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소개한 윤심덕은 너무 똑똑한 신여성이다보니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고 자살을 택하였지만 그시절 유랑극단의 배우와 가수를 겸하고 있던 이애리수는 인기를 뒤로하고 사랑을 찾아 신데렐라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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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이애리수 ▲ <황성의 적> 신문 광고 ⓒ 이준희 | |
황성옛터 / 황성의적 (1932)
노래 : 이애리수 (1910-2009)
작곡 : 전수린
작사 : 왕평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 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 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 터야 잘 있거라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끼'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줄곧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대중적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아갔던 인물이다.
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는 1930년 '황성(荒城)의 적(跡)'('황성 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그 살뜰한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그러한 경과를 보면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민족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 한 편의 절창을 남길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애리수는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어렸을 때의 이름이 보전(普全)으로 예능의 끼가 펄펄 넘치는 아이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완고한 집안 어른들에게 그리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이애리수는 여러 단원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과 전수린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를 산책하게 되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감한 심정에 젖은 두 사람은 눈물에 젖어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다.
그해 늦가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의 막을 올릴 때 이 노래를 배우 신일선에게 연습시켜 막간에 부르도록 했다.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어여쁜 배우였다.
이 곡을 듣는 관객들의 볼에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내렸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깊은 한숨까지 들렸다.
모든 청중의 가슴에는 망국의 서러움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비분강개한 심정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후 무대에서는 주로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마침내 빅터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가요팬들은 이 '황성의 적'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어났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창가나 영화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두리번거렸다.
극장에서도 반드시 임석 순사가 입회하여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가수가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고, 나중에는 기어이 트집을 잡아서 발매금지를 시키고 말았다.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전옥 등 새로운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다.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차츰 퇴조하게 된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관심권에서 멀어져갔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극약을 함께 나누어 마시고 정사를 시도한다.
겨우 구출되어 기력을 회복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된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다.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승낙하게 된다.
가수 출신임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 결혼 승낙의 조건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 이후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 가수라는 사실을 대학생이 된 이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비록 이애리수는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이후 수 많은 후배 가수들의 입에 올라 아직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귀에 익은 가수의 슬프고 애잔한 노래가 있다.
이애리수의 노래 '황성의 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첫 취입자인 이애리수가 1935년 이후로 사실상 연예 활동을 중단한 이후,
다른 가수들 가운데 특히 남인수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많이 부르자,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은 점차 잊혀지고 남인수가 부른 '황성 옛터'가 대신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지며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0세.
아래는 2008년 10월28일 이애리수의 생존을 대서특필한 신문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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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의 문화영화에 실린 남인수의 황성 옛터
황성옛터 - 김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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