 있구나
평양[平壤]은 천애[天涯]의 하늘 끝에 있나니
천년[千年]의 백산[白山] 서경[西京]의 백아강[百牙岡]이 되었구나.
오늘도 변함없는 향산[香山]의 향나무
조선[朝鮮]의 서도[西都] 말없이 지켜보나니
천산[天山]에 활걸고 태평[太平]을 노래 하리라.
요동[遼東]은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유허지[遺墟址]
기자[箕子]의 유훈[遺訓]은 태고[太古]의 천산[天山]에 묻히고
성제[聖帝]의 후예[後裔] 아득히 지난 옛일 잊지 않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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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제 조선사의 진실이 하나 하나 벗겨지는 듯 합니다. 조선사가 전개된 땅은 "대륙"이라는 주장은 이미 설이 아닌 실체적 주장으로 커가고 있습니다. 많은 기록과 유물유적, 고증작업등으로 조선사의 영역을 대륙으로 확정하는데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하나 하나 검증함과 동시에 많은 주장들을 취합하여 하나로 하는데 역량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미심쩍은 부분을 계속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밝혀진 부분들은 취합해 조선사 영역과 지명에 대한 정리를 해봤으면 합니다. 이제 무엇인가 그림이 그려질 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환국고려님의 진심어린 글을 대할 때마다 고개숙여집니다.
여러 회원님들의 좋은 글을 대할 때마다, 행복합니다. 서서히 열매를 맺을 때가 되어가는 것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고구려! 대제국을 건설한 조선의 적장자입니다. 무려 일천년을 영위하며, 천하를 호령했다고 봅니다. 고구려에 대한 많은 것들은 우리 카페에도 많은 원전을 바탕으로 해설되어 있는데, 환국고려님게서 직접 답사까지 하시고, 그곳 주민들의 증언까지 증거로 하셨다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감사드리며, 쪽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여기도 예전 문무님 글처럼 문장뒷부분이 잘리네요... 125%로 해도 안되는데..해결책이 없을까요..
135% 로 해보시죠. 지금 나의 노트북은 135%로 맞춰놓았는데 정상적으로 보이고 있거든요.
한희수님! 우리 카페를 오래 동안 애정을 갖고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문 무 90%로 하니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읍니다.
조경일록의 기록에
<백두산은 사류하(沙流河)의 바로 북쪽에 있으니 돌산이 눈과 같이 희므로 백두라고 한다. 이 산의 한 가닥이 남쪽으로 뻗어 공동(空同)의 경충산이 되고 다시 한 가닥이 서쪽으로 뻗어 반산(盤山)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옥천산(玉泉山)이 되어 북경의 서쪽을 빙 둘러싸고 있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의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시원과 관계되는 백두산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돌산이 눈과같이 희므로 백두라 한다’ 란 대목입니다. 많이 나온 이야기라 식상할 법도 하지만 백두산의 백(白)의 정체( 흰 것의 정체)는 무척 중요합니다.
위의 글 중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
산천[山川]편을 보면, 백산[白山]은, 군[郡]의 북[北]쪽 1백 8리에 있다. 산 동[東]쪽에는 두첩굴[頭疊窟]이 있으며, 산허리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흰돌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란 대목이 조경일록에서 백두산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여 평안도 희천군의 백산이 혹 백두산을 의미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 소재집(篠齋集) - 서기수(徐淇修)에
<멀리 서북간을 바라보니 산 하나가 반쯤 보이는데 웅장하고 울퉁불퉁하였고 산 정상의 모양이 희어서 마치 첫눈이 내린 것 같았다.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묻지 않아도 백두산(白頭山)임에 틀림 없었다. ~~~
못의 바닥은 흰 모래와 조약돌인데
물이 심히 맑아서 사람의 수염과 머리털을 비춰볼 수가 있었다.>
라 되어있는데 희천군의 백산과 관계없는 산 일까요...?
또하나 궁금한것은 ‘평안도[平安道] 영원군[寧遠郡]’에 관한것입니다. 이 영원군 역시 대륙조선의 어느곳일진데 연행록의 여정중에도 영원성(寧遠城 ; 원숭환과 청과의 전쟁)이 있는데 서로 별개의 지명인지가 궁금합니다.
