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살며, 지붕은 띠로 덮었다. 겨울에는 긴 구들을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지펴서 방을 덮힌다." <<구당서>>
(숙신씨가) " 땅 속 움집에서 살고, 출입구는 지붕에 있고,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출입한다.<<진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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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백제전의 기록으로 보면,백제왕이 왕흥사에서 예불할 때"십여 명이 앉을 만한 크기의 돌이 저절로 따뜻해지므로 돌석이라고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의 <<보한집>>이라는 책에서도
평안도 구성의 어느 이상한 도인인 고행선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좌빌돌상'에 나오는 빙돌(차가운 구들)이 있다. 이외에도 <<용제총화>>에서는 '다온방난돌'로 <<구황촬요>>에서는 '태곡온돌' 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훈몽자회>>에서는 '항(炕)을 '구들강' 이라고 토를 달아놓은 것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돌과 난돌, 항방, 욱실 등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관아나 궁실과 관련 있는 건축물을 보수하거나 신축한 사실을 기록한 <<초중창중수기>>에 보면 선산, 경상북도 상주, 경상남도 안동 등지의 관아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시설을 구비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령을 넘어 남부지방으로 구들이 남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남부지방의 구들은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위해 지어진 관리들을 위해 지어지 건물에 먼저 조성되었고, 후에 백성들의 살림집에까지 보급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서기 1512년에 강혼이 쓴 풍천도호부의 <<객관중수기>>와 경상북도 인동현의 망호헌 수리내용에도 구들를 설비한 기록이 있다.
제주도에 구들이 전파된 예로, 15세기 말에 제주 출신의 고득종이 기록한 <<홍화각중수기>>에는 구들을 서쪽 방에 설치했다고 나와 있다. 비슷한 시기의 사항을 기록했다고 판단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 백성들의 살림집에는 아궁이와 구들이 없어 땅바닥에서 잔다"라고 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 제주 목사를 역임한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도 백성들의 살림집에는 구들이 없다고 나와 있다. 이익도 그가 살던 제주도 백성들의 살림집에 비로소 방 하나 정도의 구들 시설을 놓기 시작했다고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중국측 문헌인 <<수경주>>를 살펴보면 "관계사에는 천 명의 스님을 수용할 만한 큰 방이 있는데, 방바닥 밑에 돌을 괴고 진흙을 발라 공기가 여러 가닥으로 내부를 소통하게 하고 그 속에 불을 내류시켜서 따뜻하게 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신서>> 고구려 항목에도 겨울에 구들을 만들어 따뜻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밖에도 많은 기록들이 청나라에까지 이어지는데, 그들과 다른 새롭고 이상하며 진기한 풍속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땅인 지금의 동삼성 지역에 관한 기록으로, 최초에는 '坑(중국식 발음은 캉)' 이었다가 '炕' 으로 글자가 변하였고 '土炕'으로도 표기했는데,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구들시설을 '촹狀' 또는 '토촹土狀'으로 부르고 있다.
<<수경주>>의 기록을 문헌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서기 500년~513년 사이에 기록된 책으로써 강이나 하천에 관해 조사,기록한 일종의 지리서이다.
위서 수경주 40권 포구수조 려도원 저에 따르면 "포구수는 또 동쪽으로 흐르면서 거량수가 흘러든다. 거량수는 토은현 북쪽의 진궁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관계산을 지나며 과녜수라 부른다. 관계수 동쪽에 관계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 안의 전당은 높고 크며 넓기에 천 명 가량이 들어갈 수 있다. 지면은 모두 석판으로 깔았고 지붕의 틈새는 모두 흙으로 메웠으며 바닥에는 많은 통로가 있어 마치 경맥이 사면팔방에 뻗쳐 있는 것 같다. 절 밖의 전당바닥도 네 면에 모두 아궁이가 있어 불을 지필 수 있기에 열기가 아궁이를 통하여 통로에 들어가 전당 내의 전체를 따뜻하게 데울 수 있다. 이 일대는 기후가 춥고 찬 냉기가 들어오는데 출가한 승려들은 거의 다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신도들은 그들의 수도가 영향을 받을까 염려해 이 전당을 특별히 높고 크게 지었으므로 수도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수경주 권 14에 포구수조가 있음). 라고 되어 있다.
구들의 시초라고 생각되는 최난방법으로 우리 구들과 비슷한 것이 처음 문헌에 나타난 것이다.
