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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양희은
청개구리에서 뛰어 우물 밖 세상속으로
♡♣ 아침 이슬 - 양희은 ♣♡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 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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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의상이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71년 여름, 대중들 앞에 나타난 양희은의 첫 모습은 선머슴애처럼 청바지,
청난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멜로디에 詩적인 노랫말은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거침없이 불러대는 그녀의 노래에는 신선한 향기가 진동했다.
힘차고 우아하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맛깔난 노랫가락은 김민기의 곡들에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기존의 낡은 사랑타령가요들을 여지없이
파괴하는 위력으로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또한 보수적 사회분위기를 벗어나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대변되는
70년대 청년문화 탄생에 불을 지피며 그 중심에 선 대표 노래꾼으로
자리매김 했다.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양희은. 30년의 세월은 야속하게 당시의 흔적을 거의
지워버렸지만 당당하게 내뿜는 그녀의 노래만큼은 세월을 잊은 듯
여전히 짙푸른 빛깔을 내뿜고 있다.
서북청년사건 때 진남포에서 단신남하, 육사4기 포병장교를 거쳐
미국유학까지 간 엘리트였던 부친 양정길과 서울토박이로 명동의
유명 부띠끄 <주크양장점>의 고용디자이너였던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 어머니 윤순모의 장녀로 태어난 양희은.
고모부는 대한 제분사장이었으니 풍족한 집안의 쾌활한 개구장이 딸이었다.
아버지는 돌 전에 말문을 트고 앙증맞게 노래를 잘 부르는
어린 딸에게 노래를 시켰다.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지금도 웃을 때 입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재동초등학교 3학년 때는 YMCA어린이합창단원으로 활약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와 교가 선창, 졸업식 송사 등을
도맡아 했을 만큼 비범한 아이였다.
경기여고시절에는 노래말고도 신문반원, 각종 영어웅변대회 1등 입상 등으로
이미 학내외에서 만능재주꾼이란 명성을 얻었다.
간경화증으로 부친이 일찍 타계한 후 기울어지기 시작한 가세는
어머니의 잘못된 빚보증까지 겹쳐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양희은은 “30년 전에 이미 전문직업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자가 일을 갖는 것이 별스럽지 않았다”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자신을
소녀가장으로 표현한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못마땅했다고 말한다.
본격적인 노래인생은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고 재수를 하던 늦여름쯤
우연히 이루어졌다.
명문대를 다니는 친구들이 의기소침해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양희은을
대학생들의 명소로 자리잡은 명동의 청개구리로 이끌었다.
이때 객석에 있는 다른 경기여고출신 여대생이 양희은을 발견,
사회를 보던 이백천에게 ‘경기여고에서 노래를 제일 잘하던 양희은이 와 있다’며
노래를 청하는 쪽지를 전달했다.
느닷없이 호명된 그녀는 서유석의 기타반주에 맞쳐 ‘웬즈데이 차일드’와
‘에스터데이’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이때 양희은의 노래를 우연히 들은 기독교방송 PD가 “평론가 최경식이
진행하는 <영840> 프로에 소개를 하겠다”고 집요하게
집으로 연락을 해 와 첫 방송을 탔다.
내친김에 YMCA 주최 1회 포크페스티벌에 아마추어 가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몇차례 ‘청개구리’에 나가 도비두의 김민기, 김도향, 송창식, 윤형주와
친분을 쌓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혼란스럽던 심신을 추스르고
대학입시공부에만 전념하던중 화재를 당하는 액운이 겹쳐
자포자기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늘 그녀를 아끼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강대 사학과에 응시, 합격했다.
71년2월, 친구들의 고마움에 답례를 하기위해 재동초등학교 동문
김민기를 찾아가 기타반주를 부탁, 청개구리에서 친구들만을 위한
‘노래하는 새’라는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다.
데뷔곡 아침이슬은 여전히 애창되는 불멸의 국민가요.
처음 양희은은 청개구리에서 김민기가 악보를 끄적이며 연습삼아 부르는
‘아침이슬’을 듣고 한순간에 반해 버렸다.
김민기의 대학친구가 전해준 찢어진 악보를 테이프로 붙여 간직했을만큼
넋이 나갔던 첫 노래였다.
데뷔음반 취입때 용기를 내 ‘불러보고 싶다’고 부탁하자
김민기는 흔쾌히 곡을 주었다.
71년 9월, 양희은은 대표곡 아침이슬 등 4곡의 창작곡과 일곱송이 수선화 등
6곡의 번안곡이 수록된 데뷔앨범 <아침이슬-유니버샬, KLS-23> 발표와
더불어 YMCA강당에서 Y틴들을 대상으로 <포크콘서트 희은이와 함께>를
개최하며 본격적으로 대중앞에 섰다.
동아방송라디오를 통해 공개방송으로 진행된 이 공연의 사회는 DJ 임문일이 서유석, 김민기, 뜨와 에 무와 등은 우정출연을 해주었다.
연이어 발표한 컴필레이션 음반 <71년폭송히트모음1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유니버샬,KLS27,71년9월>과
2집 <서울로 가는길-유니버샬, KLS40, 72년12월>도
뜨거운 팬들의 사랑속에 양희은의 줏가를 상향조정했다.
그러나 건전가요로도 선정되었던 아침이슬 등 히트곡들이 군사정권에 의해
일순간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가혹한 음악적 시련이 다가왔다.
