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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제1. 때가 되어 진리(眞理)의 자리(慈梨)를 만듬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舍衛國 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比丘 千二百五十人)과 함께 계시었다. 그 때 세존(世尊)께서 공양(供養)하실 때라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발우(鉢釪)를 들으시고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시어 걸식(乞食)하실 때 드 성중(城中)에서 일곱 집을 차례로 걸식(乞食)하여 본(本) 곳으로 돌아 오시어 공양(供養)을 마치시고 가사(袈裟)와 발우(鉢釪)를 걷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多淫) 자리(慈梨)를 펴시고 앉으셨다.
제2. 수보리(須菩提)가 진리(眞理)를 청(聽)함 그때 장로 수보리(長老 須菩提)가 대중(大衆)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慈梨)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벗어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끊으며 합장(合掌)하고 공경(恭敬)히 부처님께 여쭈었다.
“희유(希有)하십니따.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께서는 모든 보살(菩薩)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菩薩)들에게 잘 당부(當付)하십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降伏) 받으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須菩提)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如來)는 모든 보살(菩薩)들을 잘 보살피고 모든 보살(菩薩)들에게 잘 당부(當付)하느니라. 너희는 지금 자세(仔細)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를 위해 말하리라.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降伏)받아야 하느니라.”
“예 세존(世尊)이시여. 바라옵건데 듣고자 하나이다.”
제3. 대승(大乘)의 바른 뜻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降伏)받을지니라.” “있는 바 중생(衆生)의 종류(種類)인 난생(卵生).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非有想).비무상(非無想)을 내가 다 무여열발(無餘涅槃)에 들도록 제도(制度)하리라 하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衆生)을 제도(制度)하지만 실(悉)로는 열반(涅槃)을 얻는 중생(衆生)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須菩提)야. 만약(萬若) 보살(菩薩)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菩薩)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제4. 머무른 곳 없는 묘(妙)한 행(行) “ 또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진리(眞理)에 마땅히 머문 바 없이 보시(布施)할지니 이른바 형상(形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 하며 소리. 냄새. 맛. 촉감(觸感)과 진리(眞理)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여 어떤 모습(模襲)에도 머물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만약(萬若) 보살(菩薩)이 모습(模襲)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하면 그 복덕(福德)은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동(東)쪽 허공(虛空)을 가이(可以) 생각(生角)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 남서북방(南西北方)과 네 간방(間方)과 아래 위 허공(虛空)을 가이(可以) 생각(生角)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보살(菩薩)이 모습(模襲)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한 복덕(福德)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이(可以) 생각(生角)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제5. 실(悉)다운 도리(道理)를 바로 봄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몸의 모습(模襲)으로써 여래(如來)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몸의 모습(模襲)으로써 여래(如來)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신 몸의 모습(模襲)은 곧 법신(法身)의 모습(模襲)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시되. “무릇 있는 바 모습(模襲)은 다 허망(虛妄)하니 만약(萬若) 모든 모습(模襲)이 모습(模襲) 아님을 보면 곧 여래(如來)을 보리라”.
제6. 바른 믿음은 희유(希有)하다.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世尊)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衆生)이 이와 같은 말씀과 글귀를 얻어듣고 실(悉)다운 믿음을 내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여래(如來)가 열반(涅槃)한 뒤 이천오백 년(二千五百年)뒤에도 계(戒)를 받아 지니고 복(福)을 닦는 자(者)가 있어 이와 같은 말과 글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어 이로써 실(悉)다움을 삼으리니.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善根)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는 한 번 생각(生角)하고 깨끗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는 이 모든 중생(衆生)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福德)을 얻는 것을 다 알고 다 보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衆生)은 다시(多時)는 내가 있다는 생각(生角). 수명(壽命)이 있다는 생각(生角)이 없으며. 진리(眞理)의 모습(模襲)이 있다는 생각(生角) 없고. 또한 진리(眞理)의 모습(模襲)아님이 있다는 생각(生角)도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衆生)이 만약(萬若) 마음에 어떤 모습(模襲)을 취하면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함이며 만약(萬若) 진리(眞理)의 모습(模襲)을 취(取)하더라도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함이며. 만약(萬若) 진리(眞理)의 모습(模襲) 아님이 있다는 생각(生角)을 취(取)하여도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함이 되기 때문이니라. 이런 연고(緣故)로 마땅히 진리(眞理)를 취(取)하지도 말고. 마땅히 진리(眞理) 아님도 취(取)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如來)가 항상(恒常) 말히긴 “너희들 비구(比丘)는 내가 말한 진리(眞理)가 비유(譬喩)하면 뗏목과 같은 줄을 알라.” “하노니 진리(眞理)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진리(眞理) 아님을 취(取)하리요.”
