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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교⑭ / 대한성공회 | 제 45호 199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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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 정신으로 사회운동 앞장 김홍일 대한성공회 신부 |
▲서울대성당 제단의 대형 모자이크화. 성서를 든 예수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성공회의 신앙정신을 상징한다. |
여기서 토착화란 단순히 토착문화에 동화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민이 안고 있는 역사적인 고난의 짐을 떠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환경과 인권문제 등을 교회의 중요한 신앙문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토착화 또는 기독교의 한국화란 한국의 문화전통을 존중하면서 기독교의 보편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서양의 옷을 입고 성장했다면 한국 정신문화의 토양 속에서 새롭게 뿌리내려야 하는 과제가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안타깝게도 ‘기독교문화=서구문화’의 등식을 고집하고 있다. 교회를 한국식으로 건축하거나 예수상을 한국인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첨예한 문제인 제사의 경우 개신교회는 철저하게 이를 거부한다. 제사는 사탄에 빠지는 것이라거나,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제사에는 종교적 색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드는 하나의 민족문화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과 달리 윗사람을 만나면 먼저 깍듯이 인사하고 존대하는 것이 바로 한국문화이고 한국인의 예절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면도 또한 중요할 것이다.
때문에 성공회에서는 97년 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예배서를 발간했다. 조상에 대한 예절문화와 종교적 신앙을 엄격히 구분한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예배문은 전통적인 제사 양식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격식에 맞춰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다거나, 잔을 올리는 예식을 하나의 예절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몇가지 제약은 있다. 지방을 써 붙인다거나 젓가락으로 그릇을 두드리는 등의 행위는 조상신을 부른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금한다.
화장도 적극적으로 권한다. 기존의 기독교인들은 부활사상을 이유로 화장을 금하고 매장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깨뜨린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성당과 일부 교회 내부에는 납골당이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의 집’을 마련해 유골을 안치하는 것을 장려한다.
초기부터 사회선교에 깊은 관심 나타내
하느님나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교회의 선교는 교회로부터 사회의 모든 곳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 사회는 선교와 복음 선포의 현장이 된다. 이와 같은 교회의 선교정신에 따라 대한성공회는 이 시대 민중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고 겨레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해 각종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한성공회는 초기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듯 처음부터 사회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5대 주교인 김요한 주교는 1960년 군사혁명의 결과 태백산지역에 투입된 국토건설대의 현황과 영등포지역의 산업현장을 보고 산업사회에 교회선교는 산업선교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강원도 황지의 광산촌에 교회를 설립하여 몸소 광부들을 위해 선교했는가 하면 영등포에 산업선교센터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에 앞장서기도 하는 등 한국교회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선교활동을 수행했는데 이는 한국 산업선교의 효시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선교활동이 본격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하자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이 선교의 제일 과제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민주화운동에 교단의 모든 역량을 집결시켜 정의실천사제단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다. 이런 까닭에 시청 앞에 있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6·29 선언을 이끌어낸 6·10항쟁의 진원지로도 유명하다.
당시 이 운동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인사로는 NCC의 인권위원, 교회와 사회위원으로 수차례 연금과 체포, 수사를 당하기도 했던 이재정 신부(현 성공회대학교 총장), NCC 인권위원장을 지낸 고 박종기 신부 그리고 정철범 대주교(현 관구장), 김재열 신부(현 교무원장) 등이 있다.
성공회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눔운동’이란 새로운 사회선교활동을 전개한다. 이는 경제성장 정책의 그늘에서 비인간적 삶을 살고 있는 민중과 함께한다는 신앙의 기치 아래 한국사회 제반 분야에 걸쳐 나타나는 많은 문제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으로 해결하려는 신앙운동의 일환으로 특히 도시빈민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86년 9월 불암산 기슭 상계동 달동네에 자그마한 전세방을 얻어 ‘상계동 나눔의 집’이란 간판을 내걸고 나눔운동을 시작했다. 뾰족탑과 십자가로 상징되는 교회 건물 대신 허름한 일반 집에서 예배와 성경공부는 물론 야학과 탁아소 등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초창기에는 교회 안팎에서 상당한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나눔의 집에서 일하는 신부와 실무자들의 헌신적 봉사는 곧 널리 인정받게 되었고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나눔의 집 사업은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한국 빈민복지정책의 전환이라 일컬어지는 빈민지역의 저소득층을 위한 자활지원센터의 이념과 모델을 제공하는 등 빈민복지정책에 상당한 기여와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 IMF 시대를 맞이하여 그동안 축적된 선교역량으로 어느 단체보다 앞장서서 실직자와 노숙자 문제에 적극 대응하여 노숙자 쉼터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자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성공회는 이 땅 위에 바람직한 교회상을 정립하고 선교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중심은 서울시 구로구 항동에 자리잡은 성공회대학교다.
성공회대학교는 1914년 인천 강화에서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및 영성훈련기관인 성미가엘신학원으로 개교했다. 40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폐교당하는 등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다가 48년 인천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50년 한국전쟁 중 원장 이도암 신부와 교수 조용호 신부가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희생당하면서 다시 문을 닫았다.
그후 61년 9월14일 현재의 항동캠퍼스를 마련하고 문을 열면서 일반 대학 출신 학사학위 소지자들을 입학시켜 3년간의 신학 기초교육과 목회훈련을 시키는 신학교육 전문대학원의 새 모델을 도입하였다가 82년 정부 시책에 따라 4년제 학부과정 대학으로 개편했다. 89년 3월에는 교명을 현재와 같이 ‘성공회대학교’로 변경, 승격하여 종합대학교라는 새로운 체제로 출범했다.
성공회대학교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이념을 바탕으로 대한성공회의 선교정신에 입각한 열림·나눔·섬김의 교육이념을 근간으로 인간화·사회화·민주화를 교육목적으로 하여 다양한 교육목표를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이념과 목표가 잘 드러나는 것이 학교 산하 부속기관 혹은 연구소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산복지관, 점역봉사센터, 사회봉사정보센터 등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는 기관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특히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통한 실천적 교육을 위해 부설 교육시설로 정신지체인들을 위한 성베드로학교, 유아 교육을 위한 성아어린이집(서울 강남구 소재), 청소년들을 위한 가산동 청소년독서실(서울 금천구 소재)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IMF 시대를 맞이하여 98년부터 서울시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고, 보건복지부 지원으로 사회복지활동지원센터를 대학 내에 설치, 운영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등 다양한 교육사업 펼쳐
뿐만 아니라 한국예전음악연구소, 한국사회문화연구소,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성공회대학교 노인복지연구소, 인권평화연구소 등 부설 연구소를 통해 21세기 한국사회 혹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 설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밖에 대한성공회는 종교개혁을 경험한 개혁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영성운동의 요람인 수도회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는 3개의 수녀원과 1개의 남자 수도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겨레의 생명 터전이 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회원 교단으로 혹은 국내 여러 교회를 비롯하여 세계교회와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선교적 협력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첫째, 한국 교회의 활동을 고무할 수 있도록 전국 신자들에게 전도의 열의를 일으키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유형의 중심체가 되어야 하고 둘째, 어떤 민족이든 교회를 통하여 하나의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하며 셋째, 전국교회가 하나의 규범으로써 절차에 맞는 예전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하며 넷째, 미래 교회 건축의 하나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 1999.2월호 |