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에세이]강신익의 감성 Plus
나는 교수다.
강신익(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나는 가수다.’라는 경연 프로그램이 장안의 화제다. 그동안 많은 드라마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고 화제가 된 적도 많았지만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픽션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극중의 인물과 공감을 하고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만 그 상황이 가상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에서 참가자를 선정하고 공연의 방식과 경쟁의 규칙을 정하는 등 큰 틀은 방송국이 짜지만 그 밖의 상황은 온전히 가수와 평가단과 시청자 등 참가자들이 만들어간다.
누구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대중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프로그램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이 프로그램은 모두가 함께 즐기면서 만들어가는 현실 속의 드라마가 된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몰입하다보니 그 영향이 참가하는 가수들에게 되먹여지는 선순환이 된다. 참여와 공감의 상승작용이다.
가수와 교수는 발음상으로는 모음 하나 차이지만 성격상으로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직업이다. 가수는 가슴으로 느끼고 목으로 노래하지만 교수는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으로 기대된다. 교수에게는 냉철한 이성이 가수에게는 몸을 통해 전달되는 감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교수들은 이 방송이 인기를 끄는 현상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딴죽을 걸고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몸과 마음, 머리와 가슴, 이성과 감성, 생각과 느낌의 이분법이다.
하지만 과학적 이성이 발견한 감성에 관한 사실들은 그 둘이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론에 따르면 생각은 느낌이라는 대양을 항해하는 작은 배에 불과하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생각을 움직이는 건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는 감성일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냉철한 이성이 쓸모가 없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그 이성을 이용해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갈 선박을 건조할 수도 있고 과학에 바탕을 둔 항해술로 안전하게 대양을 오고 갈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둘을 너무 뚜렷이 구분한다는 거다.
몇 해 전 우리 학생들이 자원 봉사할 곳을 물색하느라 장애아들이 수용되어 있는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장애아들은 중증이어서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방에 들어서자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아이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나를 꼭 껴안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가 나를 껴안았던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를 헤어진 아버지로 착각했을 수도 있고 그저 사람의 체온이 그리웠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놀란 나머지 그를 제대로 위로해주지도 못했다. 그곳 선생님이 아이를 나에게서 떼어놓았을 때도 나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만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경험은 두고두고 선생으로서의 내 인생을 비춰볼 귀중한 거울이 되어주었다. 진정한 배움은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내가 깨달은 것이 무언지를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교수로서 학생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무척 중요한 지침이었던 건 분명하다.
학문(學問)은 묻고 배움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같은 성인들의 가르침이 모두 대화체로 되어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제자들의 품성에 따라 어짊(仁)을 설명하는 방식이 다른 것도 성적이나 스펙이 아닌 주고받음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깨치는 학문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교수들은 친구를 이기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파는 소매상이 되어가고 있다. 연구비를 따고 실적을 올려야 하는 경쟁의 틀에 갇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취직을 위해 다시 전문 학원에 다녀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물음이 없으니 배움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오직 경쟁이다.
‘나가수’는 피를 말리는 경쟁 속에서도 진한 감동을 만들어낸다. 노래만큼은 아니더라도 교육 이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나는 교수다. 나를 꼭 안았던 이름 모를 장애아가 내게 준 알 수 없는 감동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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