제7. 얻을 것도 말할 것도 없음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여래(如來)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었으며 여래(如來)가 말한 바 진리(眞理)가 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되.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뜻을 이해(理解)하기로는 결정(決定)된 진리(眞理)가 없음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셨으며. 또한 고정(固定)된 진리(眞理)가 없음을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신 진리(眞理)는 모두 다 취(取)할 수 없으며 말로 표현(表現) 안되며 진리(眞理)라고 해도 안되고 진리(眞理) 아니라고 해도 안됩니다. 어찌하여 이러한가 하면. 모든 성현(聖賢)이 다 함이 없는 진리(眞理)로써 차별(差別)하시기 때문입니다.”
제8. 제불(諸佛)이 진리(眞理)를 의지(意志)하여 깨달음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만약(萬若)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가득한 칠보(七寶)로써 보시(布施)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福德)이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福德)은 곧 복덕(福德)이 스스로 존재(存在)하지 아니함일세 이런 연고(緣故)로 여래(如來)께서 복덕(福德)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萬若) 또 어떤 사람이 이 경(經) 가운데 있는 네 개의 게송(偈頌) 등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한다면 그 복(福)이 저 앞의 복(福)보다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須菩提)야. 일체(一切)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다 이 경(經)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이른바 부처님의 진리(眞理)라 하는 것은 곧 부처님이 소유(所有)한 진리(眞理)가 아니니라.”
제9. 한 모습(模襲)도 모습(模襲) 없다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수다원(須陀洹)이 생각(生角)하기를 “나는 능히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아니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須陀洹)은 그 이름이 성인(聖人)의 흐름에 들었다는 말이오나 들어간 바 없으며 빛과 소리. 향기(香氣)와 맛. 촉감(觸感)과 진리(眞理)에 빠져들지 않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須陀洹)이라 하나이다.”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須陀含)이 생각(生角)하기를 ‘나는 능히 사다함과(須陀含果)를 얻었다’하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아니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須陀含)은 이름이 한 번 가고 온다는 말이오나 사실(事實)은 가고 옴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須陀含)이라 하나이다.” “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아니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아라함(阿那含)이라 하나이다.”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아라한(阿那漢)이 생각(生角)하기를 ‘나는 능히 아라한(阿那漢)의 도(道)를 얻었다.’하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아니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실(悉)로 진리(眞理)가 없음을 아라한(阿那漢)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만약(萬若) 아라한(阿那漢)이 생각(生角)하기를 ‘내가 아라한(阿那漢)의 도(道)를 얻었다.’하면 이는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한 것입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다툼 없는 삼매(三昧)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第一)이라 하시니. 이는 욕심(慾心)을 떠난 제일(第一)의 아라한(阿那漢)이라고 하심이나 저는 욕심(慾心)을 떠난 아라한(阿那漢)이라고 생각(生角)하지 않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제가 만약(萬若) 이렇게 생각(生角)하되. ‘ 나는 아라한(阿那漢)의 도(道)를 얻었다.’하면 세존(世尊)께서는 곧 ‘ 수보리(須菩提)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자(者).’ 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을 것이오나. 수보리(須菩提)가 실(悉)로 아란나행(阿蘭那行)을 한다고 생각(生角)이 없으므로 ‘ 수보리(須菩提)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자(者).’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제10. 정토(淨土)를 장엄(莊嚴)함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여래(如來)가 옛적에 연등(燃燈)부처님 회상(回想)에서 진리(眞理)를 얻은 바가 있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께서는 연등(燃燈)부처님 회상(回想)에서 실(悉)로 진리(眞理)를 얻은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보살(菩薩)이 불국토(佛國土)를 장엄(莊嚴)하느냐?”
