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의 상상력> (안희제 지음)
2021년 나의 상상력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한다. 난치의 상상력으로.
불쑥 다시 왔다. 제멋대로인 책방지기가 기어이 2020년을 보내고 서툰 몸짓으로 달리도서관에 기웃거림을 감히 양해 부탁드리며 2021년 첫 문을 두드린다.
기록이 멈춘 이 후 생각의 끈은 자꾸 잘려나가고 사유의 공간은 내가 앉아 있는 딱 그만큼에 머물러 있었다. 누구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나를 위해 책 속 걷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다짐을 새해 선물로 받아본다.
해넘이는 이래저래 뜻밖의 소식을 주고받고, 영혼 없는 인사말을 아끼지 않게 된다.
불현듯 생각났다. 30년 전 쯤 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가족과 친척 내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얼굴이 되어 가고 있는 사촌언니. 사촌오빠를 통해서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고작 전화로 안부를 묻는 형식적인 인사가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나이 차가 좀 있어서 똑똑한 언니, 서울에 있는 여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한다는 소식을 띄엄띄엄 들었는데,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 다시 만난 언니는 이미 삶의 경계선에서 많이 밀려나 있었다. 아팠을 뿐인데, 그 이후 언니는 칩거와 시설로 짐짝이 되어 옮겨 다녔다.
“우리는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세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난치의 상상력일 것이다.” (p 268)
언니는 존재하지만 부정당하고, 살아있지만 지워지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일상에서는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철저히 건강한 몸만을 기준으로, 건강해야만 하는 신화를 주입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쓰던 표현들이 목에 자꾸 걸린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야 누구나 갖고 있고, 건강을 강조하는 표현이라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섬뜩하다. 한 가지 기준만이 작동되는 사회, 그 안에서 사라지는 삶들을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아픈 이야기를 꺼리는 이유는 아픔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통증, 한계, 괴로움, 죽음에 대한 문화적 침묵’으로 이어져서 아픔에 대한 두려움을 강화한다. 아픈 사람들이 자신의 통증, 질병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는 일은 이러한 악순환을 끝낼 것이다.” (p 50)
올 해 50대 중반에 들어섰다. 아직은 큰 질병 없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누구나 걸어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 길 위에서 나는 늙음, 병듦, 죽음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어느 날 내 몸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이야기할 시간이 오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건강하지 못함이 자기 관리 실패로, 늙어감이 쓸모없음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솔직히 나는 두렵다.
“불변적인 정체성 대신 서사적 정체성으로 정체성을 사유한다면, 우리는 각 인물의 저자성이 존중되면서도 하나의 통일성 있는 이야기가 가능한 공동 저자들의 공동체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p 291)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글속에서 나는 가느다란 희망과 설익은 답을 찾은 듯 하다. 비장애 중심 사회에서 장애와 질병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하고, 차단당하는 그 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삶을 여성이 이야기하지 않고, 장애와 질병의 삶을 비장애인이 논하는 틀을 벗고,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정의 내리는 이야기들이 시끄럽게 쏟아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자리에 자신을 갖다놓을 수 있을 때 타인을 감히 상상할 수 있다. 2021년 나의 상상력은 지금 여기서 시작해본다. 난치의 상상력으로.....
※ 책소개 : 강영선
제주시 아라동에서 책점방 [아무튼, 책방]을 운영하고 있음
독립출판물+블라인드북+헌책+인문학
아무튼 책을 읽고, 팔고, 글을 쓰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