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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내란범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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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사람이 타블로 사건에 댓글을 달고 각자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타블로를 분석하고 의혹을 제기하였고, 그 모두가 작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누가 빨리 타블로의 거짓말을 밝히는지 경주하는 사람들처럼 타블로의 모든 것이 파헤쳐졌다. 사람들이 구축해 놓은 나름의 논리적 틀에서는 어떤 정상인이 들어가도 다 의혹투성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영문과 학생이 왜 컴퓨터관련 과목을 수강했느냐는 것에서부터 졸업식 사진이 없다는 것들이 의혹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이런 그릇된 믿음의 기저에는 타블로 자체가 가지는 특징이 존재한다. 타블로는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스키마(mental picture, 연상 이미지)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타블로의 직업인 힙합가수는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직업인 판검사, 교수, 의사와는 거리가 멀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타블로의 모습도 전형적으로 똑똑한 수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타블로의 스탠퍼드대 졸업과정까지도 상식적인 추측을 넘어서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 4년 만에 졸업하는 학부를 3년 반 만에 졸업하였고, 거기다 석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이렇게 빨리 학위를 마치는 경우는 이공계 학생들에게 많은데 타블로의 경우는 전공이 English였다. 타블로는 상식적 범주를 벗어난 아웃라이어인 것이다.
타블로를 범재가 아닌 남다른 재능을 가진 비상한 사람이라고 가정하면 그동안의 타블로의 궤적은 수긍할 만하다. 여느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타블로는 퇴학당할 뻔하다가 복학해서 스탠퍼드라는 명문대에 입학, 3년 반 만에 석사까지 어렵지 않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힙합가수로 데뷔하여 많은 히트곡을 낸다. 그의 말투는 어눌하고 쇼프로에서 나와서 얘기하는 그의 무용담은 생경하지만 비상하고 장난기 많은 천재의 행동으로 치부하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타블로를 천재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다. 특히 비슷한 또래의, 열심히 노력은 하였으나 일류대학에는 갈 수 없었던 사람에게 타블로의 학력은 차라리 거짓이 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타블로의 학력에 의혹을 제기한 사람 중에는 미국에서 유학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미국 대학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알고 본인들도 공부하였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누구는 미국의 이름 모를 대학에서 3년 반을 훌쩍 넘어서 죽어라 공부해도 학위 하나 따지 못하고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데, 하찮게 보이는 힙합가수가 스탠퍼드에서의 일들을 너무도 태연하고도 수월하게 얘기하니 믿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타블로의 학력이 차라리 거짓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등식이 성립될 것인데 표면적으로 보기에 타블로는 외계인 같은 존재이고, 타블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를 모차르트의 재능에 괴로워하는 살리에리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 살리에리처럼 타블로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 모습은 너무도 평범하고 초라해진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을 강조한다. 모두가 똑같아야 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누구의 표현에 의하면 ‘배를 곯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민족’이라고 한다. 단일성의 문화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살아남기 힘들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타블로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집단주의 시각에서 타블로는 상당히 특이했고, 모난 돌이기에 정을 맞았다.
우리는 겸손을 무수히 강조하면서 살고 있다. 이것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소위 잘나가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처세술일 수 있다. 서로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재능을 발휘하고 뛰어난 것을 집단이 사랑스런 시선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든지, 아니면 저 사람이 나처럼 되든지’라는 생각이 우리 관념 속에 박혀 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모두 여러분 덕분에 이룬 것이고’ ‘다만 운이 좋아서’ ‘보잘것없는 저를’ 등등은 모두 겸손의 행위에서 나오는 특징적인 말들이다. 이 말들의 공통분모는 내 존재가 여러분에 비해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강조의 표현이다.사람들은 내심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의 그 말 한마디에 위로받고 경계를 푼다.
타블로는 오만하지도, 겸손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솔직한 모차르트처럼 행동했다. 남들이 동경해서 들어가고 싶은 대학을 쉽게 들어가고, 쉽게 졸업한 양 TV에 비쳤다. 만일 타블로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피땀 흘리는 노력을 했고,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밤을 새우면서 열심히 해서 졸업했고, 그러기까지 주위사람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는 등등의, 우리가 흔히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보는 얘기를 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의혹을 제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타블로는 공부만 하기도 빠듯한 학창시절에 영어학원 선생도 하고 영화도 찍었다는 얘기를 태연하게 했다. 타블로는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지 않고 사실을 솔직히 말할 때 공중이 가지는 적개심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본다. 타블로라는 평범하지 않은 젊은이의 솔직함은 ‘모난 돌’에 대한 집단적 적개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집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타블로는 특이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겸손함을 갖추지 않은 존재였다.
