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마르셀 랑어데이크 지음)
‘...진짜 나도 그만 하고 싶다. 내가 이런 말 들으려고 이제까지 애면글면 그랬나 싶기도 하고...’
지난 달에 내가 가족 한 사람한테 보낸 문자 일부 내용이다.
가족은 서로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나누어야 할까?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있다면 그 사람한테 삶은 어떤 의미일까?
일상이 멈춰 선 낯선 풍경 속에서 나는 낯선 감정들과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였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이것은 내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며, 또한 지상에서 사는 동안 결코 그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병을 앓고 있다.”(p 51)
나이 들수록 ‘사람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아졌다.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정신 차리고, 좀 더 뭐라도 하면 되지.... 우리가 암묵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을 대할 때 노력, 의지, 하면 된다는 막연한 단어로 타인의 삶을 쉽게 재단한다.
‘웬만해선 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사람이다’라고 앞뒤를 바꿔 다시 고쳐 써 본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참을 수 없다면,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진심으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p 173)
이 지면에서 나는 안락사에 대한 찬반을 논하거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하지 않으려한다.
안락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사람이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삶은 의무가 아님에 마침표를 찍었을 뿐이다.
한 사람이 우주이고, 그 우주를 이해한다는 말, 그것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다. 자기 잣대로 판단하기 이 전에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바라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결국 그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애도는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삶이 꽤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것, 삶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애도는 계속해서, 계속, 계속하는 것이다” (p227)
누구나 가까운 사람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 하는 경험을 한다. 나도 같이 추억을 쌓으며 길벗으로 늙을 때까지 오래오래 놀자던 20년 지기 친구를 30대 후반에 보내며 한동안 길을 잃었다.
그 전 기억으로 올라가보면 죽음을 경험하기에는 이른 내 나이 20대 후반에 아끼던 동생을, 따르던 선배를 연이어 보냈다,
보내는 사람이나 가는 사람이나 아직은 청춘이어서 애도보다는 표적이 없는 분노와 부재(不在)의 설움을 꺼이꺼이 토해냈던 시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경험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사람을 보내는 일이지만, 나이가 주는 선물은 삶 안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무튼 나는 지금 살아있고, 삶이 건네는 희노애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아직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있어서... 더딘 슬픔으로 먼저 간 내 사람들에게 그리움을 보낸다.
※ 책소개 : 강영선
제주시 아라동에서 책점방 [아무튼, 책방]을 운영하고 있음
독립출판물+블라인드북+헌책+인문학
아무튼 책을 읽고, 팔고, 글을 쓰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