“아닙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佛國土)를 장엄(莊嚴)한다는 것은 곧 장엄(莊嚴)함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장엄(莊嚴)일 뿐입니다.” “이런 연고(緣故)로 수보리(須菩提)야. 모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形相)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와 향기(香氣)와 맛과 촉감(觸感)과 진리(眞理)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비유(譬喩)하건대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매우 큽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11. 함(含)없는 복(福)은 가장 높고 훌륭함 “ 수보리(須菩提)야. 항하(恒河) 가운데 있는 모래 수(數)만큼의 항하(恒河)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이 모든 항하(恒河)의 모래가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다만 저 항하(恒河)의 모래 수(數)만 하여도 오히려 한없이 많을 것이온데 하물며 그 모래 수(數)만큼의 항하(恒河)이겠습니까?” “ 수보리(須菩提)야 내가 이제 진실(眞實)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萬若)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칠보(七寶)로써 저 항하(恒河)의 모래 수(數)와 같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가득 채워서 보시(布施)한다면 얻을 복(福이 많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이르시기를. “만약(萬若)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이 경(經) 가운데에서 네 개의 글귀로 된 게송(偈頌) 등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면 이 복덕(福德)은 앞에서 칠보(七寶)로 보시(布施)한 복덕(福德)보다도 더 높고 훌륭하니라.”
제12. 바른 가르침을 존중(尊重)함 “그리고 또 수보리(須菩提)야 어디서나 이 경(經)에세 네 개의 글귀로 된 게송(偈頌) 등의 말씀을 따른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 세간(一切世間)의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등이 다 마땅히 공양(供養)하기를 부처님의 탑묘(塔廟)와 같이 할 것이거는 어찌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다 받아 지녀 읽고 외우는 것이겠는가. 수보리(須菩提)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第一) 희유(希有)한 진리(眞理)를 성취(成就)하리라. 만약(萬若) 이 경전(經典)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과 존중(尊重)할 제자(弟子)가 계신 곳과 같느니라.”
제13. 진리(眞理)를 그대로 받아 지님 그 때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말씀 드리기를.
“세존(世尊)이시여. 이 경(經)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이르시기를. “이 경(經)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蜜)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이 마땅히 받들어 지닐 지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須菩提)야.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여래(如來)가 말한 바 진리(眞理)가 있는 것이냐?”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있는 먼지가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須菩提)가 말씀 드리기를.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 모든 먼지를 여래(如來)가 말하되 먼지가 이님일새 그 이름이 먼지이며.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신 세계(世界)도 세계(世界)가 아님일새 그 이름이 세계(世界)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어떻게 생각(生角)하느냐.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써 여래(如來)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는 여래(如來)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三十二相)은 곧 모두가 고정(固定)된 모습(模襲)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삼십이상(三十二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須菩提)야. 만약(萬若) 어떤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항하(恒河)의 모래수(數)와 같이 많은 목숨을 바쳐 널리 보시(布施)하더라도 만약(萬若) 또 어떤 사람이 이 경(經) 가운데서 네 개의 글귀로 된 게송(偈頌) 등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한다면 그 복(福)이 저 복(福)보다 매우 많으니라.”
제14. 모습(模襲)을 떠나서 적멸(寂滅)함 이때에 수보리(須菩提)가 이 경(經) 말씀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알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 드리되.