더구나 타블로가 자신의 학력을 검증하는 방편의 하나로 제시한 캐나다 시민권은 집단의 적개심에 나름 합리적인 명분까지 덧붙여 주었다. 또래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 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은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하고 또 취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하고 군대까지 가야 하는 힘든 현실을 견디고 있는데 이 타블로라는 이방인은 너무 쉽게 미국 유수의 명문대에서 믿기 어려운 짧은 기간에 석사까지 취득하고, 그 졸업장이 아무것도 아닌 양 학력이 별 필요치 않은 힙합가수로 성공하고 있고, 거기다 알고 보니 캐나다 시민권까지 가져서 한국의 젊은 남자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까지도 지지 않고, 캐나다가 아닌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돈도 잘 벌고 아름다운 여배우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또래집단의 입장에서 타블로는 무척 얄미운 존재이고, 이대로 있기에는 무언가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집단주의에는 왕따 문화가 있다. 우리와 같지 않은 특이하고 다른 누군가를 배척하고 박해한다. 그 독특한 사람이 집단의 리더가 아닌 이상은 그런 사람의 등장은 집단에는 비용이 되기 때문이다. 다수가 소수의 개성을 존중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는 다수가 소수를 배척함으로써 집단의 효율성은 증대된다. 만인 모두가 각자의 개성대로 행동해 버리면 집단의 규율과 통일성, 효율성이 무너지기 때문에 예외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오랜 농경사회에서 흘러내려온 품앗이의 집단주의 문화는 평등성과 획일성과 순응을 추구한다. 개인은 집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양이 풍족한지 아닌지가 고민해야 할 의사결정이지, 개개인이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를 알아서 배려해주지 않는다. 일사불란함과 만장일치를 미덕으로 알고, 집단의 응집성과 동질성을 해치는 독특하고 다른 존재의 등장을 경계한다.
반면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창의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 개인은 저마다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드러내려 하고, 각자는 그런 개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기다려 준다. 집단으로 무엇을 해본 경험이 적기에 집단주의에서 보는 일사불란한 행동이나 누구를 왕따시키는 행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주의 문화가 지배하고 유교적인 겸양의 예절을 숭상하는 우리나라에서 타블로처럼 우리와 같지 않은 독특한 존재에 대한 반응은 그를 배척하거나 아니면 우리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타블로 학력의혹 사건은 2가지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학력을 위조한 거짓말쟁이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존재로 타블로를 만들었다. 왓비라는 사람은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집단의 심리에 본인 나름의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의혹제기로 불을 붙인 것이다. 이것이 휘발성과 전염성이 강한 사이버상에서 집단주의와 결합하여 급속히 확산된 것이다. 타블로의 학력을 믿고 싶지 않은 다수의 집단에 왓비는 과학적이고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지각의 작용기제에 사이버상의 집단대중은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을 이미 경험한 대중은 타블로에게도 똑같은 시선을 보냈고, 소수의 적극적인 카페 회원들은 타블로의 학력을 거짓으로 밝힘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한다는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타블로가 제시한 증거들은 네티즌의 집요한 추적과 나름의 논리로 인해 오히려 타블로를 더욱 궁지로 몰게 만드는 것들이 많았고, 그런 경우가 생길 때마다 카페 회원들은 마치 정의가 승리한 듯한 기쁨을 느끼고 서로를 격려하는 글들을 사이버상에 올렸다. 집단사고(group think)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다. 온갖 댓글과 게시물은 마치 타블로의 학력이 가짜라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만들었고, 이들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타블로를 옹호하는 글을 올리는 사람은 집단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고 입을 닫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비주얼 데이터(visual data)에 약하다. ‘MBC 스페셜’에 방영된 타블로의 괴로워하는 모습과 성적표를 떼는 생생한 화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타블로의 학력이 진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의 반응은 급속히 바뀌었다. 반대로 ‘PD수첩’에서 보여준 주저앉은 소의 모습은 거대한 군중의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외국의 인류학자가 한국 사회를 보고 school of fish 같다는 말을 했다. 바닷속 고기떼처럼 몰려다니며 순간순간 방향을 바꾸는 역동성을 보고 그렇게 얘기한 것 같다. 단일문화의 집단주의 사회에서 언론과 인터넷은 그 방향을 바꿔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언론의 한마디로 인해 잘나가던 닭집들이 전부 문을 닫기도 하고, 북한산 둘레길 기사 하나에 북한산 근처가 쑥대밭이 되기도 한다. 타블로를 만든 것도 언론이고, 타블로를 살린 것도 언론이다. 타블로는 이런 일들을 미리 알고 가사를 그렇게 적은 걸까?
“상처…, 흉터…, 눈물이 흐르고…(you are the one)…,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내게 손을 건네준 그대….”
첫댓글 한국은 역시 안맞아
잘난사람 짓밟는다고 자기가 잘나지는것도 아닌데 존나 추해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