<<구당서>> 199권 앞부분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이 많아서 겨울에는 긴 구들을 만들고 구들 밑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하였다"...<<신당서>> 220권 동이고구려전에도 "가난한 자들은 겨울에 긴 구들을 만들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하였다"
송국인 신엽질이 여진금국에 끌여가서 목격한 바를 기술한 <<절분록>>의 학해류편본에 따르면 "모두 흙으로 된 구들 안에 들어가서 "구부려앉은 자세'로 거하였으며 많은 풀들을 그 안에 넣었다. 그 안은 스스로 따뜻해져서 이반 밖과는 많이 다르다. 천보 십오년에...그래서 겨울에는 너무 추워 흙으로 된 구들 안에서 살아야만 추워를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송모기문>> 고금설해본의 혼속조에 나오는 홍호의 저서에 따르면 여진족 주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인들이 집에서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모두 구들에 앉는다. 남편이나 사위들은 그 밑에 나란히 앉아 있으므로 남자가 여자의 아랫쪽에 있다고 운운하고 있다."
호호는 15년간 여진금국에 잡혀 있던 사람으로서, 여진족이 살고 있는 곳에 구들이 있음을 알게 된 송국인 이었다.
같은 송나라 사람 우문무소의 <<금지>> 초흥풍토에 따르면 "흙을 파서 침대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지펴서 숙식은 그 위에서 한다" 고했고, 청초인 고담무가 쓴 <<일지록>>의 집석본 28권 토항조 "북쪽 사람北人들은 흙으로 침대牀를 만든다. 아래쪽은 공간을 두어서 불을 피우는데 '구들' 이라고 부른다. 고서에는 기록이 없다." (원주 <호엽전>[:'박잎' 전, 주희의 시경집전을 말함]에서는 '불에 굽는 것을 炙(적)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정의하면 '구들 곧 거(擧)라고 볼 수 있는데, 물건으로 꿰서 불 위에 들어 올려 굽는 것을 이른다.') 청비류초 풍토류의 북인상항조에 의하면, "북쪽 사람들은北方居民 실내에 모두 큰 통구들이 있어서 신을 벗고 올라가 생활을 한다. 구들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며 저녁에는 다리를 편 채 눕는다. 그리고 방석에 앉거나 높은 침실도구를 사용한다. 구들의 사용이 어디서부터 기인된 것인지는 모른다. 동쪽으로는 태산부터 북위 37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하북성 내의 위장강을 지나, 산서성내의 분진강을 거쳐 섬서성을 넘어 서북쪽의 감숙성 동부 용판산까지, 무릇 이 지대의 북쪽 사람들은 돈 많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잠자는 모든 곳이 흙과 벽돌로 만든 구들을 사용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폭은 5~6자이며 세 면이 모두 벽으로 되어 있고 남쪽구석에 바짝 붙여서 그 빝을 취하며, 먼저 깍아서 길을 내고 숯을 태워 따뜻함을 취했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그 옆에 부엌을 만들어 음식도 만들고 구들도 뜨거워 질 수 있게 했다. 나이 많은 자와 아이 그리고 남자와 부인들이 구들 위에 모였을 뿐 아니라 그것의 풍경에 관해서도 시인들의 작품 여러 곳에 실려 있다(<<담연거사집>>)."
<<수경주>>를 근거로 북위시대 이전부터 "중국 스스로 있었다[통용편通容編 제십이第十二]" 라고 하는 '중국 기원설' 과 산서성에서 발생하여 만주로 다시 남하하였다는 '산서성 기원설', 손진태, 최남선, 이만확, 현규환 등이 <<일지록>>의 고려전(고구려전)을 근거로 삼아 주장한 '고구려 기원설', 원래 중국에 없던 구들이 금나라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동호, 동이 기원설', 구들이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전수되었고 창시지역은 백두산이라는 김태양의 '만주 기원설'등이 있고...
중국의 한족들에게도 칸[항(炕)]이라고 불리는 온돌문화가 있지만 우리의 구들과는 달리 부분적인 온돌로 입식생활 형태이다. 우리의 구들은 기본적으로 취사와 난방을 겸한다.
약 오만 년 전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회령군 오동의 제8호 '집자리' 에서 바닥의 화덕자리와 더불어 모퉁이와 벽면에 여러 개의 주구(굴뚝자리)가 발굴되었다. 이는 움집에 화덕과 굴뚝을 연결 하는 '외고래 구들'을 설치하여 난방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굴된 주거지를 보면 하나는 지상에 설치된 가옥이고 하나는 반지하에 설치된 가옥으로 이들 모두 선사시대 이후의 전통적인 '움집' 형태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