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야생화 시집 제7집 [꽃, 내게로 와서 울었다]
삼백초 당신
구한말 갑부였던 증조부, 일제치하 때 술과 기생질에 노름에 흥선대원군처럼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 일경의 눈을 피해 家産 털어 점조직 운반책으로 하여금 만주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했다는 증조부, 결국엔 발각되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지 삼일 만에 운명하셨다는 증조부, 그때서야 비로소 파락호 행세의 이유를 온가족이 알았다는 증조부, 그때 그렇게 재산을 몰수당하자 그 충격에 이번엔 진짜로 파락호가 되어 노름에 계집질에 밥 먹듯 가출을 일삼았다가 병으로 요절했다는 할아버지,
내 어린 날, 일찍부터 청상과부로 살아왔다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개 삼고 누워 옛날이야기 듣듯 들으며 자랐는데, 강원도교육청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젊은 때 아홉 번이나 신청을 해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던 증조부의 독립유공자 지정, 이젠 그때의 증인들 모두 사망해서 더는 독립유공자 지정을 신청할 수 없게 된 증조부, 불충분한 증거를 정부에서 대신 찾아 보완해 주면 안 되나? 왜 꼭 신청인 당사가가 증거를 찾아 보완해야만 하나? 그때는 법이 그랬다.
어느 누가 보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했겠냐마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어도 내게는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긍지의 증조부, 당신의 혼백이 저 삼백초 하얀 잎사귀 하얀 꽃송이 총총 꽃망울마다 영원한 빛남의 옥구슬로 맺혀 오늘도 반짝인다.
육이오 한국전쟁 발발했을 때 삼팔선 수복지구에 군번 없는 열여섯 살 소년학도병으로 참전해서 강원도 골짜기를 누비며 전투를 하고 휴전선이 그어질 무렵 인제의 향로봉 전투에서 삼중 포위망을 뚫고 겨우 살아 돌아왔다는 아버지, 휴전 되고 나서 병역필확인서를 작성해주겠다는 소속부대 중대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시 정식으로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는 아버지,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하려고 했더니, 다시 정식으로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쳤기 때문에 신청 사유가 되지 않는다나? 그때 소속부대 중대장의 권유를 받아들였어야 했었단다. 그때는 법이 그랬다.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국가유공자 선정도 영원한 물거품이 되어버린 아버지, 그때의 아버지는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가득 찬 忠正心 하나뿐이었겠지만, 거나하게 술 취하면 자식들 붙잡아 앉히고 한 소리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며 술 깰 때까지 밤새도록 전투 무용담으로 끝이 없던 아버지, 하얀 이파리 너울거리는 삼백초 볼 때마다 지금도 당신의 얼굴이 겹쳐진다.
뿌리와 잎과 꽃이 희다 해서 불리는 三白草 당신,
두세 장의 하얀 잎을 낱낱이 세어 줄기와 뿌리까지 모두 다섯이 하얗다는 五葉白 당신,
제주도는 아주 오래된 옛 고향, 이젠 서울에서도 가끔 만나볼 수 있는 당신,
그런 당신을 오늘은 꿈속에서 만난다.
※ 삼백초(三白草) : 삼백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제주도의 저지대 연못이나 습지 또는 낙엽수림 밑의 축축한 풀밭에서 매우 드물게 자라는 습지식물이다. 보습성이 충분하고 비옥한 토양에서 주로 자라는데,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희귀식물이다. 뿌리줄기는 옆으로 길게 뻗으며 흰색이다. 줄기는 곧추서는데 키는 높이 100cm까지 자란다. 잎은 어긋나는데 잎자루가 조금 길고 잎자루 밑부분의 양쪽이 다소 넓어져서 원줄기를 감싸 안는다. 잎몸은 긴 계란 모양의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밑부분은 심장 모양으로 가운데가 우묵하고 5~7개의 맥(脈)이 있다. 잎의 표면은 연한 녹색을 띠고 뒷면은 연한 백색을 띠지만 줄기 윗부분 2~3개의 잎은 꽃이 필 때 표면이 백색으로 변한다. 6~8월경에 흰색 꽃이 피는데, 줄기 끝의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이삭꽃차례에 모여 달린다. 이삭꽃차례는 잎과 마주나는데 꼬불꼬불한 털이 있고 처음에는 밑을 향하지만 나중에는 똑바로 선다. 작은포(苞)는 계란 모양의 원형이며 꽃자루는 아주 짧다. 꽃잎은 없고 수술은 6~7개이며 암술은 3~5개이다. 열매는 둥글고 씨방에는 1개의 씨(종자)가 들어있다. 한방에서 ‘오엽백(五葉白)’이라 하여 약재로 쓴다. 중국산 삼백초를 들여와 재배하기도 한다. 삼백초속에는 전세계적으로 2종이 있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일본, 중국, 필리핀 등의 동아시아 지역에는 ‘삼백초’가 분포하고, 나머지 또 하나의 종(種)인 ‘양삼백초’(Saururus cernuus L.)는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에 분포한다. 남부지방과 울릉도에 야생 상태로 퍼져 있는 ‘약모밀’에 비해서 키가 크고 꽃차례는 더욱 길며 생선비린내 같은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서로 구분된다. 뿌리, 잎, 꽃이 백색이므로 또는 윗부분에 달린 2~3장의 잎이 희어지기 때문에 ’삼백초‘라고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