'금지'를 먹고 산 불멸의 노래 30년
데뷔 때부터 주무대였던 명동 오비스케빈 등에서 당시 기자초봉의 세배가
넘는 4만원의 월 개런티를 받았던 양희은.
1972년 10월엔 TBC 라디오 <팝송다이얼> DJ로 영역을 넓혔다.
대학생, 가수, 방송 DJ등 1인3역 이상의 활동으로 눈코 뜰새 없던 와중에
터진 73년초 서유석과의 결혼설. 불발탄이었지만
당시 양희은과 서유석의 인기만큼이나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73년 정부에 의해 건전가요로 선정되었던 <아침이슬> 이 금지곡 목록에
오르면서 시작된 양희은의 음악적 시련.
1, 2집의 ‘그날’, ‘엄마! 엄마!’, ‘서울로 가는길’, ‘작은연못’, ‘백구’등도
74년어느 날부터 방송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발표한 200여곡 중 금지곡만도 무려 30여곡.
그러나 독재정권이 통제를 가할수록 금지된 노래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더욱 해방감을 안겨주며 불멸의 생명력을 키워갔다.
오랜 기간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곡들이었지만 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소외된 노동현장에서, 국민들의 각종모임에서 더욱더 질기고
강한 생명력으로 시퍼렇게 불리어졌다.
아직도 양희은을 저항의식이 강한 ‘운동권 가수’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때문.
정작 양희은 자신은 ‘결코 운동권이 아니었고 암울한 시절의 시대상황이
내가 부른 노래까지 어둡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우스꽝스런 해프닝의 연속이지요. ‘퇴폐가사’, ‘시의 부적합’,
‘허무주의 조장’이란 명분인데도 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양희은의 회고처럼 당시 수많은 금지곡들은 아전인수식 판정으로 양산되었다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은 왜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꼬투리였고,
<작은 연못>은 정권을 비꼰다는 이유에서,
<아침이슬>은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측의 인사를
암시한다는 억지 해석이 내려졌다.
퇴역을 앞둔 늙은 선임상사가 군 복무 중이던 김민기에게
막걸리 두 말을 내고 자신의 30년 군인인생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노병의 애환과 설움을 담은 이 노래는 <양희은-서라벌,SLK1041,78년> 음반이
발표되기 전인 76년 겨울에 이미 만들어져 병영에서 병영으로 구전되어진
졸병들의 애창곡이었다.
그러나 ‘병영에서 괴상한 노래가 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국방부 장관이
‘군기해이’,‘사기저하’를 이유로 전군에 노래 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문공부 장관에 연락해 사상최초의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곡은 80년 이후 집회현장에서 <군인>을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 등으로 바뀌어 불리어지면서 대표적인 운동가요로 탈바꿈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 삭제여부는 음반사의 상업논리까지 개입되며 동일음반에
무려 6가지 이상의 변형버전을 양산되는 초유의 결과까지 빚어냈다.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히자 늘 도청과 감시가 뒤따랐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던 중 정보부요원들에게 끌려가 빵집에서 추궁을 당하기도 하고,
77년 기독교 방송 ‘우리들’진행도중 사장으로부터 ‘네 잘못이 아니지만
당분간 쉬라’는 말을 들었을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고 양희은은 회고한다.
그 후 방송출연교섭은 고사하고 78년 어렵게 출연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른 것을 끝으로 83년까지 노래판을 떠나야만 했다.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봉제 수출업체인 아비스상사에서의
직장생활. 암수술과 교통사고로 인한 투병생활 등 고난도 많았다.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외국으로 훌쩍 배낭여행도 떠나 보았지만 늘 노래에
대한 갈증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그의 목을 타게 만들었다.
83년 자신이 작시한 ‘하얀 목련’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애절하게 드러냈던 재기곡.
KBS라디오 ‘양희은과 함께‘의 DJ로 복귀한 뒤 84년에야
그녀의 모든 금지곡은 해금 되었다.
87년 재미사업가 조중문씨와 결혼,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93년 귀국 때까지
가끔 고국을 드나들며 서정적 멜로디의 맑은 노래들을 발표하며
노래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양희은은 김민기로부터 방의경, 신중현, 서유석, 김광희, 이주원, 김정호,
하덕규, 이병우 등 끊임없이 새로운 작곡가와 음악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앞으로 부를 새로운 곡’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로
과거의 히트곡보다 새로운 곡에 강한 집념을 보인다.
어쩌면 데뷔곡 <아침이슬>을 능가하는 노래를 부르고픈
음악적 부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데뷔 30년을 맞아서도 매일 4시간 이상 노래연습을 하고 끊임없이
대중들과 새로운 음악적 호흡을 갈망하는 양희은.
1만 번도 넘게 불렀다는 <아침이슬>에게 국민들은
<가장 즐겨듣는 대중가요1위> 라는 사랑으로 화답했다.
그녀의 음반 중 마니아들 사이에 가장 희귀음반으로 대접받는
<양희은-당신의 꿈,유니버샬,KLS56,73년>은 록의 대부 신중현과의
새로운 음악적 만남의 결과물이었다.
‘비브라토 없이 5시간 내내 함께 노래를 하며 하프연주 등을 넣는 등
신중현과의 포크록 작업은 흥미로왔다’고 양희은은 기억한다.
‘작곡에는 뜻이 없고 작사는 계속하고 싶다’는
그가 만약 한 대수, 김민기, 방의경 처럼 자신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가진 싱어송 라이터였다면 어떤 빛깔의 새로운 음악이 탄생했을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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