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오데시아(양자)는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글을 보면
하나님의 양자(아들들)되는 것이 시작 단계가 있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갖는 마지막 단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되었는데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봅니다.
엡 1:4-6에 나오는 "휘오데시아(양자)"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믿는 자에게 현실적으로 단번에 일어나는 성령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데(요1:12), 그처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요5:24).
여기서 "얻었고(에케이)"는 동사 현재형입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완전한 양자(휘오데시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날 때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롬8:15), 성령이 이를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롬8:16). 완전한 양자가 된것입니다
또
이미 양자가 된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후사가 되어(엡3:6)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이죠(갈3:26, 29).
그래서 양자된 아들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자라고 합니다(히2:10)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교리는
We become God(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라고 가르치죠. 그것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양자됨의 단계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교묘히 접목하여
크리스챤들이 나중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deification)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속성은 혼합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 참 사람의 속성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닮지 못합니다.
뉴에이져들과 몰몬교도들도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the deity of man) 믿으며
로마 카톨릭의 교리문답 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도 하나님이 될지 모른다" 라고 하였죠.
이단적 사상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쉐키나 정확히 지적해 주셨네요.
"양자의 영을 받았느니라"-과거
"양자될 것.." 미래
위에서 거론된 "양자" 문제는
기독교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어 온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의(righteousness)가 imputed인가 아니면 infused된 것인가, 또는 imparted 된 것인가의 문제죠.
개혁주의 신앙은 imputation, 웨슬리안은 impartation, 카톨릭은 infusion을 선호합니다.
양자됨은 칭의(justification)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주어지는 신분입니다(a status before God)
그러므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성도는 양자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양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한편
infusion은 하나님의 의가 전가(imputation)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믿는 자의 인격 속에 주입(infuse)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imparted righteousness 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고
추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의(righteousness)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imputed righteousness)는
단순히 회개한 후에 받는 죄의 사면(the remission of sins)로 보는 것이죠.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의(righteousness)가 주어져서
즉시 의롭게 되는 것이죠. 동시에 양자의 신분(status)를 얻는 것입니다.
롬8:23의 "우리의 양자 될것,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다" 에서
"우리의 양자될 것" 과 "우리 몸의 구속"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기독교 내에서 교리적인 논의가 있었던 주제이지요.
@김바울 위 쉐키나 님의 '이중적'이라는 언급을 고려하시고,
그 원문의 의미도 한번 더 살펴보시면 어떨까요?
롬8:15, 엡1:5, 롬8:23
@path
롬8:23의 "우리의 양자 될것,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다" 에서
"우리의 양자될 것" 과 "우리 몸의 구속"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waiting for the adoption, (that is) the redemption of our body" 라고 했죠.
그러므로
"우리의 양자 될 것 = 우리의 구속 = 부활의 영광" 입니다.
성도가 앞으로 완전한 양자에 도달하게 된다는 성경구절이 아닙니다.
@path 장차 있을 우리 몸의 구속이 양자 될 것이라는 본문이지요.
이미 양자의 영을 받았지만
그것은 거듭났을 때는 오직 우리의 영안에만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더 작동할 때 그분은 우리의 마음까지 거처를 확대하십니다(엡3:17).
그리고 우리 몸의 구속이 이뤄질 때 마침내 우리의 죽을 몸까지 이 양자의 영이
확대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장성한 분량에 이른 것입니다.
@김바울 거듭남이 다가 아니라
그 신성한 생명은 밭인 우리 안에 떨어져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확됩니다.
이것이 아들의 자격(휘오데시아)에 대한 성경의 제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