“희유(希有)하십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經典)을 말씀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지혜(智慧)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經)은 얻어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만약(萬若) 어떤 사람이 이 경(經)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곧 실(悉)다운 모습(模襲)을 낼 것이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第一 希有)한 공덕(功德)을 성취(成就)한 사람임을 알겠나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이 실(悉)다운 모습(模襲)이란 것도 곧 모습(模襲)이 아님이니. 이런 연고(緣故)로 여래(如來)께서 이름이 실(悉)다운 모습(模襲)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經典)을 얻어듣고 믿어 알고 받아 지니기는 어렵지 않으오나. 만약(萬若) 오는 세상(世上) 이천오백년 후(二千五百年 後)에 그 어떤 중생(衆生)이 있어서 이 경(經)을 얻어 듣고서 믿고 이해(理解)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第一希有)함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습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나라고 한 모습(模襲)이 곧 모습(模襲) 아님이요. 사람의 모습(模襲). 중생(衆生)의 모습(模襲). 오래 산다는 모습(模襲)도 곧 모습(模襲)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一切)의 모든 모습(模襲)을 여의신 분들을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이르시기를. “그러하고 그러하니라. 만약(萬若) 어떤 사람이 이 경(經)을 얻어듣고 놀라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希有)한 사람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가 말한 제일 바라밀(第一 波羅蜜)이 곧 제일 바라밀(第一 波羅蜜)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제일 바라밀(第一 波羅蜜)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도 여래(如來)가 말하되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須菩提)야. 내가 옛적 가리왕(歌利王)에게 몸을 낱낱이 베일 때에 나는 그 때에 아상(我相)이 없었고 인상(人相)이 없었고 중생상(衆生相)이 없었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난 날 마디마디 사지(四肢)를 베일 때에 만약(萬若)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었으면 마땅히 성냄과 원망(怨望)함을 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또 과거(過去)에 오백생(五百生)을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던 일을 생각(生角)하니 그 때의 세상(世上)에서도 아상(我相)이 없었으며 인상(人相)이 없었으며 중생상(衆生相)이 없었으며 수자상(壽者相)이 없었느니라. 이런 연고(緣故)로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마땅히 모든 모습(模襲)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形相)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와 향기(香氣). 맛과 감촉(感觸). 진리(眞理)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 만약(萬若) 마음에 머뭄이 있으면. 곧 잘못된 머뭄이 되느니라. 이런 연고(緣故)로 부처님이 말하기를. ‘보살(菩薩)은 마땅히 마음을 형상(形相)에 머물지 말고 보시(布施)하라.’하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이익(利益)되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布施)할 것이니. 여래(如來)가 말한 일체(一切)의 모든 모습(模襲)은 곧 모습(模襲)이 아니며. 또한 온갖 중생(衆生)이라 말함도 곧 중생(衆生)이 아니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者)며. 실(悉)다운 말을 하는 자(者)며. 있는 그대로 말을 하는 자(者)며. 넘친 말을 하지 않는 자(者)며. 틀린 말을 하지 않는 자(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가 얻은 바 진리(眞理)인 이 진리(眞理)에는 실(悉)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만약(萬若) 보살(菩薩)이 마음을 진리(眞理)에 머물러서 보시(布施)하면 마치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萬若)보살(菩薩)이 마음을 진리(眞理)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하면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밝은 햇빛 아래에서 가지가지의 사물(私物)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오는 세상(世上)에 만약(萬若)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있어서 능히 이 경(經)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곧 여래(如來)가 부처의 지혜(智慧)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시나니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은 공덕(功德)을 성취(成就)하리라”.
제15. 경(經)을 지니는 공덕(功德) “수보리(須菩提)야. 만약(萬若)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아침에 항하(恒河)의 모래수(數)와 같은 몸으로 보시(布施)하고. 한낮에도 항하(恒河)의 모래수(數)와 같은 몸으로 보시(布施)하고. 저녁에도 또한 항하(恒河)의 모래수(數)와 같은 몸으로 보시(布施)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겁 동안(百千萬億劫 同案)을 보시(布施)하더라도 만약(萬若)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經典)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어기지 아니하면 이 복(福 )이 저 몸을 보시(布施)한 복(福)보다 높고 훌륭하나니. 어찌 하물며 경(經)을 받아 지녀 읽고 쓰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解說)해 줌이겠는가. 수보리(須菩提)야. 요약(要約)해서 말하건데 이 경(經)은 가이(可以) 생각(生角)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끝없는 공덕(功德)이 있느니라. 여래(如來)는 대승(大乘)의 마음을 낸 자(者)를 위해 이 경(經)을 말하느니라.” “만약(萬若)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經)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말한다면 여래(如來)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끝이 없고 생각(生角)할 수 없는 공덕(功德)을 다 성취(成就)하여서. 이와 같은 사람은 곧 여래(如來)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짊어짐이 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須菩提)야. 만약(萬若)작은 진리(眞理)를 좋아하는 자(者)는 내가 있다는 소견(所見). 사람이 있다는 소견(所見). 중생(衆生)이 있다는 소견(所見). 오래 삶이 있다는 소견(所見)에 집착(執着)하게 되므로 곧 이 경(經)을 능히 받아듣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에게 해설(解說)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어느 곳이든지 만약(萬若) 이 경(經)이 있는 곳이면 모든 세간(世間)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阿修羅)가 마땅히 공양(供養)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부처님의 탑(塔)이 됨이라 모두가 마땅히 공경(恭敬)히 예배(禮拜)하고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香)을 그 곳에 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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