<해운 국사(海雲國師)의 이름은 인간(印簡)인데, 산서(山西) 영원(寧遠)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죽국은 지금의 요서(遼西) 영원주(寧遠州)이다>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은 본디 한나라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통할하는 현은 2개이다. 귀덕현(貴德縣)은 본디 한나라 양평현으로, 발해에서 숭산현이라고 하였다
<요사지리지. (한나라 양평성은 고구려의 요동성이며 요주에 있다)>
이런 말들이 있어서 대륙조선 평안도의 영원과 이른바 중국사에서의 영원과 서로 다른 별개의 지명인지 궁금합니다.
문무 선생님 감사 합니다. 한희수 선생님 감사 합니다. 문무 선생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조선사의 본 모습인 큰 틀은 완성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겠지요. 이는 여러 제현 선생님들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한희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글의 부분이 잘리는 현상은, 해상도와 컴퓨터의 시스템 때문일 것입니다. 우선 해상도를 조절해 보시고, 그래도 개선이 안되면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 보시는 것이 도움이 될것입니다.
문무 선생님의 댁내에, 항상 건강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한희수 선생님의 댁내에 항상 건강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맑은 영혼님 감사 합니다. 평안도 희천군의 백산과, 조경일록, 유 백두산기의 기록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백두산과 희천군의 백산은, 상거가 이천리에 이르는 지역 입니다. 조경일록과 백두산기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백두산과 그 주변 지역을 설명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백두산 주변 지역은, 조경일록과 백두산기에서 설명하는 자연환경이 당시와 다르지 않고 변함이 없습니다.
평안도의 영원군[寧遠郡]과 연행록에서 말하는 영원성[寧遠城]은, 이름은 같지만 다른 지역 입니다. 조선사를 혼란 스럽게하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바로 이러한 기록들을, 조선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교묘히 이를 조선사에 지명을 옮겨심고 지도를 그려 조선사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삼가 살펴 보건데, 고죽국은 지금의 요서 영원주이다.
해운국사의 이름은 인간인데, 산서 영원사람이다. 의 기록에서, 요서가 산서라는 기록은 맞는 기록 입니다. 청나라 당시에도, 산동과 산서의 기록이 있으며, 산동은 천리 요동을 포함하고 산동 포정사라는 관작까지 있었음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서는 요서를 말하고 있으며, 요동의 서쪽이 요서이니, 요서가 산서라는 기록은 맞는 기록이며, 이는 문집과 대륙사의 기록으로 확고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다만 조선사 역사의 진실을 찾으며, 이 요동과 산동이 어디인가는, 곧 명확히 들어날 것입니다. 본래의 산동과 산서는, 지금의 카자흐스탄 어느 지역의 남북을 기준으로 하여, 산동과 산서라고 하였음은 분명한 사실 입니다. 맑은 영혼님의 댁내에 항상 만복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여기서 문제점... 백제는 바다를 건너 요서를 갔습니다.. 카자흐가 되면 서해바다가 없습니다. 설마 발하슈를 서해로 보는지요
김규형 선생님 감사 합니다. 말씀하신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서를 갔다는 것은, 대륙사와 조선사의 기록에 나와 있듯이, 백제는 큰 나라였으며, 백제의 시조는, 고구려와 같은 계보에서 나왔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에 그 시원을 두고 있으며, 백제 또한 같습니다. 백제왕이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는 것을 추인해 주었다는 남사의 기록은, 백제가 요서에 진평 이군을 두었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의 위상과 크기를 볼수 있는 기록 입니다. 다만 기록에 나오는 서하가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서하는 지금의 중국 은천 지역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 입니다.
후대에, 서하가 대하로 국명을 바꾸었다면, 서하는 천산의 서쪽 지역에 있었던 나라 입니다 .바다를 건너 갔다는 기록은 맞는 기록 입니다. 김규형 선생님의 댁내에, 항상 건강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문헌의 <미수기언>편에보면 진왕 정이 6국을 병합할때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을 설명하면서 요동군과 현토군을 말하고 있고 또 "연경"을 설명하면서 기자조선의 도읍지 평양을 말하고 있는데 과연 연경과 평양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걸까요? 환국고려님의 말씀대로 고구려의 연대는 우리가 알고있는것과는 더 오래된것으로 미수기언의 기록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데요, 만약 "평양"이 그곳에 있었다면 오랑캐의 살기어린곳을 지킬려면 수 많은 군사가 있어야 될터인데 과연 그 많은 병사들을 어떻게 징집했을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