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말하는 도덕>
<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희랍에서는 용기. 절제. 중용. 정의. 친절등을 덕의 요소로 보았다 합니다.
유교에서는 인.의.예.지.충을 덕의 근간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근대에 와서 임마누엘 칸트는 덕이란 "모든 감성적 욕구를 극복하려고 하는 극기적, 금욕주의적 의지를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합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덕이라고 보았을까요?
신앙을 필두로 하여, 겸허. 인내. 순종. 경건. 소망. 사랑까지를 덕의 근원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도덕>
구약의 <헨(하난)>
구약성경 중에서는 우리 말로 <덕(헨)>이라고 번역된 것은 오직 한 구절에 불과합니다.
잠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그러나 이 말의 원어는 <헨(명). 하난(동)>인데, 우리 말로는 은혜(52회), 은총(13회), 긍휼(30회), 사랑(3회)...등, 아주 중요한 단어들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덕>이란 말은 아주 많은 의미들을 내포한 단어라고 볼 수 있고, 구약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 <은총>, <긍휼> 등은 하나님의 성품으로써 인간들에 대한 <호의>를 나타내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호의는 <받을 권리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속성> 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용어상으로 볼 때, <덕=은혜= 은총= 긍휼=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아레테>와 <오이코도메>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두개의 단어가 쓰였습니다.
<아레테>
빌4:8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벧후1;3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써 니라."
벧후 1;5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오이코도메(명). 오이코도메오(동)>...
롬14:19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롬15:2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전14:3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고전 :5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고전 :26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엡4:29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고전8:1 "지식을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10:23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4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17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을 세움을 받지 못하나니."
살전5:11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세우는 것과 같이 하라."
이렇게 볼 때, 신약에서 말하는 덕의 성격이란 <자기가 손해를 볼지라도 남을 배려하여 희생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긍휼>이나 <자비>나 <은혜>나 <은총>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실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스스로를 자제하시면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데. 이런 것을 <긍휼>이나 <자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비이기적인 태도, 즉 가장 이타적인 태도가 도덕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남을 위한 자기 희생>인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최고봉인 사랑과도 통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도덕의 최고봉은 사랑>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온전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5:43-45)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손해보며 희생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살아야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48절)을 보면,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우리가 닮아가야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도 이러한 아버지의 손해보심을 본받아서 손해보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온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도덕률의 최고봉이라고 봅니다.
첫댓글 도덕법이니 도덕률(율법)이니 하면서 왜 혼란을 야기시키는지 참 헷갈립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심으로 폐기되고 완성 되었습니다.
그 폐기된 율법이 사랑으로 종결 되었거늘 굳이 도덕이라는 단어로 사랑을 뒤로 보내시는듯한 이 느낌은 뭘까요???
갈렙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요지는 무엇입니까???
도덕은 사랑을 포함하는 큰 개념입니다.
나는 학교에서 도덕이라는 과목은 봤지만, 사랑이라는 과목은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도덕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렙 왜 이러십니까??? ㅎ
우리 광야학교에서 수업하고 있습니까???
수학,물리학 찾으시더니...
결국 그리로 가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 안에서 말씀을 사는것입니다.
말씀속에 도덕이 베이스가 되겠지만 튀어 나와선 아니됩니다.
우리에 일은 오직 하나님사랑,이웃사랑입니다.
@갈렙 우리들에게 도덕이라는 개념을 가르처 주시는 것은 좋으나 희석하시면 아니되십니다.
율법은 폐기하셨고 완성하셨습니다.
도덕적 개념을 무시해선 아니되나 도덕이 앞으로 튀어 나와도 아니된다 봅니다.
우린 오직 사랑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에..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킬때 도덕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 백마디보다 쉬운 말 한마디가 더 많은 분들을 구원할수 있습니다.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요지가 대체 무엇인지요???
당최 헷갈립니다. ㅎ
이 글은 심히 공감하나 댓글은??? ㅎ
@슈와아이나리 산업화 사회를 거치면서 우리는 <도덕>의 위상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삶의 지표를 알려주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분야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법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도덕에 따라 살 것인가를 묻곤 하지요.
법은 도덕에 비해 별 가치가 없습니다. 사회안정을 위해서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타율적인 것이고, 또 강제력에 의한 준수이기 때문에 참다운 것이라고 볼 수 없지요.
그래서 도덕성을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자들이 도덕률을 율법의 한 부분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사실은 십계명은 ,<십언: 열 말씀>이예요.
법이 아니란 뜻입니다. 명령적 성격을 띈 말씀입니다.
신학자들이 어떻게 정했든지 간에 율법에 포함시켜서 율법이 폐했다는 말씀 하나에 도덕률인 계명까지 끼워넣어 일괄적으로 폐한 것으로 보는 것은 삼가해야할 일입니다.
법은 시대에 따라 폐해질 수 있지만, 말씀은 페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갈렙 그래서 도덕이라는 개념을 세울 필요는 있겠으나 강조해서는 아니됩니다.
제가 처음에 갈렙님의 뜻에 동의 한것은 그 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논쟁이 심화되면서 산으로 가더이다.
마치 도덕이 먼저인양..???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지금도 도덕 안에 사랑이 포함이라는 말씀으로 사랑을 뒤로 보내셨습니다.
다시 한번 개념을 정리 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하나님인데 폐해지고 말고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 저것 섞지 마시고 확실히 도덕이라는 개념만 말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샬롬
도덕은 인간 상호간에 작용하는 것이고 사랑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죠
예수님도 상호간에 도덕적으로 주고 받았다면 십자가가 필요 없었을 텐데
그게 안되니까 처절한 십자가의 희생이 있던 것입니다
갈렙님 주변은 도덕적 사람들이 많으시니 사랑이나 도덕이나 별 차이 없으신 듯...인덕이 많으셔서 부럽습니다...
갓이나 쓰고 도포자락이나 휘날리며 살까봐요. ㅋㅋㅋ.
@갈렙 ㅋㅋㅋ
요즘 머리는 아프시겠어요~ ㅎ
그래도 갈렙님을 주 안에서 사랑한답니다.^^
@성도의본분. 너무 구박하지 말아요~ ㅎ
난 요즘 신선한 화두를 많이 던져 주셔서 좋은데..
모두 진심으로 토론 하잖아요.^^
사랑이 진리인데 도덕에 포함된다니. 농담꾼이군요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